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으로 포장한 ‘종교 장사’

- 종교는 없고 ‘이름’만 있다 -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신 없는 사회


오강남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는 그가 스웨덴과 덴마크에 1년 간 거주하며 조사한 결과를 담은 책이에요. 그 나라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닫힌 종교가 없어요. 결혼식이나 장례식만 해 주는 문화적인 종교만 있어요. 그런데 행복지수라든가 교육이라든가 범죄율이라든가 남녀평등이라든가 사회 복지 등 모든 면에서 종교가 있는 미국보다 월등해요. 스님 말씀은 어떤 종교가 없어야 된다는 것일까요. 우리를 옥죄고, 사회 통념에 복종케 만드는 식의 종교겠죠. 이런 종교는 없어져야 되고 없어질 것입니다.


김민웅 종교가 빨리 망하는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웃음)


도법 ‘종교는 없고 이름만 있다’는 얘기를 가끔 하는데, 그렇습니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첫째, 정직하지가 않아요. 아까 종교가 회사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그래도 회사는 정직하게 돈 벌기 위해서 한다고 해요. 우리는 돈 벌기 위해서 교회나 절집을 운영한다고 말하지 않죠. 실제로 돈 벌기 위해서 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게 어떻게 종교입니까? “나 돈 벌려고 교회해!” 이게 차라리 정직한 거죠. 우리는 온통 거룩한 것으로 포장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돈벌이 할 때가 많아요. 이렇게 맥락을 짚어보면, 이미 종교가 없다고 보죠. 이 얘기를 어떻게 공론화 시켜내고 현실화 할 것인가는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계속 볼 수 있는 것으로 얘기하자는 겁니다. 신비 얘기도, 영혼 얘기도, 기적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위대한 이야기나 거룩한 이야기도 볼 수 있는 것 가지고 설명해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이 가능합니다.


김민웅 앞에 김기석 목사님이 ‘밭의 한 귀퉁이를 남겨 놓아라’는 얘기가 바로 그거죠. 현실에서는 정치로, 교육으로, 사회로 표현되는 다양한 언어 세계가 있는데 이런 걸 다 잘라버리고 ‘이것만 종교야’라고 해버린 것도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같이 복원을 해야겠죠.


김기석 고트홀트 레싱이 쓴 상당히 흥미로운 《현자 나탄》이라는 책이 있어요.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세계 3대 성서 종교라는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인이 모여서 얘기하는 내용이죠. 중간쯤에 반지 비유가 있어요. 그 반지를 소유하는 사람이 신과 인간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는 신통력이 있는 반지입니다. 아들 셋을 둔 아버지가 아들들이 다 귀해서 ‘너한테 반지를 줄 게’라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정작 떠날 때가 되니까 누구한테 줘야 될지를 몰라서 세공사한테 똑같이 만들라고 해서 나눠줍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들들이 재판관에게 갑니다. 재판관은 흥미롭게도 ‘아버지가 반지를 물려준 뜻은 형제들이 분명 관용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라는 것일 텐데 너희들이 싸우고 있으니 그 반지는 모두 가짜’라고 말합니다. 재판장은 누가 진짜인지를 가리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신과 인간에게 사랑 받는 그가 진짜라는 이야기입니다. 레싱이 이 얘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어느 것이 참인지 가리려하지 말고 진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상황에서는 불교가 되었든 가톨릭이 되었든 또는 뭐가 되었든 어느 것이 참이냐를 말할 때 기독교인은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검증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건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확신의 문제라면서 대화하지 않죠. 이처럼 사는 모습을 보면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전혀 예수와 관계없이 살고 있어요. 예수가 참이라는 사실은 삶을 통하지 않고는 드러낼 방법이 없어요.


김민웅 하나님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면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오강남 실제적인 무신론이에요. 돈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나 그런 게 없는 거죠.


김민웅 정직하지 않은 거예요. 스님 말씀대로.


도법 거룩함으로 일단 다 포장하고 있잖아요.


김기석 사람 심리란 처음에는 그런 것이 있는지 몰라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확신을 갖습니다.


도법 자기 설득도 하고 자기 합리화도 하죠.





심각하게 병든 교회와 절, 성당


김인국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심층이든 표층이든, 해석의 투쟁이든 출가든, 모두 목사님과 스님과 신부님이 깨달은 결론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에겐 어떻게, 라는 방법과 과정이 중요하거든요. 진리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를 두고 전통적인 방식은 수행이나 기도나 실천을 강조합니다. 표층 종교인들이 심층으로 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민웅 제가 말문을 열죠. 개신교로만 한정시켜서 얘기한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현실에 끊임없이 노출시켜야 되는 거죠. 그래서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묻게 만들어야 해요. 이 질문 앞에서 텍스트와 만나게 해야 하겠죠. 지금은 현실과 텍스트를 딱 분리시켜 놓고 현실에 아프게 노출시키지 않은 채 텍스트하고만 만나게 합니다. 제가 <남영동1985>란 영화에 출연을 한 적이 있어요. 김근태 고문사건을 영화로 만든 거예요. 당시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갈라 쇼가 끝나고 나서 무대에 오른 정지영 감독에게 “이 이야기는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왜 봐야 하는지 설명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파하라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 영화 진짜 아파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김근태 전 의원의 부인 인재근 의원이 무대에 올라와서 펑펑 울었어요. 이제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고맙데요. 기술적으로 고문을 해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죠. 너무 역설 아닙니까. 이근안을 연기한 배우 이경영 씨는 계속 울먹울먹 하면서 서 있었어요. 너무 뜨겁게 현실과 영화가 겹친 거죠. 아파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요. 종교인들이 아파해야 할 현실에 아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자기의 아픈 것은 무지 생각하면서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힘든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저는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의 아픈 현실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여리고에서 강도 만난 사람 얼굴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지나갔어요.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보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아 그건 정치이고 경제야. 그것을 왜 교회까지 와서 들어야 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마땅히 해야죠. 흔히들 교인끼리 서로 돈 빌려주면 안 된다고 그래요. 교인들끼리 괜히 돈 빌려주었다가는 의가 상한다고 하는 거죠. 그럼 누구한테 빌려야 해요? 다 안 빌려주는데. 교인들이야말로 형제와 자매의 심정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교우들에게 돈을 빌려줘야 하거든요. 이렇게 틀을 바꿔야 해요. 아픈 현실에 노출시키고, 다음으로는 현실의 상식을 깨서 아픈 것을 끌어안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위로 받고 싶은데 아픈 것을 보라니 딜레마죠. 그러나 그 작업을 포기하면 그 다음부터 가는 길은 뻔해요.


김기석 어떤 사람이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제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 성찰이 잘 되는 진지한 사람이죠. 제 입에서 나온 말은 “당연하지”였어요. 이 사람이 좀 놀라며 왜냐고 물어요. 그래서 “고난의 현장에 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믿음이 자라겠어?”라고 했어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와 직면하지 않고는 믿음이 자랄 방법은 없어요.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마태복음에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오라’ 해놓고는 역설적으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거든요. 힘들어 죽겠는데 멍에를 메라는 거예요. 그게 풀려나는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역설을 받아들이지 못하죠. 내 믿음이 자랐다는 것은 아파하는 마음이 내 속에 생기고 커졌다는 의미에요. 하지만 이렇게 현실에 직면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김민웅 맹자의 인(仁)도 그런 것이죠. 전란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시체가 길에 버려진 채 벌레들이 들끓고 있는데 그것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땀을 흘리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 그런 거 말이죠.


오강남 컴패션(compassion)이란 말이 같이 아파한다는 말이잖아요.


도법 우리는 절에 속하기도 하고 교회에 속하기도 하고 성당에 속하기도 한 종교인들이잖아요. 그럼 현재 종교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아픔이 뭘까. 김근태의 고문 문제인가, 아니면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자살의 문제인가.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교회나 절이나 성당도 심각하게 병든 거잖아요. 여기에 대해 우리가 아파해야 하지 않나요. 아파하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거냐?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하고, 치료가 치료해야 할 텐데, 누가 어떻게 수술하느냐는 겁니다. 내가 수술하려면 절을 떠나야 돼. 나는 이게 정직한 태도라고 봅니다. 김근태 씨의 아픔을 아파하는 것보다도 오늘날 종교인들은 심각하게 병든 자기 종교를 보며 아파해야 합니다.


김민웅 김근태 고문 사건을 다시 상기해보고, 쌍용자동차 등의 문제를 아파하면 종교도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그 아픔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타락하고 병든 거잖아요.


도법 문제는 고문이나 해고 노동자들의 자살을 아파하다가 병든 교회 문제로부터 피해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교회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서기 어려워지는 거죠. 너무 부담스럽기도 하고 골치가 아파서 저쪽으로 가게 되죠. 그러면서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죠.


김민웅 쌍용자동차나 고문 등의 현실을 아파하는 사람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끊임없이 병든 자기 종교에 대해 가시처럼 박혀서 “너 정말 이렇게 병들었는데 모르냐!”고 깨우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교회와 절이 병든 이유도 이런 아픔을 아파하지 않았고, 이런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외면하기 때문이니까요.


오강남 절은 사람들한테 많은 위로를 줘요. 자녀들 합격할 수 있도록 기도로 위로를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런 값싼 위로가 오늘날 필요 없진 않겠지만 그게 궁극적인 필요가 될까요?


도법 그건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죠.


오강남 몇몇 스님들을 만났는데 그런 위로를 주는 종교는 앞으로 없어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합격시키려면 좋은 과외 선생을 찾지 무슨 절을 찾아가서 절을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절에 가서 절하면 조금 효과는 있어요. 엄마가 옆방에서 신경질 부리지 않고 절에 갈 테니까.(일동 웃음) 아무튼 아프면 의사한테 가는 그런 식의 종교는 앞으로 없어질 것이란 얘기였어요. 월운 스님의 말씀이에요. 만났더니 옳은 말씀 다 하시더군요. 세상적인 천박한 위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로써의 불교는 곧 운명이 다 할 것이라는 거예요. 시골 할머니나 농부 할아버지한테 물어봐도 절에 가면 돈 생기는 거 안 믿는다는 거죠. 불교는 그래도 뭐라도 한 개 걸어주고 돈을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걸어주지도 않고 돈을 받아요.(일동웃음)


김기석 내적으로 강화되지 않으면 외부에서 오는 위로 가지고는 강해질 수 없어요. 군목으로 전방에서 근무를 했어요. GOP부대였는데, 북쪽에서 잘 보이게 한다고 언덕 위에 교회를 세웠어요. 문제는 물이 안 나와서 운전병들이 죽어나는 거예요. 밑에서부터 물지게를 지고 50m 언덕을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데 다 올라가면 물을 반쯤 흘리는 거죠. 한 번은 전방에 갔다 왔더니 우물을 파고 있어요. 아무리 봐도 물 나올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헛수고하는 것이니 두고 보라고 했어요. 비가 오니까 물이 고여서 그 물로 며칠 청소를 하더라고요. 사나흘 지나니 물이 말랐죠. 그때 그랬어요. “속에서 솟아나오지 않으면 겉에서 흘러드는 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위로받기를 원하니까 교회들이 자꾸 부흥회하고 뭐도 하고 그래요. 이러다 보니까 성숙이 더 안 되죠. 이런 방식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교회에서는 수험생들을 위한 기도회 같은 건 절대 안 해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내적으로 강화될 수 있을까요. 다른 거 없다고 봐요.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살아온 게 기막혀져요. 그런데 똑같은 현실을 봐도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더군요. ‘나는 저렇게 구질구질 하지 않아서 참 감사하다’는 태도가 하나 있고, ‘내가 이렇게 뿐이 살지 못했구나’ 하면서 펑펑 우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현실에 직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어떻게 현장으로 이끌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김인국 사실 어느 누구에게나 표층에서 심층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가 인간인 한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신성이 되었든 불성이 되었든 그 씨앗만 잘 키우면 부처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고 봅니다. 이 점을 알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싹을 틔우도록 해 주는 게 종교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신성(성령), 혹은 불성을 현실을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과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그치고 말지요. 예전에 성령 기도모임에 가서 용산 남일당 철거민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4대강 그리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제주 강정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기도회 참석자들의 호응이 대단해요. 그걸 보고 시민운동과 결합되는 성령운동이라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종교는 건강해진다고 봅니다.


