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아닌 스님, 목사 아닌 목사, 신부 아닌 신부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김민웅 자, 그러면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도법 종교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김민웅 종교를 구할 필요가 있을까요?(웃음)


오강남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을 등한시하면 안 됩니다. 세상일만 하자고 한다면 종교가 아니라 정치집단이나 이익집단이 될 가능성이겠죠. 때문에 둘 중에 하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봐요. 둘을 겸하되 여태까지 등한시 했던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속무름병’에 걸린 기독교


김기석 개신교의 타락은 교회 성장론에 있다는 이야기를 20년 전부터 해왔습니다. 본회퍼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고 말했는데, 본질을 잃어버린 기독교가 하나님 없이 자본 앞에 절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 성장론이 시작된 거죠.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욕망이 중요하지만 과도한 욕망이 허하다는 것을 보게 만들어줘야 하는 기독교가 오히려 욕망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극복했던 세 가지 시험에 아주 적극적으로 넘어가면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거든요. 교회 성장시키면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능력 없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젊은 신학도나 목회자들이 저하고 얘기를 나누고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처럼 목회를 하면 교회가 성장하기 어려울 텐데 교회가 크지 않으면 큰일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큰일을 해야 한다는 욕망처럼 반신앙적인 태도는 없기 때문에 저는 좀 화를 냅니다. “누가 너보고 하나님이 큰일을 하라더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일 하라고 한 적이 없거든요. 내게 주어진 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죠. 그런데 크기에 대한 신화가 사람들을 잡아 삼키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교회와 신앙이 본질에서도 멀어졌습니다. 옛날에 신문을 보다가 재미난 착각을 한 적이 있어요. 신문을 넘기고 있는데 얼핏 내 눈으로 ‘속물병’이란 타이틀을 본 것 같았어요. “어, 속물병이라는 것이 있네!” 그래서 다시 보니까 속물병이 아니라 ‘속무름병’이에요. 수박에 드는 병이에요. 겉은 멀쩡한데 속은 다 헐어서 먹을 수 없게 되죠. 재밌잖아요. 한국교회는 지금 속무름병에 걸렸어요. 외형적으로는 성장한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골아버린 거죠. 


도법 종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봐요. 깨달음으로 표현하든 하나님으로 표현하든. 어디서 길을 잃고 있는가 하면, 우리 현실에서 직면한 것이 돈이지 않습니까? 거룩한 게 아닌 거죠. 그렇다면 돈에서 하나님을 봐야 하거든요. 돈에서 하나님을 봤을 때 구원이 나올 수 있는 거죠. 돈에서 구원을 봤을 때 구원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는 돈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구원을 찾습니다. 이게 문젭니다. 그래서 오늘의 종교가 길을 잃었다고 봅니다. 어떻게 돈에서 하나님을 찾고, 거룩을 찾고 구원을 찾을 것인가. 돈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볼 것인가?


김민웅 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게 어떤 거예요?


도법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현존하게 하고, 거룩한 깨달음이 나오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기만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기만하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어요. 제가 볼 때는 종교구원 운동을 해야 합니다.


김민웅 오늘 종교를 이야기하면서 종교 유형도 분류해 봤구요. 문제가 심각한 종교도 종교라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도 던져보았습니다. 종교가 내면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으면서 겉으로는 성스러움으로 위장하는 것도 다뤘습니다. 종교가 어떻게 현실과 만나게 할 것인가를 두고도 고민을 나눠 봤습니다. 결국 오늘날 종교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기만의 체계를 어떻게 폭로하고 그 앞에서 함께 무너지고 또한 함께 일어날 것이냐를 고민하는 게 제일 중요할 거 같습니다. 동시에 종교가 현실과 만나려는 치열한 노력이 없다면 아픈 현장을 끌어안고 대안 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점점 더 어려울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아픈 일상으로 돌아가서 눈물이 고여있는 눈망울을 만나는 일이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종교구원론” 줄기차게 말씀하시니 그 이야기도 해 보죠. (일동 웃음)


도법 해답은 필요한데 해답 찾을 길은 막막하고….


김민웅 ‘종교를 굳이 구원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도법 구원하지 않고 가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가면 되죠.


김민웅 버리고 가죠. 그래야 살아날 거 같은데요. (웃음)


도법 종교 언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직면하고 있는 존재, 또는 일상적 삶이 발견하고, 실현하는 거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저쪽에서는 기독교라고 하고 이쪽에서는 불교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거룩함에 눈뜨게 하고, 거룩함을 현실 속에서 그 길을 가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종교언어라고 보는 거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전혀 다르게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접근이 된다면 종교 간의 갈등이나 벽이나 성과 속의 벽도 넘어서는 게 가능할 것입니다. 그 문제를 풀어내야 저는 미래문명이라는 것에 대한 대안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기성 종교를 버리고 가는 것이 해답인지, 아니면 기성 종교가 하고자 했던 본래 취지대로 가게 만드는 것이 해답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현재 기성종교는 내용적으로 종교라 보기 어렵습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이 탈을 걷어내고 종교가 제자리 찾게 만드는 작업이 요구되고 있겠죠. 그런 요구에 응답해야 될 시점이 아닌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가 아프다’는 말은 어디로 갔나!


