길 위의 교회(1)

교회, 길을 걷다

-제1회 임진강 민통선 트레킹에 부쳐-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당을 벗어나 길 위에 나서 보자고 시작한 첫 번째 시도로 임진강 민통선 트레킹에 나섰습니다. 두 교회 약 30명이 함께 합니다. 예배도 설교도 기도도 찬양도 없이 그저 함께 걸어보려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배당과 조직과 교의와 ‘이런 게 교회다운 교회’라는 지난 백년간의 철갑을 두른 틀에서 벗어나 보려고요. 아니죠. 우리가 어머니께로 나올 때 우리가 무슨 기독교도라거나 무슨 교의를 신봉함으로써 인생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후에 결국 이런 사람들이 됐을망정 사람의 본질인 영혼은 역시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도 가둘 수도 갇힐 수도 없는 것이죠. 인생의 의미란 각자의 길 위에 서서 각자의 길에 적응하는 것일 뿐. 있다면 이 길이라는 공통의 길의 법이 있을 뿐 아닌가 합니다.

 

돌이켜 보면 길에 적응하는 동안 길이 길을 열고 길을 내고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떠나고 떠나고 떠나왔습니다. 어떤 인류의 스승께서 가르쳐준 말씀처럼 ‘모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믿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깨달은 것으로부터의 자유. 도달하고 이룩한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제 교회라 불리는 모임도 길 위에 나서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안다는 아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르렀습니다. 교의가 아니고 교파가 아니고 교단이 아니고 우리가 놓인 이 공동의 생존 조건 속에서 길이 길을 가르쳐주기를, 길이 길을 열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거창할 것도 거창하게 주장할 것도 없이 두벌 옷과 지팡이를 지니지 않은 맨 몸과 빈 맘으로 나서보려 합니다. 길을 나선 우리의 몸이 맘이 각자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요? 아무 생각이 없이 걸음에 집중하게 되는 거기서부터 진정 필요한 숨과 힘이 우리의 결핍과 해답을 가르쳐 줄 겁니다.

 

 

임진강은 한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은 자연이라 그 무슨 법으로도 이념으로도 철조망으로도 댐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를 연결해주는 임진강을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를 가르는 강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렇게 믿어왔고 믿다보니 실제로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이제 오랫동안 꿈으로만 말로만 글로만 상상력으로만 꿈꾸고 말하고 쓰고 그려보던 일들이 사실은 본래 현실 그 자체라는 이 쉽고 간단한 진리를 다른 무엇이 아닌 새로운 길 위의 나선 맨몸으로 느끼고 인정해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모든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우리의 서로를 갈라놓은 거짓된 임진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겁니다. 비무장 지대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자유왕래가 시작된다니 이게 본래 그런 것이 아니고 뭣이었겠습니까. 본래 그런 것을 그런 것으로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과 참혹하고 악독한 거짓들이 벌어졌습니까? 모든 것이 그 거짓의 교의에 종사하며 모든 것이 우리를 옥죄었습니다. 정치나 이념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 종교였습니다. 모든 본래 그러한 것이 본래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기까지 우리를 가로막고 서있던 정신상의 우상.

 

 

 

