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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연기 한희철의 얘기마을(186) 저녁 연기 겨울 해는 짧습니다. 한껏 게으름 떨던 해가 느지막이 떠올라 어정어정 중천 쯤 걸렸다간 그것도 잠깐 곤두박질하듯 서산을 넘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땅거미가 깔려들고 마을마다엔 흰 연기가 솟습니다. 기름보일러 서너 집 생기고, 연탄보일러 늘어가지만 여전히 쇠죽 쑤는 아궁이, 그 아궁이만큼 장작을 땝니다. 그을음투성이인 검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올라 마을은 저녁마다 흰 연기에 둘립니다. 보면 압니다. 바람처럼 쉬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저녁의 흰 연기는 어둠이 다 내리도록 마을을 떠나지 않습니다. 손도 없는 그놈들이 손을 마주 잡은 듯 둘러 둘러 마을을 감싸고 흐릅니다. 어쩜 저녁연기보다도 쉽게 떠난 자식들, 마른 가지 아프게 꺾는 주름진 손길을 두고, 저.. 2020. 12. 28.
오토바이에 썰매를 매달아요 신동숙의 글밭(297) 오토바이에 썰매를 매달아요 배달물을 싣고서 바쁘게도로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를 보면아찔하니 가슴으로 찬바람이 불어요 일하러 나가는 엄마가온라인 등교로 집에 있을 자녀에게짜장면을 시켜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오토바이를 탄 사람도이웃집 귀한 아들이고 아빠일 텐데그런 생각이 들지요 도로를 달리는 차들 사이로 비틀비틀 달리는 오토바이를 보는 마음은언제나 아슬아슬하지요 만약에 오토바이 뒤에 양쪽으로 바퀴가 달린 썰매를 매달면 음식 배달, 우편물 배달, 택배 배달물을 뒤에 싣고비와 눈을 가려줄 천정 덮개를 길게 앞으로 늘이고 그러면 오토바이 속도가 느려진다며주문한 짜장면이 늦게 도착한다며우편물이 늦게 온다며불평할 이웃이 있을까요? 우리가 조금만 느긋한 마음을 낸다면우리의 아빠와 아들이 탄 .. 2020. 12. 27.
순교할 각오로 한희철의 얘기마을(185) 순교할 각오로 단강으로 목회를 떠나올 때, 먼저 농촌에서 목회를 시작한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농촌목회를 잘 하려면 ‘순교할 각오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이내 실감하게 됐다. 교우 가정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 밥그릇엔 밥이 수북하게 담기곤 했다. 밥그릇도 보통이 넘어 전에 먹던 밥에 비하면 족히 배 이상이 되는 양이었다. 행여나 밥을 남길라치면 교우들은 ‘찬이 없어 그런가 보라’며 이내 섭섭한 표정이 되곤 했다. 그런 마음 알기에 밥을 남기는 일 없이 먹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젠 많은 양에 익숙해져 찬에 상관없이 밥을 제법 먹게 되었다. 순교할 각오로 먹으라. 이제쯤 생각해 볼 때 그 말은 단지 먹는 것에 관한 것이 아.. 2020. 12. 27.
자작나무숲 신동숙의 글밭(296) 자작나무숲 사진: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숲, 김동진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길 은총의 길 땅에서 올라가는 하얀 길 평화의 길 2020. 12. 26.
마지막 5분 한희철의 얘기마을(184) 마지막 5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몇몇 친구들은 학교 도서실에 남았다가 늦은 밤 돌아오곤 했다. 학교 진입로는 꽤 긴 편이었는데 길을 따라 켜진 가로등 불빛이 참 좋았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루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죽기 5분 전에 회개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거냐고. 수원 유신고등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예배를 드렸는데, 아마 그날 설교의 내용이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난 친구의 질문 앞에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귀찮고 신경 쓰이게 하나님을 믿느니 그냥 맘대로 살다가 죽기 5분 전에 살아온 모든 죄를 회개하고 싶다고, 그래도 되지 않겠냐고.. 2020. 12. 26.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신동숙의 글밭(295)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오늘 성탄절 전야는 가장 어둔 밤이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뜬눈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밤이 깊을 수록 별은 유난히 밝게 빛난다는 하나의 진리를 붙든다. 까맣도록 타들어간 내 어둔 가슴을 헤집어 그 별 하나를 품는다. 별을 스치듯 부는 바람에 그제서야 거친 숨결을 고른다.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겪어오고 있는 일들을 하나 둘 돌아보면, 수학 여행 때 단체로 뭣모르고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에 올라탔을 때처럼, 숨을 멎게 하는 듯 늘어나는 아픈 이들의 증가수와 평범하던 일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과도한 포물선과 휘몰아치는 기세를 벗어나고 싶어도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팬더믹과 어쩌면 그보다 .. 2020. 12. 25.
성탄인사 한희철의 얘기마을(183) 성탄인사 성탄절 새벽, 겨울비를 맞아 몸이 젖은 채로 새벽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나갈 때 끄고 나간 것 같은데 웬일일까 문을 여니 그냥 빈 방에 스탠드가 켜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스탠드엔 웬 풍선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노란색의 둥그런 풍선이었습니다. 풍선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축 성탄성탄을 축하합니다.늘 사랑합니다. -산타 익숙한 글씨.작은 산골마을에서 맞는, 눈보다 비가 내린 성탄절. 풍선 하나에 적힌 한없이 가난한, 한 없이 넉넉한 성탄 인사.그리고 사랑법. - (1992년) 2020. 12. 25.
지게 그늘 한희철의 얘기마을(182) 지게 그늘 달리는 오토바이를 핑계 삼아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아닙니다. 분명 보았지요. 유유히 강물 흘러가는 강가 담배 밭. 지난해 물난리로 형편없이 망가진 밭을 그래도 땀으로 일궈 천엽따기까지 끝난 담배 밭, 대공들만 남아 선 담배 밭 한 가운데 두 분은 계셨지요. 불볕더위 속 담배 대공 뽑다가 세워놓은 지게 그늘 아래 앉아 두 분은 점심을 들고 계셨지요. 이글이글 해가 녹고 가만히 있어도 비 오듯 땀줄기가 온 몸을 흐르는 더위. 밭 한가운데 지게를 세우고 지게 그늘 속 두 분이 마주 앉아 점심을 들 때 난 차마 두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게 그늘, 그 좁다란 그늘을 서로 양보하며 밥을 뜨는 당신들을 그냥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마.. 2020. 12. 2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신동숙의 글밭(29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이 글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적는다. 10년 전 가을 그때에 일을 떠올리는 마음이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뒷좌석에 두 자녀를 태우고, 남편이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라디오 불교 방송, 고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정목 스님의 유나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로 사연이 하나 올라왔다. 스님은 그 사연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연인 즉, 자신은 젊은 청년이라고 소개를 하며, 하반신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고 있으며, 평소 불교 유나방송의 애청자라고 한다. 그러다가 발심이 생겨 출가를 해 부처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출가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출가의 뜻을 세.. 2020.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