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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이 그리운 시절 리영희 선생이 그리운 시절- 리영희 선생의 - 시대의 의로운 길잡이 오늘은 엄혹한 시절, 불의가 판을 치고 거짓이 난무할 때 그러한 권력에 맞서 자유와 진실을 추구한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10주기이다. 한 시대를 사상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영광이 무수한 고초와 핍박 그리고 고난이 전제된 것이라면 아무나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그 격동의 시기에, 진실에 대한 깊은 갈구를 해온 세대에게 마치 샘물처럼 솟아오른 존재였다.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냉전 의식으로 눈이 가려진 시대를 뚫고 진실의 정체를 보여준 위력적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2020. 12. 5.
일렁이는 불빛들 한희철의 얘기마을(164) 일렁이는 불빛들 밤이 늦어서야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속회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요즘 같은 일철엔 늦은 시간도 이른 시간입니다. 아랫작실 초입에 이르렀을 때 저만치 다리 있는 곳에 웬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웬 불빛일까, 가까이 가보니 그 불빛은 자동차에 늘어뜨려 놓은 전구들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날개 펼친 듯 양 옆을 활짝 열고 줄줄이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차려 놓은 물건 규모가 웬만한 가게를 뺨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기발한 이동 가게였습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필요한 물건을 샀고, 할머니 몇 분은 다리 난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밤이면 들어오는 가게 차입니다. 충주에서 오는 차라.. 2020. 12. 5.
어떤 고마움 한희철의 얘기마을(163) 어떤 고마움 손님이 없어 텅 빈 채 끝정자를 떠난 버스가 강가를 따라 달릴 때,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던 아이들이 버스를 보고 손을 들었다. 등에 멘 책가방이 유난히 커 보이는 것이 1, 2학년 쯤 됐을까 싶은 아이들이었다. 학교에서 조귀농까진 차로 5분 정도 되지만 아이들 걸음으론 30분이 족히 걸리는 거리다. 등굣길 하굣길을 아이들은 걸어 다닌다. 녀석들은 장난삼아 손을 들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과 주저주저 들어보는 손 모습이 그랬다. 한눈에 보아도 녀석들이 장난치고 있음을 알 만한데, 버스기사 아저씨는 길 한쪽에 버스를 세웠다. 정작 버스가 서자 놀란 건 손을 들었던 아이들이었다. 버스가 서고 출입문이 덜컥 열리자 녀석들은 놀란 참새 달아나듯 둑 아래 담배 밭 속으.. 2020. 12. 4.
순례자 한희철의 얘기마을(162) 순례자 된 소나기가 한참 쏟아진 지난주일 오후, 한 청년이 찾아 왔습니다. 비를 그대로 맞은 채였습니다. 단강으로 오는 차편을 잘 몰라 중간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했습니다. 그날 청년은 세례를 받았다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처음 믿음을 잘 지켜 신부님께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그러다가는 뛰고 그러다간 불쑥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뒀던 단강을 무작정 찾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잠깐 인사하고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서는 길, 비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우산 하나 전하며 빗속 배송합니다. 불편한 걸음걸이. 세례 받은 날 먼 길을 고생으로 다녀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세례의 의미를 마음속 깊이 새기는 순례자의 모.. 2020. 12. 3.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한희철의 얘기마을(161)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대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작실서 섬뜰로 내려오는 산모퉁이 길, 아침 일찍 커다란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책가방 등에 메고 준비물 손에 든 5학년 병직이입니다. 하루 첫 햇살 깨끗하게 내리고, 참나무 많은 산 꾀꼬리 울음 명랑한 이른 아침, 씩씩한 노래를 부르며 병직이가 학교로 갑니다.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 (1992년) 2020. 12. 2.
제비집 한희철의 얘기마을(160) 제비집 사택 지붕 아래 제비가 집을 지었습니다. 며칠 제비 울음 가깝더니 하루 이틀 흙을 물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벽돌 중 조금 튀어나온 부분을 용케 피해 집 자리로 잡았습니다. 언제 부부의 연을 맺었는지 두 마리의 제비는 보기에도 정겹게 바지런히 집을 지었습니다. 진흙을 물어오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물어오기도 하며 제비는 하루가 다르게, 낮과 저녁이 다르게 집을 지었습니다. 전깃줄에 새까맣게 앉곤 했던 어릴 적과는 달리 해마다 수가 줄어드는 제비가 내가 사는 집을 찾아 집을 짓다니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유심히 집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배운 것인지 며칠 사이로 봉긋 솟은 모양의 제 집을 제비는 훌륭하게 지었습니다. 지나가던 승학이 엄마가 제비집을 보더.. 2020. 12. 1.
결혼식 버스 한희철 얘기마을(159) 결혼식 버스 단강이 고향인 한 청년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전화를 주기도 하는 가족인데다, 애써 주일을 피해 평일에 하는 결혼식인지라 같이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대절한 관광버스가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잔치가 있는 날에는 의례히 대절하는 버스입니다. 한번 부르는 값이 상당하면서도 버스 대절은 잔치를 위해선 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바쁜 농사철, 게다가 애타게 기다렸던 단비마저 내려 버스엔 전에 없던 빈자리도 생겼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차 안의 스피커에선 신나는 음악이 쏟아지듯 흘러나옵니다. 그 빠르기와 음 높이가 여간이 아닙니다. 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이 바쁜 철 잔치를 벌여 미안하고.. 2020. 11. 30.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신동숙의 글밭(287)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이른 아침 목욕탕에서 나오면 머리카락에 얼음이 꽁꽁 얼었습니다. 언제가부터 목욕탕에 헤어 드라이기가 생긴 것은 훨씬 뒷일입니다. 그 옛날엔 1~2주에 한 번 일요일 새벽이면, 참새처럼 목욕탕에 가는 일이 엄마와 딸의 월례 행사가 되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목욕탕 굴뚝의 하얀 연기가 펄럭이는 깃발처럼, 우람한 나무처럼 새벽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졸린 두 눈을 뜨기도, 작은 몸을 일으키기도 제겐 힘에 겨웠던 일요일 새벽,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는 일보다 더 싫었던 건 목욕탕 입구에서 엄마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던 저는 여러 해 동안 목욕탕 입구에서 만큼은 일곱 살입니다. 엄마가 제 나이를 한두 살 깎으면 목욕탕 주인은 일이백원을 깎아주.. 2020. 11. 30.
막연함 한희철 얘기마을(158) 막연함 귀래로 나가는 길, 길 옆 논둑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군데군데 거름 태운 자국이 버짐처럼, 기계충처럼, 헌데처럼 남아있는, 풀 수북이 자라 오른 논 한 귀퉁이, 처박듯 경운기 세워두고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 퍼지는 담배 연기 따라 함께 퍼지는, 왠지 모를 안개 같은 막연함. - (1992년) 2020.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