지난 주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2018년 10월 22일) 목사님이 소천 하셨습니다. <미스터 선샤인>에도 나온 이 이름은 ‘고귀하고 위대한 이’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책은 단지 몇 권 읽어봤습니다 마는, 기억나는 건 세 가지쯤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20대에 처음 목사로 부임해 목회를 시작할 때, 그 교회에 가서 느낀 첫인상이 자기 목회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성도들이 한결 같이 개성이 없이 똑 같은 지. 그것이 마치 개성뿐 아니라 지성도 명철도 현명함도 눌려서 상실된 것과 같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기의 목회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것’, 그것이 되어야할 것이라고. 그렇게 10년을 했더니 그 다음에는 사람들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두 번째는 ‘이제 바쁘다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바쁘다’는 게 단지 여유를 가질 수 없이 할 일이 많은 걸 가리키는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의 문제가 된 바쁨은 오직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인식상의 고정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바쁨의 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개인의 사업을 멈추고 교회로 가서 목사를 도와 하나님의 사업(교회 일) 열심히 하라는 결론으로 갈 수가 없죠. 그 바쁨이 사회적 문제가 아닌 신학의 문제라 했을 때는 반드시 이대로는 아닌 근원적 사색과 행동을 요구하는 문제의식으로서, 우리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라 제시하는 모든 교의와 의식과 봉사와 실천의 종교 전체를 신학적으로 재검토하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 신학적 의미로 지금 교회들은 너무 바쁩니다. 그 바쁨은 게으름이기도 한 것이죠. 너무나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고 너무나 게을러서 오로지 답습의 보수 말고는 알지를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바쁜 거기에 종속돼 있는 것 말입니다.

 

셋째는 개인적인 것인데,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 하나로 ‘사모의 얼굴은 목사의 이력서’라는 말입니다. 사모뿐이겠습니까? 모든 부인들의 얼굴은 남편의 이력서지요. 또 모든 남편의 얼굴은 부인의 이력서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결국 하나입니다. 모든 인위에 지치고 피곤하고 메마르고 강퍅해지고 부패하고 오염되고 악해지고 마침내 공허해진 모든 거짓된 말들과 의식과 허세와 사업. 그 모든 이미 아는 척으로부터 모든 이들의 믿고 안다고 믿어온 거짓 종교를 해방시킬 때가 왔습니다. 아니, 2000년 전 유대 예루살렘의 젊은 스승 예수의 말씀처럼 거짓 종교에서 정직을 다해 스스로 해방될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 예배당에 갇힌 신은 신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교의에 갇힌 신도 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나누고 배제하고 배타하고 구별하고 낮게 보고 정복하고 교화시키려드는 더 강한 신들의 바쁘디 바쁜 종교사업도 더 이상 권장할 것으로 사람들 앞에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나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가장된 좋은 것입니다. 이력서는 꾸밀 수 있지만 얼굴을 바꾸진 못하죠. 얼굴은 고칠 수 있지만 영혼으로부터 발산되는 지성과 지혜와 명철의 빛은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가장 거룩함과 고결함과 장엄함을 가장하고 꾸며내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의 양심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지금 교회라 불리는 추상적 명칭과 그 추상을 힘입어 위세를 부리는 조직에는 신이 안 계시고 역사적으로도 늘 안 계셨고 본래 신께는 그런 사원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음을.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 교회라는 서사로부터 벗어나야지만 진정한 신께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아니 아니라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것임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3~36)

 

인정할 것을 인정함으로써만 우리 모두를 지금의 거짓된 현실로부터 우리들 자신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교회가 기로에 서있습니다. 부득불 불가피하게 하던 사업들을 끝내야할 때가 온 겁니다. 특히 교회는. 모든 사업(死業)을 멈추고 처음 출발했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각자의 역사를 핑계로 하나님의 뜻을 인위적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는 99.9999%가 부동산이라고. 그러니 우리의 출애굽은 건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겁니다. 건물이 만든 신과 신학과 사업들.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함께 숭배할 수 없는 거라면, 그것이 맞는다면, 우리는 서둘러야 할 겁니다. 문제라 하면서도 그대로 눌러 앉아 뭉개고 있는 신앙은 이제 내밀만한 이력서가 못될 마이너스 스펙이 될 겁니다.