김민웅 대단하네요! 교회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은혜 없다고 할 텐데.


김인국 강의가 끝나니까 사람들 여럿이 찾아왔어요. 한 분은 자기는 공무원인데 간접적이긴 하지만 4대강을 파괴하는 일에 가담했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이런 즉각적인 반응만 보더라도 사람들은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고 있어요. 표층종교가 자기가 차지하는 이기적인 즐거움을 강조한다면 심층종교는 남에게 주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표층에서 심층으로 나아가는 일을 가로막고 있어요.


김민웅 아, 불온한 세력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김인국 저는 개인적으로는 정의구현사제단 총무(현재는 대표)를 하기 때문에 요만큼이라도 시민다운 얘기를 할 여지가 좀 있어요. 가톨릭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습니까? 사회 정의를 위한 헌신을 문헌적으로 요구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삼성 때 나섰다고 불이익을 당하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 기도회를 한다고 제제가 날라 와요. 사제들과 교우들이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못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하죠. 그런 교회를 보면서 개인적 좌절의 고백과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들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표층에서 심층으로 들어가는 작업은 별로 복잡한 것이 아니에요.


오강남 지도자들은 3단계에서 사람들을 머물게 합니다. 그때가 제일 컨트롤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2단계는 문자적인 단계이고, 3단계는 종교가 주는 하나의 신앙체계로 묶어 두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자면 산타가 아이들에게 “너 선물 받기 싫어?”하는 단계죠. 지도자들이 깨어 있어서 자기들부터 4단계, 5단계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안 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가게 합니다.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형국입니다.


한국 불교, ‘깨달음 병’이 문제


도법 오 교수님께서 ‘이제 문제는 깨달음이다’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의미 있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 불교는 깨달음 때문에 문제예요. 성철 스님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출가수행을 왜 합니까. 깨닫기 위해서죠. 깨닫기 위해서 선방에 들어앉아서 현장 사람들의 표정에 곁눈질하지 않고, 현장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깨달음만을 찾아서 심산유곡에 들어가 일생 동안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거예요. 현재 선방에서 전문 수행자라는 분들이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를 합치면 3000명 가까이 될 거예요. 그분들이 아무 것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만을 찾습니다. 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국 불교는 깨달음병 때문에 문제’라고 말을 합니다.


김민웅 교회는 기도병이 문제고.


도법 되든 안 되든 깨달음을 찾고,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 속에 들어가 가부좌 틀고 앉아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속이 건강하잖아요. 본인들 스스로도 대단한 위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런 스님을 인정합니다. 한국 불교는 깨달음에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권력을 탐하지 않거든요. 많은 주지와 포교사들이 수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 내지 열등의식을 갖고 있죠. 주지하라고 하면 “아 내가 중이 되어서 이거 하면 안 되는데. 가서 참선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현장에 열심히 참여하다가도 “중이 되었으면 깨달아야 하는데, 깨달으려면 산 속에서 가부좌 틀고 참선해야 되는데”하는 거예요. 결국 한국 불교 구성원들, 특히 좀 더 수준 높은 불교를 해보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은 다 이 깨달음병에 걸려 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분이 봉암사 수좌 스님이에요. 나이가 75세이신데 50년 넘게 일관되게 참선만 하셨어요. 그런데 아직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서울 가서 얘기 한번 하시라”고 해도 안 와요. 자기는 아직 해제(解制)가 안 되었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대단히 정직한 거죠.


오강남 깨달음에 대한 집착인 거죠.


도법 봉암사가 조계종단 제1의 선원인데 거기 조실(祖室)은 최고 지도자거든요. 조실을 모셔야 되는데 지금 제가 종정 스님에게 “봉암사 조실 합시다” 그러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겁니다. 그런데 수좌 스님은 조실하시라고 하니까 안 해요! 왜냐? 조실이라는 자리는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 맡아야 될 자리라 절대 조실할 수 없다’고 버티는 거죠. 그렇지만 봉암사에 와서 살면서 어떤 역할이든 해야 한다고 하니까 조실 자리가 아닌 다른 직함을 갖고 와 계세요.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조계종단은 깨달음병 때문에 문제죠.


김민웅 그 얘기는 현실과 긴장을 가지고 대치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끌어안을 것은 끌어안고 칠 것은 쳐야 하는데 안 하는 거죠. 저는 이런 종교 역할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게, 정치논리로 볼 때는 사회복지 문제는 늘 재정문제가 논란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총지출이 줄어든 것이라고 설득을 해요. 복지가 높아지려면 북구 나라들처럼 40퍼센트 정도 세금을 내면 많이 해결되죠. 그러나 종교는 사회복지에 대한 접근이 다른 거잖아요. 계산이 안 맞아도 해야 되는 거잖아요. 바로 이런 것들, 종교가 그런 생각을 이 사회와 나누고 함께 고민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거죠. 그리고는 구제나 자선 정도에 머물 뿐이죠. 사회복지 전체 개념에서 재정을 맞추고, 내가 누리는 혜택이라는 차원에서만 사고를 하지, 종교가 늘 부르짖어 왔던 함께 아파하면서 같이 일구어나가는 개념은 없어요. 종교가 그런 개념을 고민하면서 사회에 던지는 것이 중요한 화두나 담론이 아니겠어요? 그 역시 현실과 마주 설 때 나오죠. 그게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이 갖고 있는 현장성이나 역사성을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서 회복하지 않는다고 다 망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종교의 본질로써는 망하겠으나 기업으로서는 계속 가겠죠.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도법 이제는 종교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와 같은 종교 구원론이 나와야겠네요.


깨달음에 대한 탐욕, 하나님에 대한 탐욕, 신비에 대한 탐욕


김민웅 도법스님께서 불교의 현주소를 말씀하셨는데 개신교와 가톨릭이 가장 중요하게 성찰해야 할 현주소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세요?


김인국 저는 가톨릭의 교계제도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0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에요. 상명하복의 상하구조도 얼마든지 복음적 실천을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공식문헌들이 가르치는 대로 사목자들은 평신도들에게 정의와 공정을 위한 투신의 필요를 각성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봉사하는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교회는 저절로 거룩해지고 세상도 건강해지는 겁니다. 문제는 교회부터 자신이 세운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겁니다. 

  

도법 깨달음에 대한 탐욕, 하나님에 대한 탐욕, 신비에 대한 탐욕을 별도로 찾는 거잖아요. 거기에 일생을 걸고 있는 거예요. 그거 못하는 사람은 죄의식을 느끼고.


김민웅 이제 깨달음이 어떤 깨달음이냐를 따져야 해요.


도법 모든 종교에 그런 요소가 있다고 보는 거죠. 내용은 다르겠지만.


김인국 2007년 10월말 삼성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맞붙었을 때 이를 몹시 불편하게 여긴 주교들도 있었습니다. 


도법 따져봅시다. 왜 불편하게 여겼어요?


김인국 한국사회 최강의 자본집단을 거슬러 싸움을 벌였으니 두려웠겠지요.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테고요. 

 

도법 나는 그게 핵심이 아니라고 봐요. 만약에 삼성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서 문제를 푸는 것이 가장 거룩한 행위라는 신념이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게 없는 거예요. 저 양반들에게 거룩함은 따로 있는 거예요.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삼성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서 푸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행위라는 분명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면 여러 가지 불편함과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전혀 다르게 접근했을 것입니다.


김인국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질서를 바로 잡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드는 것을 교회의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에 서고 보면 슬그머니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게 됩니다. 나약한 인간본성이지요. 한편으로는 없던 욕심도 생기고 말입니다. 개인이고 교회고 돈에 대한 미련만 버리면 얼마든지 떳떳하고 용감해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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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다!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김민웅 종교의 언어문제인데요. 저는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교회 용어가 대단히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 용어에 사람을 가두기 때문이에요. 종교 용어와 일상용어가 관련이 없다보니까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르게 사는 거죠. 예수는 철저히 일상의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씨 뿌리는 얘기, 고기 잡는 얘기 등등은 전혀 종교성을 발견할 수도, 종교적 언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예수의 언어는 일상의 삶을 끌어안은 데 반해서 제도화되고 역사화 된 종교의 용어는 자기의 독특한 지위로 다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 언어도 성벽이 되어서 하나의 기득권이 됩니다. 우리의 삶을 깊고, 높고, 넓게 만들어주려면 새로운 말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요.


오강남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 간의 대화입니다. 한스 큉은 《한스 큉의 이슬람: 역사 현재 미리》에서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 없고,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도 없다는 말을 했어요. 거기 한 마디 더 했더군요. 타종교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거죠. 종교 지도자라면 다른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갖춰야 되는 거예요. 잘못된 종교는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가르칩니다. 한스 큉이 세계 3대 종교 3부작을 썼잖아요. 그는 어떤 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 종교가 평화롭게 살아야 이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이 책을 썼어요.





종교적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꿔야


김민웅 미국에서 목회할 때 돌아가신 박태준 전 총리가 저희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부인은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이분이 개종을 하려니 너무 힘든 거예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심사가 복잡했던 거죠. 제가 그랬어요. “불교의 바다를 버리지 마시라. 그 좋은 것을 왜 버리시냐!” 그랬더니 그분 얼굴이 확 펴지더군요. 자기는 목사가 이렇게 얘기할 줄 상상을 못했다는 거예요.


오강남 요즘은 종교학자들 중에 멀티플 멤버십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크리스천 부디스트일 수도 있고, 부디스트 크리스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제일 잘 알려진 사람이 폴 니터인데 이 사람은 가톨릭 신앙에서 힌두교로 갔다가 불교로 돌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힌두교인이 될 때 가톨릭을 버리지 않았고, 불교인이 되기 위해 가톨릭과 힌두교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트리플 멤버십이 아니라 멀티플 멤버십인 거죠.