 

 

아직도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오만하다고, 편협하다고, 또 사랑이 없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우리는 오히려 모든 저마다 바쁜 사람들의 대충 그러한 진리의 적이 되는 오해도 불가불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가진 것으로부터의 자유, 의지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아는 것, 가진 것, 의지하는 것에 의거해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죠. ‘가난한 너희들은 행복하다. 천국은 너희 같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니까.(누가복음 6:20)’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도 교회도 길 위에 서 있고 길을 걷도록 부르신 이것이 또한 신의 부르심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를 보다 분명한 실제의 길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아닐까요? 그러나 교황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입니다. 우리는 대통령도 아니고 군인도 공무원도 검찰도 법관도 목사도 의사도 사업가도 학생도 어린이도 노인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참되게 아무것도 아님을 알 때 우리는 참되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을 뿐. 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울 뿐. 그 길에서 평등하게 만나는 예배를 위하여. 신 없는 교회를 벗어나 사원 없는 신께 경배 드리러 예루살렘의 고루한 서사가 끊어진 광야로 나가려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야훼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사무엘상 2:10)’

 

하나님의 자녀의 출애굽(Exodus)을 가로막는 파라오는 그의 화려하고 잡다한 신전과 함께 공허하게 허물어질 겁니다. 세습까지 하며 자기들의 제단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저들의 바쁨에 비하면 얼마나 통쾌한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오직 맨 몸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우리의 전도라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한 것 없이 보수를 받은 사람처럼 행복할 겁니다. 다복(多福)과 조이(Joy)와 이수를 위하여!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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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쓰신 편지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 속에서 제 이름이라도 호명될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있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답글 한번 보내드리지 못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제 입장을 지지해주실 너그러움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의 처지를 살피는 마음이 유난하신 분이기에 제 처지는 언제나 선배님의 시야 안에 놓여 있음을 많은 편지들 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들녘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에서 유년시절에 들었던 소리들을 표현해 주셨네요. 그 대목에서 제 심장이 그 소리들을 따라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소리들을 따라가다가 그만 울컥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보글보글’ ‘자작자작’ ‘탁탁’ ‘사르륵사르륵’ ‘솨아솨아’ ‘똑똑똑’ ‘꿀꿀꿀’ ‘구구구구’ ‘컹컹’, ‘참새, 직박구리, 꾀꼬리, 뻐꾸기, 꿩, 멧비둘기, 뜸부기, 부엉이, 소쩍새 등 각종 새울음소리들’, 다듬이질 소리, 새 쫒는 소리, 알밤 떨어지는 소리, 얼음장 깨지는 소리, 문풍지 떠는 소리 …(69-72쪽).

 

어릴 적 들었던 기억속의 소리들이 거기에 있었고, 그 소리들은 단지 추억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의 모양을 만들어낸 소리들로 느껴진다는 말씀에 제 마음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소리들이 그리워 시골에 내려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소리와 함께 그 소리를 내는 어른이나 듣는 아이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농촌현실에서 절망을 느끼곤 합니다. 그 소리들은 인간의 삶의 원형에 닿아 있고 생성과 소멸 너머에서 들려지는 영원의 편린과도 같은 소리라고 해석해 주실 때는 그 그리움의 의미와 양이 배가되어 울적한 심정으로 한참 동안 마음이 정지해 있었습니다.

 

농촌에 내려와 처음 만났던 이곳의 들녘은 지금은 더 이상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죽음의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들녘에서 허리를 굽혀 일하던 농부들의 모습과 그들이 일을 하면서 서로 부르는 소리와 노래는 더 이상 들판의 메아리가 되지 못합니다. 돌담 너머로 넘나들던 소리들과 동구 밖에서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나누던 이야기 소리는 그친지 오래입니다. 농번기에는 사람을 대신하여 농기계소리가 벌판을 휘젓고 있을 뿐이지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25년 전 이 벌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만났던 어른들이 모두 떠난 지금 외로움을 벗 삼아 홀로 벌판을 지키는 심정이 참담합니다. 씨앗의 이야기는 종묘상이 빼앗고 갔고 노동의 이야기는 농기계에 빼앗겼습니다. 수확의 기쁨은 외국산 농산물에 치여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피폐해진 농촌 모습의 결론은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까지 왔습니다. 수백 수천 년 대지를 바탕으로 이어온 농민들의 이야기 소리는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그 소리들을 아직도 기억해내고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에 고요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번잡한 도심의 폭력적 소음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현실에서 그 옛날 고요함의 흔적들을 끌어올려 소란스런 일상을 정화하고 삶의 관점을 전환시키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고요함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능력 중에 어쩌면 가장 고귀한 능력일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세미한 소리 가운데 소명을 위임하시는 분 앞에서 귀가 열린 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다짐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방당한 이들의 작은 소리와 광야로 내몰린 이웃의 소리에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일이라고 일침해 주셨습니다. 상대의 말 못하는 작은 소리까지 알아들으려면 우리의 내면은 얼마나 고요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신음하는 이들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요? 정작 고요함 속에 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초월적인 평온함이 아니라 아픔을 겪고 있는 이웃의 절규인 세상이니, 그 괴로움으로 몸과 마음이 성치 않은 상태를 견뎌내야 하는 깨어있는 이들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도 됩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을 일컬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했을 때 광야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을 것인지 짐작해 봅니다. 그 소리가 세례요한의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굽은 길을 곧게 하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는 음성을 접한 사람이 어떻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명을 받는 자리에 어김없이 들려지는 소리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서의 여러 소명자들을 통해 알게 됩니다. 동포들의 애타는 절규를 결코 그 마음에서 씻어낼 수 없었던 모세에게 결국은 힘겨운 소명이 주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고요한 광야에서 일체의 번잡한 소음을 차단한 채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공생애를 시작했던 예수님의 길이 어땠는가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스러운 공간

 

보내주신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는 편지에서 공간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3초 이내에 대답할 수 있는 절실한 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마침내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 이야기가 제가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십 수 년의 노력을 지속해 오면서 공간 하나를 만들고 있는 저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우리의 사유와 삶의 방식을 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종교시설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거룩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77쪽).

 

유럽여행 중에 만난 성스러운 공간에서 마치 영혼의 고향에 당도한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지요? 그 공간을 쉽게 떠날 수 없어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고, 또한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왔고 부박한 실존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고요? 그리고 그때 하나의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네요. 들어서는 순간 신의 현존 앞에 선 듯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를 돌아보도록 만드는 공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공간을 갖고 싶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영혼의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이 세상에서 휴식처를 갈급히 찾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문명이 주는 편리함 안에서는 좀처럼 쉼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순례자들은 쉼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룩함과 고요함으로 충만하여 그 감동이 사람의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장소를 말입니다. 세상의 소요를 잠재울 만한 힘이 있고, 현재를 태초와 이어주며, 가던 길 멈추고 자신을 정비하고 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저 역시 순례자의 한 사람인 양 갈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을 짓는 목수로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그 목수’라고 불렀다고 제게 말씀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풀어주신 그 호칭의 의미를 제가 하는 일에서 다독이며 살고 있습니다. 안식을 위한 공간과 살림에 필요한 가구들을 만드는 일이 창조의 연속작업으로서 구세주가 되실 분이 업으로 삼기에 잘 어울리는 일이었겠다 싶습니다. 이름 있는 뛰어난 목수로서의 경력에 어울리게 예수님은 우리가 있을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어떤 장소를 마련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는 표현으로 구원을 일러주신 사실을 유념해 봅니다. 목수만이 쓸 수 있는 손 때 묻은 표현과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짓고 있는 많은 구체적인 ‘짓기’의 행위들 - 집짓기, 밥짓기, 옷짓기, 농사짓기, 글짓기, 이름짓기, 사이짓기, 등 - 을 통해 우리가 들어갈 구원의 집이 영원과 잇대어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분야의 장인이 된 사람이 그 정신과 그 눈으로 세상을 건설해 간다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룩된 한 공간이 아득한 옛날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느낌을 회복시키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타락한 채 낙원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한 장소가 그 낙원의 데자뷰(旣視感)가 되어 그 원 기억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오랜 노고와 깊은 정성으로 마련된 장소라면 그 곳에서 순례자는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네 세상은 그런 수고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영혼의 장인이 필요하고, 당연 그 몫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례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게 안식과 치유를 주고 새출발을 격려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는 농촌에서 목수와 농부로 사는 제가 부럽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허투루 던진 인사치레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농사의 중요성과 농사하는 이들에 대한 미안한 심정을 품고 살아간다는 고백 속에서 우리시대의 회한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시교회 설교자로서 서재에 신영훈 선생의 『한국의 살림집』이라는 두 권의 책이 꽂혀 있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것을 한옥 예배당을 지으려는 제게 선뜻 내어준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저희가 농사한 유기재배 쌀이 매주일 교인들의 공동밥상에 올려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가와 인문학자로 살아가면서 관념이 아닌 땅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근원적인 추구를 멈추지 않는 모습, 또한 이웃의 작은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한 가슴이 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글과 말이 세상에 선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성스러운 공간을 완성하기를 계속하자고요. 거룩함을 짓는 목수로 살고 싶습니다. 제 손이 닿는 장소에 고요함과 거룩함이 깃들고, 사랑과 치유의 음성이 들려지는 장소가 되도록 하는 벅찬 일에 정성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농촌에 자연스레 존재해야 할 잃어버린 소리들을 복원하는 일에도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동경하는 소리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절망하거나, 쉴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는 피곤한 일상에 포로가 되지 않고 계속하여 행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주어진 소명을 받들고자 합니다.