김민웅 기독교 신학사도 그래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지고 성경을 읽었잖아요. 무신교적 철학과 결합한 신학들이었지요. 경교는 경교대로 유교라는 틀 속에서 기독교를 읽어 냈어요. 그리스 정교와 기독교는 거의 다른 것처럼 보이잖아요. 다양한 멤버십의 차원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몸과 근육과 영혼과 마음을 길러왔던 언어와 만나게 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오강남 한국에서는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 봐도 그 속에는 불교와 유교가 이미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개종이란 없고, 하나를 덧붙인다는 의미의 가종(加宗)이 있을 뿐이란 거죠. 종교사를 보면 종교는 독립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강처럼 섞인 거예요. 세계지도에서 강과 같은 것이 종교사인데 한국 기독교는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믿어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런 것부터 깨는 것이 종교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들이 없어지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기석 일상의 언어로 예수가 새로운 종교 얘기를 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 교수님 말씀처럼 학자들이 크리스천 부디스트든 크리스천 힌두이스트든 괜찮고, 그런 연구가 한편으로는 계속 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저는 신학자들에게 종교적인 언어를 가장 비종교적인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현장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스님들이 쓴 책은 일반인들이 많이 보는데 왜 목사가 쓴 책은 사람들이 왜 보지 않을까요. 어떤 분이 그랬더군요. 목사들의 글은 설교를 하는데 스님들의 글은 그냥 우리 얘기를 들어주고 포용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맞는지 틀린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꼭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상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자나 신학자는 번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합니다. 종교적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자체가 종교 그 자체일 수는 없지만, 종교적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분명 종교 특권층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더라도 종교개혁 이전에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려던 위클리프나 얀 후스와 같은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성경이 민중의 손에 들려지고 성경 해석권이 민중의 손으로 들어가면 자기들의 특권이 훼손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마커스 보그란 신학자는 예수 운동을 해석학적 투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똑같은 텍스트를 놓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거죠. 해석학적 투쟁이 있어야 되는데 이 시대의 기독교에 국한해서 이야기 하자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같은 텍스트를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해석학적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석학적 투쟁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물들이 일상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줘야 됩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책임인데 그럴 번역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죠.


김민웅 멀티플 멤버십 얘기를 했지만 하나로 통하는 게 뭐냐면, 결국 일상의 언어로 들어가면 그 사람이 살아왔던 삶의 내용과 만나게 됩니다. 삶의 내용과 만나다 보면 정말 많은 요소들이 있잖아요. 산상수훈을 보면 기막힌 거예요. 거기엔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어요. 마음 이야기가 가득 합니다. 그거 하나만 놓고 보면 다른 제도적 종교, 특히 불교와 충돌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헬라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의미를 일상의 언어로 펼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해요. 불교도 그렇게 해나가는 과정이 있으면 굉장히 많은 것이 오고 갈 수 있을 거예요.


도법 사람들이 성과 속으로 얘기하잖아요? 저는 부처님이 한 일이 현실 속에서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종교였던 바라문교는 상놈과 양반의 존재를 인정했어요. 바라문 계급과 천민 계급이 있었고, 이게 당시 종교의 진리였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상놈이나 양반으로 태어나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도둑놈도 되고 선인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성속이란 뭐냐? 부처님은 상놈과 양반이 있다고 가르친 바로 그 사고방식이 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반이 있고 상놈이 있는데 나는 상놈이라 못 났네”라고 생각하니 굴종적인 삶을 살게 되는 거잖아요. 그랬던 사람이 “야, 그런 것 없어. 본래 만인은 평등해. 중요한 것은 조상도 다른 무엇도 아니고 지금 네가 어떻게 행위 하느냐”란 얘기를 듣고 나면 굴종적인 생각들을 벗어던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구원 아닙니까?


오강남 그렇죠. 그게 해방이죠.


도법 이거 말고 거룩함이나 구원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오늘의 종교집단이야 말로 가장 속되죠. 제가 볼 때 일반 사회는 훨씬 거룩해졌습니다. 저는 불교계를 향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권 문제를 한 번 봅시다. 만민평등이나 남녀평등은 사회에서는 이미 상식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계는 철저히 계급화 되어 있습니다. 불평등이 판을 칩니다. 이렇다면 불교가 훨씬 속된 집단이고, 사회가 더 거룩해진 것 아닙니까.


김민웅 확실하고 멋진 정리네요.


도법 그래서 집단 종교가 갖고 있는 속됨을 짚어내고 일상 속의 거룩함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민웅 나사렛 예수도 거룩한 척 하는 당시 종교인들이 속된 자들이라고 질타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씨 뿌리는 것 안에 담겨 있는 거룩함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죠. 교회는 속된데 성(聖)의 언어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까 썩어가는 것을 자각 못하는 겁니다.


도법 자기 언어에 빠져 있는 거죠.


김민웅 그래서 종교계는 썩어가는 것을 인식을 할 수가 없었어요. 교회가 거룩한 종교 언어를 쓰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아멘·할렐루야가 나오면 교인들이 미안하지만 자동적으로 파블로프의 개가 됩니다. 특정한 자극 앞에서 조건 반사하는 거죠. 아멘! 할렐루야!가 언제든 튀어나오는 방식으로 훈련시키니까요. 종교가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끌어나갈 능력을 제거해 버리는 거죠. 일상과 교회라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양심이 괴로움을 받지 않는 겁니다. 


오강남 종교적으로 심층에 속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사회의 기본 가치를 뒤집어엎는 거거든요. 부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공자님도 그랬어요. 공자 당시의 군자란 혈연적인 군자였어요. ‘그러다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군자이지 피와는 관계없다’고 된 것입니다. 조선 말기의 수운 최제우는 ‘우리가 다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하늘님이다. 다른 사람을 하늘님으로 대하라’고 했어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사회보다 앞서 나가던 종교의 얘기였죠. 최제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서 한국에 퍼지게 된 것도 ‘우리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다. 어떻게 상놈의 피와 양반의 피가 있다는 거냐, 라고 했기 때문이거든요. 이렇게 사회를 뒤집어엎는 모험이 계속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뭐에요? 스님 말씀대로 종교가 사회를 따라가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 종교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염려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일상의 거룩함을 상실하고 세속화된 종교


김기석 레위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대명제가 나오고, 그 뒤에 거룩한 삶을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교적인 얘기는 안식일 지키라는 얘기밖에 없습니다. ‘추수할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밭의 한 모퉁이 남겨두는 것’이 거룩함이에요. ‘장사할 때 저울로 속이지 말고, 노인들한테 저주하지 말고, 장애인들 앞에 걸림돌 놓지 않는 게 거룩함’인 거예요. 거룩함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울로 속여 먹지 않거나 내 먹을 것을 밭에 조금 남겨두는 것이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요.


도법 저는 절집에서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복잡하게 설명하면 잘 모르겠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도법이가 도둑질 하면 도둑이 될까 안 될까?” 그러면 도둑놈이 된다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도둑질하면 도둑이 될까 안 될까?” 그러면 조금 망설여요.(일동 웃음) 어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이 도둑질 하면 도둑 될까 안 될까?”라고 물었어요. 결국 도둑질하면 도둑놈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요. 도법이 도둑질 하면 도둑놈 되고, 부처나 예수도 도둑질하면 도둑놈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특별하게 예수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일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도둑질하는 부처가 부처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 부처와 예수는 없는 것일까. 없다고 그러기도 그렇죠. 결론은 예수의 행위를 하는 자는 예수이고, 부처의 행위를 하는 자는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나 예수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종교 언어들을 현장의 삶과 직결시켜야만 종교 언어가 갖고 있는 변질되거나 왜곡된 것을 깨고 본래 기질을 드러낼 수가 있어요.


김인국 이렇게 뜻도 통하고 맘도 맞는 사람들이 얘기하면 시원하죠. 그런데 집에 가면 이게 또…(웃음)


도법 우리 다 집을 나옵시다.(일동 웃음)


김인국 지금 우리가 종교의 핵심과 본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이런 지당한 담화가 여기서 문을 열고 한 걸음만 나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게 문제지요.


도법 한 길 밖에 없어. 출가해야 돼. 다 자기 집을 나오는 거야.(일동 웃음)


오강남 집을 나온다는 것은 통념에서 벗어난다는 거예요.


김기석 아브라함도 집을 떠났지요.


오강남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기는 통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님 말씀에 동감인데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저울눈을 속이지 않는 등의 행위 자체에 너무 무게를 두면 문제가 됩니다. 율법주의가 되거든요. 행위를 위한 행위가 아니고 어떤 사물의 실제를 본 의식의 전환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간디의 말에 의하면 그게 샤타그라하(眞理把持)에요. 실제를 봤다는 것은 심층에 들어갔다는 얘기죠. 심층에 들어가면 레위기 19장과 같은 행동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종교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바리새적 율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어요.


김민웅 김 신부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물론 우리끼리는 다 통하는데, 라는 차원도 있지만 덧붙여서 고민해야 될 것도 있는 거 같아요. 김기석 목사님께서 해석학적 투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펼쳐내기 위한 말을 고민하고, 그런 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치열하게 해야 될 것 같다는 거예요. 김교신 선생은 성서 해석에서 굉장히 재밌는 우리말 표현을 한단 말이죠. 재회의 환희를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나? 재회의 기쁨이나 다시 만난 기쁨보다는 “아이고 또 보니 너무 반가워라”라고 표현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서 다산 연구의 최고봉이라는 이을호 선생이란 분이 계십니다. 작고하신 분인데 이분의 논어해제가 굉장히 뛰어나요. 우리는 공자의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번역하지만 이을호 선생은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라고 읽어요. 순 우리말로 표현한 거죠. 시(時)도 족족이란 말로, 학(學)도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 되는 길’에 대한 배움이라 표현합니다.


오강남 그런 해석학적인 면은 류영모 선생님을 따라 갈 사람이 없어요.


김민웅 이렇게 우리의 말 속에 담겨진 무궁무진한 것들을 캐내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집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쉬운 언어와 화법을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몰라요. 이것은 사실 지식 계급이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그래서 교회 용어를 철저하게 깨고, 낮아져서 일상의 언어를 가지고 예수가 이야기를 쉽게 풀었듯 우리도 그런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다


도법 오강남 교수님이 심층, 표층이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심층으로 들어가자면 다들 어렵다고 도망갈 것 같아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면 좋겠어요.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야’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없는 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저는 이게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면 사기 칠 가능성이 대단히 많아집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별 볼일 없고 제3의 눈으로 봐야 진짜라는 생각! 제가 볼 때 종교의 사기성은 거기서 나온다고 봐요. 불교도 만날 전생과 내생 이야기만 해요.


김인국 절집에서는 통 현세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하시는구나.(웃음)


도법 저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거룩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도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는 허망하다. 신령성이란 뭔가의 안에 있다.’ 우리가 그 신령성을 찾아야 된다는 거죠. 대부분의 종교 언어들은 늘 이런 식이거든요. 이것을 깨지 않고서는 종교가 스스로 속든 다른 사람을 속이든 간에 이런 일이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거룩한 것을 설명해야 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참됨을 설명하는 작업들이 나와야 된다는 봅니다.


오강남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세상에서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현실에서 안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본다는 것은 신령이나 귀신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심에 쌓여서 못 보던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거겠죠.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현실이나 경제현실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은 ‘돈 버는 것이 최고’라는 거예요. 그런 세상에서 자본주의가 아니라 평등사회가 이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심층이겠죠. 제가 말한 심층이란 귀신, 내세를 얘기한 것이 아니에요. 귀신이니 내세니 하는 것은 보여주면서 속이는 거죠. 사실 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거예요. 엉터리로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 하신 일은 상식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성(聖)이라는 글자에는 ‘귀’가 들어 있잖아요. 귀가 들어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끌고 가야 해요. 도법 스님도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거잖아요. 사회보다 지금 불교가 나쁘다는 것을 보통 불교인들은 못 보는 거예요. 때문에 도법 스님은 사람들에게 안 보이는 것을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시는 거죠.