 

한 시대의 아픔에 동반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제가 가는 길에서 한줄기 조명이 되어 준다고 생각하니 한결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때때로 저의 시름과 기쁨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때마다 시대의 상실을 좀 더 분명히 기억하도록 일깨워주시고 또한 공동의 희망을 밝혀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평안과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정훈영/단비교회 목사

 

<희망, 그 빛깔있는 삶의 몸부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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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르러 온 불

분류없음 2018.10.17 09:49

불을 지르러 온 불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누가복음 12:49-51)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 참 솔직해서 좋다.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을 그때 얼마나 많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쳐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 당신의 말씀 때문에.

 

“빚이 어둠 가운데 들어오매 어둠이 빛을 싫어하더라.”

 

복음, 그것은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며 심판이다. 하느님도 이 원리를 뒤집어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 고작 하신 말씀이, “나라고 하는 돌멩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람 곧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였다.

 

      류연복 판화

 

예수님은 불이다. 태워버리는 불이다. 불이 불을 지르러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좋다가 아니다. 관용 또는 사랑이란 말로 어둠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대화라는 말로 불의한 자 곁에 들러리 서는 자가 누구냐?

 

“내가 온 것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 함이 아니다.”

 

분명한 오해의 소지를 보면서도, 이 한 마디가 당신을 미워하는 적들에게 얼마나 좋은 꼬투리가 될 것인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말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심정을, 똥물에 빠진 바퀴 눈 같은 썩은 눈으로 역사를 보아, 좋은 게 좋은 것들이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으랴?

 

아아,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최후의 불씨를 던지면서 아픔을 뼈에 새기는 이 말씀이 귀에 거슬리는 자 있거든 보리떡, 물고기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서들 가거라.

 

<기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 속담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 때문에 속상할 적이 참 많습니다.

똥을 왜 피해야 하는지요?

그게 길 복판에 있으면 마땅히

치워버려야 할 터인데 이 백성은

그저 눈길 돌리고 피하는 걸 상책으로 여겼거든요.

주님,

똑바로 보게 하소서.

더불어 싸울 우리의 적을 똑바로 보게 하소서.