도법 오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해요. 일반적으로 불교는 ‘눈으로 보는 것은 진짜가 아니야. 마음으로 봐야 해’ 그러거든요. 제3의 눈은 주로 전생이나 내세를 보는 것으로 이해를 해요. 교수님 말씀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세가 그렇다는 겁니다. 보통 눈으론 전생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마음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런데 ‘육안으로 보는 것은 전부도, 진짜도 아니고 오로지 마음으로 보는 것만 제대로 보는 거야.’ 이렇게 되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깰 수 있으려면 ‘상식의 눈으로 봤을 때 돈이 제일이야’라는 생각을 ‘상식의 눈으로 봐도 돈이 제일이 아니야’라고 얘기해줘야 됩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뭔가를 봐야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상식의 눈으로 봐도 돈이 제일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종교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이 작업을 해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어요. 종교가 종교다워지려면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오강남 저도 스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상식이 아닌 상식을 상식으로 깼다면 보통 상식보다 좀 깊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펄쩍펄쩍 뛰며 기도하는 게 심층이 아니라 조금씩 깨우쳐 가고, 조금씩 리얼리티에 가깝게 가는 게 심층입니다. 전생이 어떻고 귀신이 어떻고 하면서 협박하여 돈을 뜯어낸다면 이것은 사기죠.


도법 유명한 성철 스님이 한 이야기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게 있잖아요. 사실은 성철 스님이 특별하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어록에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에요. 불교 사유방식인 거죠. 정확하게 말하면 네 단계예요. 처음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야. 다시 보니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야. 또 다시 보니까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야. 다시 보니까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야.

김민웅 그런데 그때 산은 굉장히 다른 산이죠.


도법 문제는 다른 얘기는 않고 이것만 갖고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들은 눈으로 보는 문제를 자꾸 다루면 이것을 속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뭔가 육안 말고 다른 것으로 볼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해요. 그런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논리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유교의 도라는 개념도 있는 것 가지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이상한 얘기를 갖고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세상을 기만하는 것에서 빠져 나올 수 있어요.


김민웅 예수에게 그런 것이 분명 있었죠. 오병이어라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도 배고픈 자의 현실이 눈앞에 있어서 출발한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직면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문제를 풀라는 거죠.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얘기로 풀어나갑니다. 김기석 목사님이 공감에 대한 얘기를 하셨어요. 일상에 대한 이야기, 본질에 대한 이야기,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저는 기존의 종교라고 이름 붙여진 기독교나 불교가 정말 탁월하고 속 깊은 무당보다 못한 것 같아요. 발군의 무당은 아픈 사람의 마음과 완전히 만나더군요. 저는 사람의 마음을 부둥켜안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던 마음을 종교가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까 해석학적 투쟁 이야기를 하셨지만 최제우도 그렇잖아요.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아파한 것 아니에요? 하늘의 마음을 품고 백성의 마음을 껴안다 보니까 그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예민함이 울림을 만들어내고, 억울하게 죽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불러내고, 그리고는 살아있는 자와 만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만드는 능력이 종교의 본성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많이 상실해버린 것 같아요. 그것을 잃어버리다 보니까 성당이든 절이든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울림을 갖지 못하는 거예요. 교리나 신학이나 사상보다 더 깊게 모든 종교가 현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잃어버려서 사람들이 점을 보러 가고 굿을 합니다. 사실은 교회가 현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부둥켜안고 그것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안 하죠. 거의 철저하게 안 한다고 봐요. 교회가 아파하고 힘든 사람들을 끊임없이 짓밟는 현실과 대결하는 용기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게 속상한 거죠.


김인국 오늘의 교회가 어릴 적 나를 키워준 그 때의 고마운 교회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이런 교회를 위해서 청년시절에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하고 노래를 불렀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단 말입니다.


김민웅 스님 말씀대로 출가를 하시지요.


김인국 출가한 사람들은 별 수 있나요.


도법 다시 출가하자는 거죠.(일동 웃음)


김인국 사회는 엉망이고 강과 바다는 망신창이가 됐는데 종교는 아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가 회사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종교라면 망하는 게 낫습니다. 얼른 망해야 얼른 새로 나지요!


오강남 종교가 망해야 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도법 종교는 없다고 선언합시다.


김민웅 이 책 제목은 그러니까 망할 놈의 종교네.(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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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너나 잘 하세요!”(1)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김민웅 오늘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종교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진단을 하고, 어디가 돌파 지점인가를 고민하는 그런 자립니다. 각자가 종교를 대표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 이야기든 타종교 이야기든 다양하게 풀어보면 좋겠습니다.


김인국 한국의 종교 현실에 대해서는 ‘친절한 금자 씨’가 이미 결론을 내렸어요. “너나 잘 하세요!”라고. 누가 누구를 대속하고 구원한다는 말이냐 그런 것이지요.(웃음) 


도법 얼마 전 제주도에서 정부가 유치한 세계자연보존총회를 했어요. 거기서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잘한 것으로 얘기했나 봐요. 시민사회가 이게 뭔 소리냐며 반발했죠. 시민단체에서 제게 와서 세계 종교계가 자연보존에 대해서 어떻게 보는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강정 문제를 갖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는대서 내가 갔어요. 한국 사람은 거의 없고 외국 사람뿐이더군요. 내국인들은 통제를 했나 봐요. 외국인 중에서도 4대강 문제나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입국 거부를 당했다더군요. 저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생명이나 문화나 자연을 가장 치명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전쟁이다. 전쟁보다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없다. 그런데 세계자연보존총회에서 전쟁의 조건을 확대하는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떤 이유로든지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종교의 길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이를 어떻게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질문도 던졌어요. ‘역사적으로 무수한 전쟁이 종교 때문에 벌어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역사적으로 종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나. 오늘의 한국 사회에 종교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유로든 자기 집단의 이기적 관점에서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건 이익집단이지 종교집단이 아니다. 이 문제를 성찰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오늘은 점잖으신 분들이 이야기를 주제하니까 다음 이야기는 알아서 하세요.


김민웅 저들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죠. 오늘날 한국에서 여러 가지 유형의 종교들이 말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오히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오늘의 종교들이 말해야 될 것을 말하지 않거나, 말하면 안 될 것을 말하고 있다면 자기 책무를 다하고 있지 않은 거죠.


‘표층 종교’인가 ‘심층 종교’인가?


오강남 종교를 하나의 유일체로 보지 않고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표층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심층 종교입니다. 표층 종교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 하고, 심층 종교는 욕망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진정한 나와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문제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절대 다수의 사람이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로 심화되면 그런 문제들이 없어지고 종교가 본연의 일을 수행하게 되겠죠. 그게 아니기 때문에 만날 싸우는 거예요. 전쟁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전부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 때문에 생깁니다. 저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라고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표층 이슬람과 표층 기독교의 충돌이거든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은 더욱 아닙니다. 종교가 심층으로 심화되지 못하고 발달장애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죠.


김민웅 오 교수님께서 종교의 두 가지 양상을 구분했습니다만 도법 스님의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 ‘표층 종교가 정말 종교야?’라는 질문이 됩니다. 표층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불러줘야 진상이 폭로되는 것은 아닌가요. 


오강남 성숙한 종교와 미성숙한 종교로 표현할 수는 있겠죠. 미성숙한 종교도 종교니까. 그런데 미성숙한 종교가 성숙한 종교로 가면 세계평화나 인류의 행복을 높여 주는데, 미성숙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까 문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김인국 종교적 발달장애가 치유 가능한 장애입니까?(웃음)


오강남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믿음은, 어렵긴 하지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 발달장애도 치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거죠.


도법 학문적으로 잘 몰라서 종교라는 말을 제 방식대로 풀어보면, 기독교는 어쨌든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잖아요. 불교는 법과 다르마(Dharma)가 시작과 끝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표층이냐 심층이냐’, ‘성숙이냐 미성숙이냐’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될 내용이 아닙니까.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가르치거나 그런 길로 가자고 하는 것이 종교의 본래 모습이라면, 그것과 맞지 않는 건 종교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오강남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거죠. 이기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그럽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편이고, 내 원수를 갚아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미성숙한 거죠. 부처님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 믿으면 출세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어서 제 원수를 갚겠다고 하더군요. 이런 경우도 표층이고 미성숙이죠. 그러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단계적으로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에만 달라붙어 있다면 문제가 되겠죠.


김민웅 그건 단계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본질을 역전시킨 것이 아닌가요? 역사적이고 제도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기독교와 예수 운동은 다른 거죠. 종교의 가르침이나 실천이 현실과 긴장감을 일으키면서 현실을 해체하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동력을 가져야 되는데, 어떻게 요즘 종교는 거꾸로 현실의 욕망과 권력을 가지고 종교를 동원하는 방식이에요. 이런 얘기가 좀 진전되면 좋겠습니다. 개신교에 국한한 이야기를 하자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현실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 현실의 욕망을 위해서 성경 텍스트를 끌어다가 쓰는 방식으로 늘 관계를 만드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대형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대형교회 목회자로 제한 해 보면, 설교에서 동원하는 성경 텍스트의 본질을 해석해 들어가면 그걸로 스스로 비판받을 일이 너무나 많은데 적당히 꿰맞춰 탐욕을 조장하거나 옹호하는 설교를 해요. 성경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동원하는 시스템을 깨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일이 아닐까 싶어요.


오강남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도법 말씀을 많이 하셔야 하는 자리 같습니다.(웃음)





‘종교는 죽었다?’


오강남 텍스트를 어떻게 읽느냐는 것도 표층적으로 읽느냐 심층적으로 읽느냐가 문제가 되겠죠. 표층적으로 읽는 것은 나를 위해서 읽는 거예요. 내게 좋도록, 내 권력이나 금력을 위해서.


김민웅 자기를 위한 것이 좋긴 한데 자기의 무엇을 위한 것이냐가 규정되어야 하겠죠.


오강남 자기의 목숨을 위해서 종교가 돌아가는 거예요. 이쪽은 스님이 말씀하신 도라든가 법이라든가 원리 등이 중심입니다.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표층적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심층 종교는 타자 중심적으로, 실재적으로 또는 절대자적으로 봅니다. 김민웅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에서는 90퍼센트 이상이 자기를 위해서 성경을 읽고, 자기를 위해서 다른 텍스트들을 봅니다.


도법 그렇게도 해요?(일동 웃음)


오강남 그래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 발달에 따라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기가 되었거나 혹은 지났다고 보는 거죠.


김민웅 시기의 문제도 있겠지만 긴 역사로 보자면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심층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한 거잖아요. 이미 그때부터 심층적 본질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은폐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과의 긴장된 싸움이 지속되고 있는데, 본질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운동은 늘 소수파의 운동이었고, 대다수 종교들은 사실 “현세에서 많은 것을 챙겨 줄게”라는 약속으로 넘어가버리죠. 이 기만 행위를 어떻게 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도법 ‘예수는 없다’고 했듯 ‘종교는 없다’는 겁니까.(일동 웃음) 아니면 ‘신은 죽었다’고 했듯 ‘종교가 죽었다’는 겁니까.


오강남 객관적으로 보면 심층 종교가 옛날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이었는데 그 중에 진짜 예수님의 기본 정신을 알아 챈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며 싸웠거든요. 이건 완전히 표층 종교죠. 예수님의 가르침이 퍼져가던 당시 대부분은 문맹이었어요. 문맹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듣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퍼져나가는 속도도 늦었어요. 도마복음에 의하면 1천 명에 한 명, 1만 명에 두 명 정도가 심층에 들어갈 수 있어요. 요즘에는 문맹이 거의 없어져서 심층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이 전보다 훨씬 확대된 거죠.


김인국 표층에서 심층에로 진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도마복음이 이미 내다보았군요.


오강남 요즘은 스님이 쓰는 글이 인터넷에 다 나오고, 하버드에서 어떤 교수가 한 이야기도 다 나옵니다.


김민웅 도마복음에서 1만 명에 두 명이라면 그 다음에는 십만 명에 20명이냐? 이건 아니죠. 1만 명에 두 명이지만 십만 명에는 세 명일 수도 있거든요.


오강남 저는 그보다 낙관적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났는데 지금은 지도자들이 물꼬를 잘 틀어주고, 스님 같은 분이 일깨워주면 심층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볶듯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죠.


김민웅 한 마디 짚고 넘어갔으면 싶은데요,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문제가 되는 쪽의 세력도 역시 활용할 수 있는 무기와 장치와 조건이 좋아졌기 엄청 막강해졌어요. 우리의 이 일종의 선한 싸움이 오강남 선생님 말씀하시는 대로 그런 식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요? 보다 치열한 대결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한마디 추가합니다.


김인국 학교는 본성상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기관이라서 한 인간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국가가 학교를 열고 의무교육을 시행하면서 국가 권위에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대들라고 가르치지 않잖아요. 성직자 양성 과정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은 심어주지 않죠.


김민웅 선생이 누구냐에 따라서.(웃음)


김인국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머리만 좋지 문제의식이 통 없는 사람들이 대개 강단을 지배합니다. 그렇게 급진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성경 자체도 일찌감치 지배자들의 연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저항의식을 불온하게 여기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서 제대로 된 말을 하는 사목자도 드물 수밖에 없고요. 그리고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고요. 이런 시스템에선 심층 종교로 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오강남 밑에서부터 일어나야죠.


김인국 이런 것은 책에 실을 수 없는 얘기인데!


도법 그런 게 어디가 있어!(일동 웃음)


김인국 천주교 신부들 8할은 <한겨레>나 <경향>을 볼 겁니다. ‘조·중·동’ 보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은 다 ‘조·중·동’ 봐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도법 난 힘없어도 ‘조·중·동’ 보는데!(일동 웃음)


김기석 김 신부님이 발톱을 숨기시고 주교가 되십시오.


오강남 트로이 목마가 되셔야 되겠네요. 처음부터 나는 트로이 목마다 그러면…


김인국 신학교 다닐 때 공부가 그렇게 재미가 없었어요. 왜 그랬는지 나중에 알겠더라고요. 어느 시대나 어느 종교나 교리는 가르치지만 진리는 안 가르쳐요. 그래서 다른 공부만 주로 했죠. 


도법 신부님들이 <한겨레>나 <경향신문>만 본다고 했죠? 우리는 그 동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김인국 가톨릭의 경우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태아를 어엿한 인간으로 봅니다. 인간이 될 자는 이미 인간이라고 말하거든요. 이만한 인권의식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사형수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혁신적이죠. 사형제를 반대하잖아요. 그런데 인권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존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 조만간 죽기로 예정된 자에 국한시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해요.


종교의 파시즘


김민웅 김기석 목사님은 현장 목회를 하시잖아요. 저도 현장 목회를 한 20년 했는데요. 현실과 대치하며 현실을 세뇌하는 모든 장치들을 끊임없이 해체해 나가야 하는데, 교인들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해서 평안하고 싶어 합니다. 좀 달콤한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지도자 문제도 있지만 교인들에게도 그런 욕망이 있죠. 그래서 종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김기석 제가 종종 이런 지적을 받습니다. “세상이 너무 살기 힘든 데 교회 와서도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일전에 어떤 모임에 가서 요즘 힐링이 대세인데 나는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김민웅 여기서도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힐링 이야기를 했어요.


김기석 그렇군요. 누구나 다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전부 내 삶 안으로 통합해서 살았지요. 요즘은 누구나 힐링을 얘기하다보니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힐링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힐링 장면을 보고 있게 되니까 끝나면 더 외로워합니다. “내 얘긴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뭐 이렇게 되는 거죠. 이런 것이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낳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얘기를 하는 자리에 SBS 사장이 있었어요. 저는 <힐링 캠프>를 SBS가 만드는지도 몰랐거든요.


김민웅 그 분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웃음)


김기석 그 분이 힐링 말고 다른 좋은 말이 없겠냐고 묻더군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고, 전통적으로 종교에서는 공감이란 말을 쓰는데 나는 그게 좋다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어요. 자본주의가 학습시킨 이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잊어 버렸죠. 그러다보니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불행합니다. 좀 전에 대학교수 한 분을 만나고 왔는데 자기 클래스에 들어오는 학생들 가운데 자신을 배타주의자로 밝힌 친구가 40명이라고 하더군요.


김민웅 배타주의자가 어떤 의미로 쓴 말이죠?


김기석 예수 이외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죠.


오강남 어느 신학교인가요?


김기석 신학교가 아닙니다. 일반 대학의 기독교학과입니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포용주의적 입장을, 다른 한 명은 다원주의적 입장이었다고 해요. 4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니까 다른 삶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 같더군요. 요즘 대학생의 15퍼센트가 우울증이라네요. 휴학하고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삶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유하는 주체가 되어서 자기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들에겐 심층적 종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날 확 붙잡아주었으면 좋겠는 거예요. 얘들에겐 모호하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인생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 그러니 이런 모호함을 받아들여야해’라고 하면 못 견뎌요. 걔들에겐 “넌 사유 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할게. 너는 순종이나 해!”라고 이야기해 주는 지도자가 매력 있는 거예요.


김민웅 파시즘의 토대죠.


김기석 파시즘이죠. 요즘 한국 기독교는 철저히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사실 예수 당시에도 희망이 없었죠. 비유하자면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은 백향목의 나라였습니다. 모든 나무 가운데 가장 우뚝한 나무들만이 훌륭한 나무로 인정받았죠. 예수는 전혀 새로운 상상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자 풀이 밭에 떨어지면 땅을 황폐하게 하기 때문에 별로 인기가 없었는데 예수는 그런 겨자 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얘기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죠.


김민웅 그것도 자기 밭에.


예수가 보여준 상상력


김기석 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끈덕지게 살아야 했던 민중들에게는 ‘이 고통 속에서 살아남자. 그리고 이 속에 새들이 날아오게도 하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새로운 나라를 상상하게 만들었어요. 그 꿈에 공감되었던 사람들이 아주 소수였지만 말입니다. 김민웅 목사님이 제게 던져 준 질문이 딜레마입니다. 교회에서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게 별로 없어요. 교회 안에는 표층적 종교에 침윤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아를 넘어서는 삶의 상상이 잘 안 됩니다. 표층 종교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겨자 풀 천국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한테는 상상력을 회복시켜주는 일들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상상력이란 전혀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잖아요. 이 능력이 다 깨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시대의 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이 상상력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삶은 이렇게 구성되는 거야”라고 할 때 “나는 이렇게 살래”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것이 희망의 징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웅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아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얘기는 대안적 삶이 손에 잡힌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종교가 불리한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은 교육, 언론, 방송에서 자기도 모르게 다양한 방식으로 자아상을 그리는 연습과 훈련을 매일 강요당하고 있어요. 종교가 그만큼 감당해야 할 폭이 더 넓어진 거죠. 그런데 종교마저도 거기로 빨려 들어가니까 더 어려워진 거죠. 요즘 젊은 세대들이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좀 어처구니없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과거에 비하면 결코 혹독한 세월이 아니거든요. 아이들을 너무 유아적으로 취급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도 옛날에 고생해 봤는데 너는 지금 이것 가지고 그러느냐”는 파시스트들 흉내를 내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 목사님께 말씀하신 상상력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직면한 현실을 바른 가치를 가지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돌파력을 건강하게 길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하면서 사회 전체가 마마보이와 마마 걸 모드로 돌아가는 이것도 큰 문제라는 겁니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대안적 가치를 선택할 용기가 안 나는 거죠.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도 낙오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애들에게 그것은 낙오라는 차원이 아니라 네가 세운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그 가치가 자기 삶이 될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필요해요. 쉽진 않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 “용기를 같이 내보자. 동지들도 있어.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고 얘기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젊은 세대를 자기의 새로운 꿈과 비전에 따라 돌파하는 주체세력으로 길러내지 못하는 것도 큰 책임이란 생각이 들어요.


오강남 엄마가 문제인 것 같아요.


김민웅 아버지는 문제가 없구요?(웃음)


오강남 아버지는 존재 자체가 이미 없잖아요. 엄마가 학교 선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학생 자녀의 등록과 수강 신청에 페이퍼까지 써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애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가 고민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애들이 마마보이가 되다 보니까 조금만 뭔 일이 있어도 흔들리고, 자기 생각보다는 절대적인 힘에 끌려가는 것이 훨씬 쉬운 거예요.


김인국 목사님들께 여쭙습니다. 그리고 스님도 들으시고 한 번 대답해 보시지요.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가 보여준 상상력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살려내느냐에 따라 교회의 장래가 달라진다고 하셨는데요. 예수의 상상력을 키우고 나누는 목회를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잘 되던가요?


김기석 된다고 얘기하면 교만이구요. 공동체 전체가 그렇게 하는 건 힘든 일이죠. 저희 교회에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던 친구들이 그만두고 평화운동단체나 시민운동단체로 옮겨서 헌금도 안 합니다. 교회에서 오히려 보태줘야 합니다.(웃음) 이런 친구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선 고마운 일이죠.


도법 성공했네요.


김기석 좋은 직장 다니던 아이들이 1년 동안 전쟁 난 나라에 가서 봉사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변산반도에 있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친구들도 많아요.


김민웅 아이들을 조용히 망치고 계시는군요.(웃음)


오강남 21세기의 종교는 심층적이지 않으면 의의가 없어요. 젊은이들이 독선적이고 파시즘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심층 종교가 주는 시원함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제가 원숭이 잡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요. 구멍에 손을 집어넣은 원숭이가 손을 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를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꼼짝을 못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손을 펴라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펴기만 하면 시원함이 있는데 말이죠.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까지 별의 별 것 다 해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당신 속에서 쉼을 얻기까지는 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가 그 시원함을 맛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그건 제도적으로는 안 됩니다. 조그만 운동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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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나무처럼 느렸으면 좋겠어

 

 

공포정치가, 무자비한 폭력이, 교묘한 억압과 악마적 술수가 난무하는 시대다. 그렇다고 모두가 거리에 나가 손을 들고 몸을 쓰며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은이는 숨죽이게 하는 세상에 내 숨을 떳떳하고 고요하게 쉬는 것이 아름다운 저항임을 제 숨을 포기하지 않을 삶을 선택할 수는 있음을 보여준다. 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면 숨 쉴 자격을 잃는 것이다. 노랫말 곳곳에 자연과 더불어 쉬지 못하는 인간의 숨은 창조의 동산을 떠난 폭력의 숨이며 인간다운 숨을 쉬는 것은, 하늘의 숨을 민감하게 느끼고 무딘 양심을 세밀하게 하며 지구의 수준을 아프게 지켜보며 예언자다운 자세를 가지는 것임을 역설한다.

 

 

 

 

 

김기석 목사(청파교회)는 그의 글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작고 사소한 것들에 다정한 눈길을 보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자연과의 접촉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깊은 외경심을 품고 있는 홍순관의 노랫말에 담긴 영적 지향은 자유이다. 그의 낮고 슬픈 목소리가 우리 영혼을 고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단순하고 소박한 언어 속에 담긴 깊은 뜻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비종교적인 언어를 통해 가장 깊은 비의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그의 시선은 예수를 닮았다.”

 

<대지의 눈물>을 듣고 또 들으면서 빼앗긴 소녀들의 한 서린 날숨이, 그 숨을 아프게 들이마시고 다시 위로의 날숨으로 토해낸 노래꾼의 노래가, 내 안으로 낯설게들어와 내 마음을, 내 영혼을 깊이 그리고 아프게 헤집는다.”고 토로하는 백소영 교수(이화여대)보물을 발견한 기쁨으로 논두렁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생기 있게 나물을 캤을 그녀들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고 읊조린다.