 

이현주/동화작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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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시스트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 대작을 그렸다. 그는 천장을 9개의 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34개 면으로 분할하여 작업했다. 이미 ‘피에타’와 ‘다비드 상’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황과의 계약 때문에 마지못해 감당한 일이었다. 1508년에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했으니 무려 4년의 시간이 걸렸다. 위태로운 비계 위에 올라가서 거의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리느라 그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아직 종교개혁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돈과 권세를 탐닉하는 타락한 교권에 대한 저항은 저 기층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완성할 무렵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자리에 예언자 예레미야와 요나를 그려 넣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 두 예언자를 마지막에 그린 것일까? 옛 세계는 기울어진 담처럼 균형을 잃고 있었고, 새로운 세계는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은 시절이었다. 두 세계가 부딪치면서 증오와 배제의 언어가 넘실거렸다. 생각이 다른 사람, 교권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한 적대적 시선이 유럽을 내부적으로 허물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시대를 향해 참회하는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너지는 조국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슬피 울던 예레미야의 마음을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희철 목사는 “그럴 수 있다면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 실컷 울리라/여전히 젖어 있는 그의 두 눈을 보면 왈칵 눈물이 솟으리라”고 고백한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자기 시대의 모순과 어둠을 온몸으로 앓았던 예레미야의 심정에 깊이 동조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지도자라 하는 이들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잇속 차리는 일에 발밭을 뿐이다.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라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평안이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말하며 사람들을 혼곤한 잠으로 인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신 차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그 외침을 부담스럽게 여길 뿐, 삶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앞서 눈 뜬 이들은 울 수밖에 없다.

 

한희철 목사는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듣는 사람이다. 그는 이 땅 구석구석에서 자기만의 빛깔로 주어진 생명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누구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보편성의 보화를 찾아내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담배를 끊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백발노인의 회한이며, “하나님, 해두해두 너무 하십니다”라고 탄식하며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마음을 드러낸 여인, 굴참나무 껍질처럼 깊게 패이고 갈라진 틈을 따라 흙물과 풀물이 밴 손으로 땅을 만지는 정직한 농부들의 삶의 내력이 성경 이야기와 합류하고 있다. 예수는 종교적인 언어를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오롯이 드러내시지 않았던가?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볼 눈이 없다면 성경에서 거룩을 발견하는 일 또한 불가능할 터.

 

이런 시선의 따뜻함과 깊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두런두런 들려주는 예레미야 이야기는 예레미야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을 육신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도 상통하게 마련이다. 자기 시대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에 한희철의 마음이 공명하고, 그 공명이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킨다. 물결처럼 번져가는 공명, 그 깊은 울림에 우리 영혼을 잇댈 때 영혼은 깊어지고 맑아진다.

 

언어에 민감한 그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혹은 번역한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다. 자기 가슴에 깃든 생각과 마음을 뒤적이며 글을 써온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구둣점 하나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알기에 그는 정성스럽게 텍스트와 마주한다. 그리하여 텍스트 혹은 기호 속에 다 담아내지 못한 숨겨진 메시지까지 읽어낸다. 주름 잡힌 텍스트인 성경은 그 주름 속에 깃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풍성한 세계를 열어 보이는 법이다. 친절한 훈장님처럼 한자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여주는 까닭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가리켜 보이기 위함이다.

 

성경에 대한 해석 권한을 독점하려는 이들이 있다. 물론 성경을 바로 읽기 위해서는 원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텍스트가 탄생한 시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도구를 갖추었다고 하여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 속에 깃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한희철 목사의 예레미야 읽기에 동참하려는 이들은 일단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성경 해석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주체가 되기보다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늠해보려는 이들, 자기 삶을 새롭게 정위해보려는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도 좋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들춰보아도 상관없다. 그 어느 부분에서든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레미야의 마음, 그리고 한희철 목사의 마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자기 얼굴로 예레미야의 모습을 그렸다면, 한희철 목사는 예레미야의 얼굴로 자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다시는 주님 말씀 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때마다/뼛속을 따라 심장이 타들어가던” 그 마음, “애써 적은 주님의 말씀/서걱서걱 왕의 칼에 베어질 때” 함께 베이고 말았던 그 마음을 열 번 스무 번 혹은 수 백 번 더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길은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의 동행자가 될 차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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