 

쌀 한 톨에서 우주의 무게를 보는 사람의 슬픔을 간파한 김영봉 목사(와싱톤한인교회)는 홍순관의 슬픔의 정체를 이렇게 묘사한다. ”작은 생명의 고통을 보면서 온 우주의 신음을 보는 슬픔이며, 어린 소녀의 눈물에서 인류의 고난을 보는 슬픔이다. 한 사람의 불의에서 온 세상의 죄악을 보는 슬픔이며, 아침 뉴스에서 인류 역사를 보는 슬픔이다.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흥겨운 춤에 눈 감고 죽음의 광란에 도취해 있는 인류를 보는 슬픔이다. 그 슬픔이 오늘도 그를 흔들어 깨워 기타를 치고 노래하게 한다. 슬픔만이 슬픔을 치유할 수 있으므로!“

 

사람을 향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다는 연민의 정에 있음을 강조하는 저자는 일상의 노래를 부르려고 많은 것을 버렸다. 대중보다는 소외된 사람들, 생색보다는 뜻이었다. 하여 이 책은 성서와 예수를 노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시대에 불러야 하는 노래는 어떤 것인지 오롯이 담고 있다.

 

 

 

 

이 책의 구성

 

저자의 노랫말에 붙인 내면의 글 22꼭지

양화진선임연구원 지강유철과의 속 깊은 인터뷰

저자의 글에 대한 김기석, 김영봉 목사와 백소영 교수의 착하고 슬프면서 따뜻한 글

 

 

지은이 홍순관은

 

10살에 서예를 배웠고 대학에선 조소를 전공했다. 11살에 화실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기타를 쳤으며 중학교 때 부산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고아원 양로원을 찾아가며 공연을 했다. 대학 때는 부산 대구지역 각 대학축제에 불려 다니며 노래를 했다. 그동안 무용무대미술, 뮤지컬배우, 라디오와 TV방송진행, 공연연출, 기획, 가스펠, 동요, 국악노래, 민중가요, 시노래 등 매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활동했다. 대추리, 용산참사현장, 강정마을, 팽목항, 광화문광장, 필리핀빈민촌, 베트남학살현장, 오키나와미군기지 등 아픈 현장에서부터 초···일반대학과 신학대학 그리고 관공서, , 시민단체에서 강의와 공연을 했다. 일본군성노예, 결식학생, 노인, 노숙자, 장애인, 노동자 등 국내문제와 기후온난화, 전쟁 등 국제문제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이 맞닥뜨린 예민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며 기획 및 초청 공연을 했다. 또한 광장으로 불리는 길거리공연에서부터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KBS, 아르코예술극장, 뉴욕링컨센터에 이르는 무대에서 현장성과 예술성을 버리지 않았다. 세 권의 책과 10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이사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평화센터를 지으려는 꿈을 가지고 새 음반 <시간은 나무처럼 느렸으면 좋겠어>를 녹음 중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 독자에게 띄우는 편지 셋 | 홍순관 4

 

새의 날개

 

새의 날개 12

천국의 춤 17

나무 21

은혜의 강가로 28

십자가 32

 

신의 정원

 

 

어떤 바람 38

산 밑으로 44

여행 51

민들레 날고 56

성모 형 65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나처럼 사는 건 70

저 아이 좀 봐 75

벽 없이 80

바람의 말 82

나는 내 숨을 쉰다 85

깊은 인생 90

푸른 춤 95

대지의 눈물 98

 

춤추는 평화

 

소리 104

낯선 땅 여기는 내 고향 107

쌀 한 톨의 무게 111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115

 

시간은 나무처럼 느렸으면 좋겠어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진 않는다 122

큰 나무만으론 산을 이룰 수 없네 126

평화는 아침에 피어난 꽃처럼 오리니 129

지강유철의 선택과 옹호 | 부박(浮薄)한 시대에 부는 바람처럼 133

낯선 땅을 고향으로 바꾸기 | 김기석 229

슬픔으로 슬픔을 치유하다 | 김영봉 248

노래로 나타나신 하나님 | 백소영 259

 

 

 

밑줄긋기

 

, ‘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은 곧, 목숨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깨끗한 숨을 쉴수 있는 맑은 공기가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고백은 계절의 풍요에서 그치는 감상이 아니요, 공멸로 떨어지는 지구를 향한 절실한 연민이요, 통회다.

 

                                                                                              <나는 내 숨을 쉰다> 중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춤을 출까. 이웃과 하나가 된 교회는 얼마나 든든한 춤을 출까. 말씀과 하나 된 신자는 얼마나 거룩한 춤을 출까. 하나님과 하나 된 인간은 얼마나 어른스러운 춤을 출까. 자유의 춤이요, 천국의 춤이다.

 

<천국의 춤> 중에서

 

나무가 노래고, 냇물이 노래다. 큰 산이 노래며 바다가 노래다. 만물이 노래요, 이 세상 사람들이 노래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노래다. 흔들리는 나뭇잎보다 더한 춤이 어디 있을 것이요, 바람소리보다 더한 노래가 어디 있겠는가.

 

<나무> 중에서

 

은혜 속에 산다는 것은 그 분이 필요할 때 수도꼭지처럼 틀었다 잠그는 편리함에 있지 않다. 매일을 그 분의 강물에 들어가 사는 삶이다.

 

<은혜의 강가로> 중에서

 

이 부박한 시대를 건너가는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될까? 역사와 시대의 쭉정이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안다. 오래 걸리지만 확연히 드러난다. 연민과 진심으로 흐르는 눈물의 코드나 리듬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다르지 않다. 이 눈물이 이 시대를 지나갔으면 좋겠다. 일 할 밖에, 농부처럼 입 다물고 허리 굽혀 일 할 밖에. ,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됐을까?

 

<어떤 바람> 중에서

 

<산 밑으로>는 정을 떼는 슬픔이 아니요, 있던 곳(익숙한 곳)을 떠나 저 아래 땅(낯선 곳)에 사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 학생의 발걸음이다.

 

<산 밑으로> 중에서

 

바다를 건너간 조선민들레. 흙 한줌이면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 흰색 갓털처럼 가벼운 삶을 사신 예수. 바람은 성령이요, 뿌리는 말씀이다. 민들레 날고 예수가 날고~ 민들레 날고 자유가 날고~!

 

<민들레 날고> 중에서

 

오늘도,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말한다.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인류의 귀에 들려준다. 제 숨 쉬며 살라고 말한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린다. 다행이다. 자연만물이 (아직은)입을 완전히 다물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나처럼 사는 건> 중에서

 

 

저 아이를 좀 보라는 것은, 아이가 바라보는 자연과 세상을 보라는 것이요, 아이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언어를 들으라는 것이요,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천국을 보라는 것이다.

 

 <저 아이 좀 봐> 중에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역사에서 맞닥뜨리는 분노를 느낄 수 없다면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통증을 모르니 병이 깊어질 것이요, 신경세포는 무디어져 죽음에 이를 것이다. 고통에 중독된다면 온전한 삶은 포기해야 한다. 고통과 깊은 번민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리어 살 수 있는 길이다. 국가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 하며, 지구는 우주의 눈물을 보아야 한다.

 

<깊은 인생> 중에서

 

대지의 눈물은 어쩌면 평화. 유머란 무릇 실컷 울고 난 후에 머금은 미소를 말하는 것이니, 눈물은 평화로 건너가는 강이다. 결국 이 세상은 눈물이 구원할 것이다. 깊은 연민과 가없는 자비를 품은 눈물 없이는 결코 구원은 없을 것이다.

 

<대지의 눈물> 중에서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너무 작고 너무 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어리석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도 꽃은 열리고 나무는 자란다. 역사는 흐르고 성령은 움직이신다. 마음과 영혼의 귀가 열렸을 때, 우주를 운행하시는 그 분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소리> 중에서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진 않는다. 내가 드린 기도로 해가 뜨진 않는다. 내가 드리는 기도는 노동처럼 오래 걸리니 무심히 기다릴 뿐이다. 이 세상 가장 짙은 그늘 속으로 말없이 들어가는 일인 것을 알 뿐이다. 내가 드리는 기도는 노을처럼 아침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진 않는다> 중에서

 

평화를 살지 않으면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무릇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이 없다면 평화는 없을 터, 우리의 흘린 눈물 없이 평화는 없다. 겨울을 지나간 시간 없이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평화는 아침에 피어난 꽃처럼 오리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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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救援)의 지평, 기어서 넘기

- 김기석 목사의 《아슬아슬한 희망》1 -

 

 

가을의 끝자락, 초겨울의 문턱에서 김기석 목사의 열 번째 책 《아슬아슬한 희망》을 만났다. 꽃들은커녕 곱게 단풍이 든 나뭇잎들에게조차 암담한 계절, 이제는 추운 바람과 눈서리 겪는 일만 남은 계절에, 이 책은 ‘아슬아슬’하게 우리에게 왔다. 이기적으로 저만 챙기게 태어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신학을 하면서 겨우겨우 애써가며 배워온 것들을, 김기석 목사는 그냥 ‘타고난’ 것 같다. 조개 잡고 갈매기 쫓으며 팔랑팔랑 뛰어다니느라 바닥 볼 일 없이 바빴던 어린 시절 나의 개펄에의 추억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려서부터 시선을 바닥에, 땅에 두며 살았다. “온 몸으로 바닥을 기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상한 연민”(12쪽)이 있었다 한다. 개펄에 난 게의 흔적, 신작로에 남겨진 지렁이가 기어간 길, 그 흔적들이 말해주고 있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에의 몸부림이 애처롭고 처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보다. 김기석 목사는 이 책 가득히 ‘포월(匍越, 기어서 넘기)’의 삶을 사는, 살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땅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구원의 발걸음은 초월(超越)이 아니라 포월(匍越)이라고, 김 목사는 고백한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늘 슬픔으로 지켜본 ‘땅의 사람’이라서, 그러나 한편으로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던” 신앙인이요 목회자였기에(13쪽), 그는 결국 이 땅의 삶을 하루씩 ‘기어서’ 하늘에 닿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기어서 넘기가 어디 만만한가? 에녹이,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듯 천군천사가 양팔 잡고 병거 타고 훨훨 날아,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훌쩍 뛰어넘는 구원을 성취하자고 말해야 그나마 솔깃할 세상에서, 그는 ‘기어서 넘는’ 구원으로, 천천히 하루씩 성실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 어려운 길로, 기어이 우리를 이끈다.

 

 

 

 

그도 안다. 기어서 넘기가 얼마나 고단한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어려운지. ‘기어서 넘기’에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악한지.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열심히 ‘기어’ 버텼으나 끝내 ‘넘지’ 못한 인생들을 안타까이 기억한다. “일그러진 자본”의 악한 모습이 앗아간 생명, 태안군 의향리 어민 이영권 씨(114쪽), 팽목항에서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피에타들”(215쪽), 미움도 분노도 없이 오히려 “죄송합니다” 공손히 글을 남기고 스러진 송파구 세 모녀의 생명!(207쪽)

 

성경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고, 절제가 없고, 난폭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말세의 징조라고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우리 시대를 비껴가는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58쪽)

 

그래서 그는 마냥 서정적인 아름다운 에세이를 쓸 수 없었다. 하늘의 희망을 품고 성실히 땅을 ‘기어’ 살아가던 민초들이 끝내 ‘넘지’ 못하고 죽어가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이요 목회자인 그는 저 슬프고 아픈 이름들을 새기며 그 이름들을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힌 교회[와 사회]에 대한 기소장”으로 읽어낸다.(211쪽) 그래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의 언어들은,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아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는 그의 목표는, 그의 꿈은, 그의 소망은 “우리 현실 속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고 싶은”(13쪽) 것이었으니까.

 

가당키나 한가? ‘우리 현실’이 지금 어떠한데? 꿈을 꾸어야하는 청춘조차 ‘너머’의 세계를 그리는, 그리워하는 것이 사치라고 말하는 시절 아니던가. 시인의 언어를, 예언자의 소리를 들려줘도, 그런 것들은 ‘정규직’이 되는 일에도 돈을 버는 일에도 쓸모가 없다며 들으려하지 않는 시절인데, 언감생심 오늘 이 자리에 ‘하늘의 빛’을 끌어오겠다니!

 

눈물이 났다. 실은 나도 그런 어이없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서, 그럼에도 현실의 힘에 눌려 가끔 그 꿈을, 그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옴을 경험하기에….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새삼 감사했다. 하나님 나라, 인간이 내는 견적으로는 도저히 이 땅에 도래할 것 같지 않은 그 ‘동아리’에서, 묵묵히 앞서가는 선배(先輩)의 뒷모습을, 발자국을 발견한 기쁨 때문이었다. 이 책은 ‘관계의 그물망’이다. 혼자서는 어림없는, 혼자 하다 자꾸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이 외로운 싸움에서 “우리가 허무의 물결에 실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137쪽) 따듯하고 탄탄한 그물망이다.

 

또한 정화된 영혼으로 숱한 제자들과 순례자들의 발길을 닿게 했던 베네딕도의 동굴처럼(146쪽), 문풍지가 되어 겨울바람을 막아내고 계셨던 어머니처럼(274쪽), 익지 못한 감 열매도 채 자라지 못한 참외조차도 버리지 않고 살뜰히 챙기신 아버지처럼(117쪽), ‘기어 넘는’ 우리 인생이 품은 ‘아슬아슬한 희망’에 버팀목으로 연대하려는 몸짓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근원 앞에서 홀로 앉도록” 초청하고, 그 힘으로 마주 앉고, 둘러앉음으로, 모든 생명이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는”(78쪽) 것이 필요하다고, 가능하다고 외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66쪽)이기에 그것은 누구도 대신 못할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일상 가운데 치열하게 성실하게 살아내며 만들어갈, 우리의 몫이다. 바람타고 날아와 예배당 뒤편 흙 둔덕에서 피어났으나 하얀 뿌리를 드러내고 아슬아슬 생명을 버텨내는 위태로운 소나무의 모습이 안타까워 대나무를 잘라 울타리를 만들고 흙을 덮어주고 날마다 물을 주며, 그 소나무 이름을 “아슬아슬한 희망”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한 후배 목회자의 이야기를 전하며(65-66쪽)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희망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완제품이 아니라 삶으로 구현해야 할 과제이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어나 안녕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저항과 연대와 연민을 통해 역사의 봄을 선구한다.(67쪽)

 

자본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힘은 협동과 섬김과 돌봄과 비움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 수가 적어도, “바늘로 우물을 파는 것” 같더라도(98쪽), 희망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우리의 일상은, 인생은 가능성이다. 이상주의라고? 그 꿈으로 치자면 성서의 인물들만 할까? 김 목사도 말하듯이 성서에는 전쟁의 한 중간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꿈,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노는 세상을 꿈꾸었다.(193쪽) 예수의 꿈은 어떤가? 삶과 죽음의 매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도래케 하는, 하나님 나라 통치 질서를 이 땅에 오게 하려는 꿈을 꾸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은 꿈꾸는 자들이다. 그리고 꿈대로 사는 자들이다.

 

때문에, 김기석 목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순천(順天)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모두가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대열에서 벗어나 딴 길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대는 세상의 북소리가 아닌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굳게 붙잡고 있던 욕망의 바위를 놓고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순천(順天)의 사람들이야말로 새 시대의 주역이다.(29쪽)

 

결국은 한 걸음씩이다. 기던 걷던, 단 하루도 건너뛰고 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여 일상에서 하늘의 빛을 담아내지 못하고서 구원은 없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삶이란 오늘의 점철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70쪽)

 

그 성실성으로 김기석 목사는 익명성의 거대 공간 도시 한가운데서 순간순간 스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마주하며 ‘화살기도’를 날린다.

 

“저 학생의 가슴 속에 하늘의 따뜻한 기운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저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부디 건강 잃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저 가슴에 깃든 어둠이 있다면 그것을 빛으로 바꿔주십시오.” “저 할머니의 느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랑의 샘이 솟아나게 해주십시오.” 시인의 화살기도는 타자를 함부로 대하고 생명을 유린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멈추지 않는다. “저분들도 생명의 신비에 눈뜨게 해주십시오.”(21-25쪽)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그들조차도 그리스도는 문을 두드리시며 들어가길 원하시는 기적 같은 생명 아닌가.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나!

 

김기석 목사는 평화주의자다.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와 나의 ‘선배’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셨으니… 그러나 그 평화가 땅의 권세가들과의 공모나 묵인으로 오는 상태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아는 진정한 평화주의자이다. 하여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한 멕시코 혁명가의 결기는 이 책 갈피갈피마다 묻어난다. 그가 싸우는 대상은 참으로 크다. 강하다. 자본이 ‘주의’가 된 세상, ‘정규직’이 꿈이 된 세상, ‘무한경쟁’이 삶의 가치가 된 세상, 개별화가 당연이 된 세상, 끝없는 탐욕이 능력이 된 세상. 이 세상과 싸우자하니 그의 평화는 피 흘림 없이, 상처 없이 도래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게 피 흘리는 그의 언어들은 이 책에서 그 싸움을 싸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되 인간 본래의 생명이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히 ‘기어서 넘는’ 인생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짖밟는 구조악에 한판 싸움을 걸면서, 샬롬의 그날을 꿈꾼다.

 

그래서 희망이다. 우리 현실이, 인생이 비록 ‘아슬아슬할’ 지언정, 끝내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꿈을 꾸며 오늘 하루씩 겨루어내는 이 ‘기어감’이 결국은 이 생명 경시의 세상을 ‘넘어’가도록 만들 테니까. 한 명, 또 한 명, 이렇게 ‘살림’의 방향으로 연대하여 ‘기어가는’ 신앙의 사람들이 늘어가는 그 나라를, 그래서 예수는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이었겠지. 김 목사는 이 책을 “멋진 소식으로 이 세상을 방문한 외손녀 예빈이에게” 주고 싶다(15쪽)고 했다. 나도 그렇다. 책 읽기를 마치고서 나는 밑줄 가득한 이 책을 나의 미래인 내 아이에게 건넸다. 내 아이가, 우리의 아이들이 ‘기어서 넘는’ 세상은 견딜 만 하도록 땅을 고르고 장애물을 치워줄 몫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다는 걸 다시 다짐하면서.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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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빛을 뿌리는 묵상과 메시지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

 

 

1.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의 경험이다. 내 독서 경험의 반경에서 좀 과감하게 판단하자면 그는 이 땅의 목사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목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목사에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은, 특히 이 땅에서 말씀이 유통되는 지형을 감안할 때, 단순한 칭찬 이상의 함의를 띤다. 그가 매우 섬세하게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하나님 말씀을 공들여 조탁하는 세공술로 전이되어 글과 함께 독자가 한없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겉 폼을 잔뜩 잡고 온갖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글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간명하고 투명해지고 있다. 뒤틀리기보다 안정된 글의 리듬은 삶을 대하는 그의 정제된 태도를 반영하거니와, 동시에 그의 영성이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긴 채 유영하고 있는 신호 같기도 하다.

 

동서양의 고전과 영성가의 명언, 시인의 정제된 시구들이 풍성하게 인용되고 접속되지만 그 모든 인용과 참조의 글들조차 그의 글 속에 용해되면서 온전히 그의 말 가운데 성육되는 진경이 그의 글 가운데 펼쳐진다. 따라서 그처럼 특출하게 글을 조탁하는 솜씨는 타고난 잔재주가 아니라, 그가 성실하게 개척해나간 숱한 책읽기 경험과 삶의 공부, 신앙의 내성을 거쳐 일구어낸 통찰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글쓰기의 진경이 이번에 나온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그가 이전에 펴낸 일반 에세이집과 다르게 이 책은 성경 본문을 화두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성경은 이 책에서 요한복음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요한복음 주해나 강해의 성격으로 국한시켜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는 한국교회 강단에 전혀 색다른 성서 강해나 주해의 실험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색깔은 김기석 목사 고유의 체취로 풍성하면서도 독창적인 요한복음 해석의 보화들로 넘실거린다.

 

이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저자는 요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9장의 설교 메시지를 깔면서 그 전후로 또 다른 9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발견과 각성, 권면과 기원의 형식을 쫓아 요한복음의 행간을 헤집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2.

 

당연한 지적이지만 그가 보기에도 성경은 그 전문가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지극하게 살아내는 방식으로 성경을 공들여 묵상할 권리가 있다. 흔히 느끼듯, 성경의 묵상은 본문에 압도되어 그 문자적 논리를 따라가는 식물성의 궤적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렇게 식물적이지 않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그르렁거리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로 맛보기도 하고, 씹기도 하는 것처럼 텍스트와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4-5쪽)

 

그러나 그렇게 전투적이고 도전적인 성경 묵상의 자세가 오감의 독법을 지나 그의 가지런한 글속에 정돈될 때 그의 말들은 조야한 묵상의 찌끼가 사라지고, 놀라워라, 한 송이 꽃처럼 부드러운 초청과 권유의 메시지로 거듭난다.

 

이처럼 그의 글쓰기는 묵상의 발톱과 이빨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만용과 정반대편에서 치열한 도전과 투쟁의 몸짓을 겸손한 말의 품에 쟁여두는 부드러움의 해석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자기방어적인 변명을 위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설득과 권면을 위한 목회적인 부드러움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의 성경 해석에서 그는 그 말씀에 안주하기보다 모험하며 불편함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을 내던지는 활공의 길을 택한다. 도저히 기존의 권위자들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 안주적인 성경 묵상에 도취한 세태를 비판하면서 그는 따끔하게 일갈한다.

 

“달콤한 말에는 밑줄을 긋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되었다. 빚을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며 도외시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음성은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84쪽)

 

3.

 

그렇게 요한복음을 용감하게 읽고 부드럽게 드러낼 때 요한복음의 성육하신 예수는 이처럼 시적인 아우라를 걸치고 재조명된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는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16-17쪽)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설파하며 ‘함’에 앞서 ‘있음’의 가치를 깨쳐 보여준 게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 ‘복음’이자 메시지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바람과 같다고 했을 때 그 해당 구절은 바람의 이미지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과 함께 어우러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점입가경을 이처럼 아름답게 제시한다.

 

“바람의 ‘있음’은 언제나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난다. 바람과 만난 나뭇잎은 살랑거리며 설렘을 드러내고, 호수의 물은 바람의 부름에 물결로 응답하고, 바람을 탄 매는 높은 하늘을 유영하듯 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는 억지가 없다. 시끄럽지 않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람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거기 있어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 그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란다.”(44쪽)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이미지를 상투적인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연계시켜 얼마든지 투박하게 평균치 교인 대중의 인식에 호응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그 상투적인 투박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공교롭게 그 이미지의 실재를 조탁하여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함을 감추고 사는 그저 그런 사람마저도 신령한 작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기발한 상상에 의지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귀찮은 선악과 이야기도 새로운 해석의 돌파구를 연다. 요한복음의 존재론적인 숭고함의 신학적인 기틀 위에서 그가 재조명하는 바, “성경의 이야기꾼들이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려는 것은 도덕적 분별력의 확장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을 척도로 삼는 일의 위험성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 혹은 판단이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이다. 예수의 시선은 전복적이다.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고,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서 거룩함을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예수는 그들의 가슴에 있는 ‘눈물’을 본다.”(47쪽)

 

사소한 듯 여겨지는 지극히 작은 생명 속에서 거룩함과 눈물을 보는 예수의 시선은 곧 이 땅에 일그러진 종교, 특히 기독교의 얼굴에서 위선을 못 견뎌 그것을 뒤집고자 열망하는 저자 김기석 목사의 시선과 잇닿아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종횡무진 요한복음 독법은 이른바 ‘영해’와 ‘알레고리’의 늪에 빠지기 쉬운 본문들에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 메시지의 신선함은 또 신산한 세상살이를 온 몸으로 감내하며 뚫고 가는 이 땅의 대다수 생활인들에게 말씀이 육체로 현전하는 사건을 일상 가운데 온전히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요한복음의 진리는 따라서 형이상학적 초월의 저편에서나 맛볼 수 있는 영적인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적’이라는 관형어 역시 이 땅에서 땀 냄새 나는 하루하루 삶과 동떨어진 내세의 낙원에나 어울릴 법한 그런 묘연한 영혼의 장식품이 아니다. 가령, 예배를 영과 진리 가운데 드려야 한다는 말씀과 관련하여 저자의 해석은 또 다른 파격적 전복의 명징한 실례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한다. 오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고 있는데도 우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악마적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57쪽)

 

이와 같은 도저한 헌신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이 세상의 악마적 세력과 부대껴 싸우는 투쟁의 의욕을 고취시킨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 집단의 제반 운동에 개인의 자율성과 단독성을 저당 잡히는 운동권 이념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고독을 사랑하는 목사이다. 겉멋으로 고독의 폼을 잡는 게 아니라, 그 고독의 영성적 가치에 절절이 눈뜨고 그것을 그의 목회 현장, 일상의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군중을 떠나 홀로 독처하고자 움직인 예수의 동선을 서술한 짧은 한 구절에서도 그는 ‘예수 정신’을 본다.

 

“예수 정신은 이 ‘혼자서’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신앙은 독립, 곧 홀로 섬이다. 홀로 섬이 허락되지 않는 ‘더불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더불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밑절미이다.”(102쪽)

 

이렇게 ‘홀로 섬’과 ‘더불어 삶’을 오가며 그는 요한복음의 내밀한 빗장을 열고 독자들을 초청하며 권한다. 이제 이 땅에서 뱅뱅이질만 하지 말고 제발 도약하여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억압을 초월해보라고. 동시에 그는 이렇게 권하는 듯도 하다.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한 가운데가 바로 구원이 샘솟는 자리이니 먼 데로 한눈팔지 말고 그 일상의 세속에서 예수의 영을 살아내며 눈물 그렁그렁한 이웃들과 더불어 극진해지라고.

 

4.

 

이 책을 통해 김기석 목사는 말씀의 빛 속에 넉넉한 포즈로 행복하게 거닐어온 묵상과 성찰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신학과 종교의 지도에 길이 없는 갈릴리의 대지를 걸어 다니며 개척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그의 부활과 함께 ‘그 길’이 되고 ‘생명’과 ‘진리’로 꽃피어났듯, 영지주의자, 초월적 신비주의자, 심지어 얼치기 성령주의자 등에 의해 혼돈의 늪 속에 허우적대던 요한복음이 이제 이 책의 생산과 함께 희한하면서도 심오한 진경의 오솔길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보수적인 독자는 새것에 반응이 굼뜨고, 진보적인 독자는 그 새것에 퉁을 놓고 트집을 잡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능청을 떨기 쉽다. 김 목사의 글이 너무 순정하고 명징하여 때로 흙탕물 한 바가지를 붓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리듬이 너무 안정되어 좀 비틀고 헝클어트리고 싶은 심술이 더러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혼탁한 정신의 망령을 벗고 겸손하게, 천천히 그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로서 나는 제 고깃덩어리 육신의 삶을 넘어서는 숭고한 존재의 의미가 내 안과 밖에 풍요롭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순식간 깨치게 된다.

 

지금도 이 책을 앞에 두고 괜스레 공손한 자세를 가다듬게 되고 사뭇 경건해진다. 그의 공들인 글 속에서 풍겨오는 삶의 무게가 뻐근하게 전달된다. 내가 걸어온 지난 30년 설교의 이력 속에 한 번도 우려내지 못한 메시지가 이 책을 매개로 상상의 진공을 울리며 파고드는 기미만은 뚜렷하게 감각된다. 정녕,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이 책의 행간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며 말씀의 향연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차정식/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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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영성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맑은 물

-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

 

 

1.

 

대학을 마치고 감신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동갑내기 동향인 김기석 목사를 만났다. 그의 큰 눈은 지금처럼 깊이 파였고 형형한 빛을 발산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목의 소임을 위해 입대했기에 깊은 교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인상은 강력하여 소식이 끊긴 다음에도 그의 행적이 종종 궁금했다.

 

당시에 그는 남미로 유학을 가서 해방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강골의 기질이 느껴졌기에 “그답다”는 생각을 했는데,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그는 문학비평가가 되어 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남미대신 자신의 서재를 택했고, 민중신학 대신 문학을 택했으며, 유학대신 독학을 택했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홀로 서재에서 서향을 벗 삼아 자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그렇고 그런’ 목회 현장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평범한 목회자로 살면서 수도자의 영성을 길렀고, 매 주일 설교자로 강단에 서서 시인의 음성을 들려주었으며, 이런 저런 지면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자신이 체득한 진리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그만의 길을 개척하여 올곧게 걷고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가고 있다.

 

그의 최신간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꽃자리)는 설교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저자의 영성과 삶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는 요한복음 본문에 대한 저자의 묵상과 요한복음 본문으로 선포한 설교를 번갈아 편집해 놓았다. 한 책에서 “했다” 체와 “했습니다” 체가 번갈아 나오는 것은 아주 드문 편집이다. 아마도 설교문이 가지는 다이나믹을 살리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분주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급하게 읽어내려 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시간을 내어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천천히 읽어야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에릭 프롬이 말한 ‘소유형 독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독서를 통해 설교 예화나 자료를 얻으려는 습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이 책의 향기를 음미할 수 없다. ‘존재형 독서’ 즉 독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는 사람만이 이 책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저자 자신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우려 쓴 글이기에 그와 같은 정성으로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중에 떠오른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복음 13:52).

 

저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폭넓은 독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자료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쓴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시인들의 싯구다. 그 싯구들은 잡힐 듯 말듯 한 예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준다. 이것은 늘 시의 숲에서 산책하기를 즐기는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고전과 사상가들의 통찰도 동원이 된다.

 

 

 

 

2.

구약학계의 권위 있는 목소리인 월터 브르그만은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핵심에는 그들의 시적 상상력이 있다고 했다. 학문으로서 성서학을 연구했던 나는 칼릴 지브란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브란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 이전에 내가 읽은 수많은 학문 서적들보다 더 깊은 통찰을 던져 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신학자보다 문학가의 성서 해석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를 많이 인용했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이 아닐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시인의 심성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시인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자의 설교는 전체로서 한 편의 시와 같다. 저자의 묵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묵상 중간 중간에 자주 멈춘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묵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상도 하지. 낯선 이 사나이의 음성에서 고향이 느껴지다니! 그가 건넨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의 음성에 실려 오는 따뜻함과 순수함, 그것은 마치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인 듯싶었다”(49쪽).

 

저자는 본문을 마주 보기보다는 본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사마리아 여인의 심정이 되어 보지 않고는 저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본문 안으로 들어가 그의 영성으로 맑은 물을 길어 올린다. 실로, 그의 글은 맑은 물과 같다. 자극적인 청량음료와 같은 글들이 홍수로 쏟아지는 현실에 그의 글은 차별성을 가진다. 청량음료는 잠시 만족을 주지만 금새 더 깊은 갈증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 하지 않던가!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사용하여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무뎌지기 쉬운 독자의 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가 이렇게 언어에 천착하여 스스로를 연마하는 이유는 말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 ‘말씀’ 즉 ‘다바르’에 이르기 위한 그의 치열한 궁구 덕분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바르, 곧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말이다. 물 흐드듯 유장하고 나직하지만, 마치 폭포처럼 힘찬 말씀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념과 논리로 오염되지 않은 말, 본질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그 말씀은 낯설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127쪽).

 

3.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쓰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과 신학과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영성가다. 하지만 그의 영성은 토마스 머튼의 그것처럼 사회적 관심으로 체화되는 영성이다. 앞에서 내가 해방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해방신학을 통하여 추구하려 했던 것을 지금은 영성을 통해 그리고 문학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바뀌었을지언정 방향은 그대로다.

 

영성과 정의가 그의 내면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글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요한복음 8장과 9장에 대한 묵상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권력자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권력의 속성과 인간의 탐욕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는 말한다.

 

“정의에 민감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지고 있다면, 배움을 향한 개방성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158쪽).

 

정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영성은 미신이나 광신과 다르지 않다. 반면, 영성에 뿌리를 두지 않은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홀로 있음’과 ‘같이 있음’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영성과 정의는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묵상과 설교를 읽는 중에 그 아름다운 동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저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국교회를 향해 아픈 충고를 내어 놓는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저자는 이렇게 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묵상하는 동안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졌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찾아온 무리들을 가르치고, 해저물면 차마 그들을 그저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나눠 먹으려는 그 소박한 마음을 이미 부유해진 교회는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짓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온갖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오늘의 기적에서 이 풀밭 위의 기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99쪽)

 

저자가 서문에서 쓴대로 그의 묵상은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 교회의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의 삶에서 우직하게 실천하는 것이 묵상의 목적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말하는 ‘콘템플라치오’가 결국 이것이다. 읽고(‘렉시오’), 묵상하고(‘메디타치오’), 기도한(‘오라치오’) 말씀이 삶을 통해 그 진실을 드러내도록 맡기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콘템플라치오’다.

 

온전한 서평이라면 부족한 점도 지적해야 하지만, 내가 훈련받은 분야와 저자가 스스로 개척한 분야가 너무 달라서 딱히 부족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묵상을 위해 믿을만한 성서 주석을 꼼꼼히 챙겼음에 분명하다. 그의 묵상은 본문에 대한 성실한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로 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서 묵상을 하는 사람들이 본문에 대한 연구 없는 ‘게으른 묵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본문 앞에서 무릎을 꿇기 전에 책상에서 해야 할 숙제의 책임을 다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요한복음 본문을 다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으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 보려는 사람에게는 아쉬움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학습을 위한 참고서가 아니다. 설교를 위한 주석서도 아니다. 저자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여 얻는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치 깨달음의 이삭들을 모아 놓은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정진에 감사를 드린다. 그는 품격을 잃고 값싼 상품처럼 되어 버린 설교와 묵상에 품격을 입혀 주었다. 기독교 사상을 이 정도로 품위 있고 깊이 있게 풀어낼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부디, 기독교의 경계선을 넘어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사상가로 그리고 저자로 계속 깊어져가기를 기원한다. 법정 스님이 불교적인 사상으로 다른 종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소통한 것처럼, 저자도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란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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