김민웅 현 종교 안에서 뭘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종교가 본연의 일을 하지 않아서 무너지게 된 것은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지금 여기라는 현장에 자기를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교를 구원하려면 본래 하도록 되어 있는 행위를 하게 하면 됩니다. 물론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고 그런 토대 위에서 각자의 종교가 갖고 있는 특징과 언어와 사고가 심화되어야겠죠. 모든 종교는 고통 받고 있는 인간에게 다가서야하는 것이 첫 번째 일입니다. 거기서 유교의 (仁)이 나오고 불교의 자비가 나오고 기독교의 사랑이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현재 우리 종교들은 "지금 여기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려기보다는 권력과 함께 서고 싶어 하고,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진압합니다. 때문에 이건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라는 옷을 입은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라는 점에서 타도의 대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타도가 센 말인 것 같다면 붕괴라고 할까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한 것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바닥까지 깨져야만 하는 것이지 현재 모습 그대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거죠. 종교 전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타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오류가 반복되는 것 같아요. 어디 종교만 그러겠어요? 그래서 버리고 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때워서 쓰는 것은 가망이 없으니까 철저하게 무너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당시 종교에 대해 "강도의 소굴"이라 말씀하신 것을 절감합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개신교의 거대 교회를 보면, 대형화된 건물도 건물이지만 거기서 쏟아내는 말들이 강도의 논리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 너무 명백하거든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개신교에 대한 반감을 넘어서서 교회가 진짜 우리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개신교가 그런 암적인 존재들을 길러내는 양성소로 전락한 것이 너무 분명해 보여요. 이 종교가 무너져야 사람들이 진짜 종교가 뭔지 알 것 같다는 것이죠. 동구권의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많은 유럽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이제 진짜를 얘기할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저도 똑같은 심정이에요. 그래서 저는 기존의 체제가 무너진 것을 종교의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죠. 종교가 이렇게 무너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적당하게 타협을 하면 거기에서 독버섯이 계속 생겨서 번져나갈 거예요. 위기가 오면 자기 정체를 숨기며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가짜로 하는 것처럼 보여요. 진짜라면 다 내어놓고 움직여야죠. 얼마 전에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가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는 것처럼 하는 모습을 보였잖아요. 그걸 통해 교회 내부의 많은 갈등과 긴장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잖아요. 자기의 기득권을 버리지는 않고 일종의 눈물의 쇼를 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이 반복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김인국 무너질 것이 무너져야 설 것이 선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유독 바리새인들을 혼내고 나무라셨다는 점을 생각해야겠어요. 그 당시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사두개인들과 헤롯 괴뢰 세력을 혐오했는데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 아예 제쳐놓았고요. 왜 그랬는가하면 바리사이들은 배울 만큼 배우고 어느 정도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인데다가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었거든요. 당연히 민중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입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들이 지배세력과 긴장과 갈등을 벌이면서도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부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단 말입니다. 김규항 선생의 말을 빌리면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물렀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결과적으로 현상유지에 기여하고 근본적인 혁신을 가로막은 것이지요. 예수님의 책망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던 겁니다. 너희들 때문에 차라리 망하게 놔두는 것만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선자라고 비난하셨던 겁니다. 지금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과연 새로운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저는 비관적으로 봅니다. 각 종교마다 쇄신을 위해 헌신하는 집단들이 있지만 그런 노력들이 오히려 쓰러져가는 ‘낡은 집’을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교회는 아직 믿을 만하구나 싶은 착시를 유발해서 순진한 사람들을 거기서 깔려 다치는 사고를 입게 할지도 몰라요. 좌우지간 ‘뛰쳐나가야’해요.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낡아버린 교회라는 부대 갖고는 복음이라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어요. 좌우지간 뛰쳐나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해요. 대안을 모색하는 작은 학교들이 기존의 거대학교에게 자극을 주듯 새로운 모델이 일어서야만 기성 종교도 겨우 눈을 뜰지 몰라요. 


김민웅 그게 출애굽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모세와 히브리 민족이 파라오의 지배 시스템을 안에서부터 붕괴시킬 것 같지만 그렇게 안 했단 말이죠. 그냥 버리고 갔는데 그 일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어요. 하나는 파라오의 시스템을 유지해왔던, 아니 유지의 역할을 강제당해오던 집단이 빠져나가요. 출애굽을 함으로 파라오 시스템을 붕괴시킨 거죠. 안에서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으로 파라오 체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새로운 모델을 창조할 가능성이 동시에 생긴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면 탈출이란 방법이 도피적이고 2차적인 방법일 것 같은데 겪어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여기 있는 한 계속해서 기존 체제를 지원해줄 뿐이에요. 그러나 다 빠져나가버리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안 되는 거죠. 이게 새로운 형태의 불복종 운동입니다. 그러나 빠져 나온 사람들이 그대로 주체가 되었나요? 그건 아니었고,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 과정과 훈련을 거치게 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면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기존의 종교는 역사에서 소멸됩니다. 개신교를 예로 들자면 대형교회 안 가는 것이 빠져나오는 한 방법이 되겠죠. 대대적인 운동을 벌여서 교인들이 종교가 아닌 것에 속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거죠. 교회에 내는 헌금과 헌신으로 엉뚱한 자들이 살찌고 자기 자신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거죠. 그렇게 기존 종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 가기 운동도 어떤 의미에서는 펼쳐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교회 가지 말고 차라리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산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이죠. 아니면 그 시간에 환경이 좋은 시골을 가서 자연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고 자연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던지 말이죠. 또는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보러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좋은 영화, 의미가 있는 연극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시간과 예배시간이 그립다면, 그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해도 됩니다.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갇힐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그런 필요가 느껴지면 좋은 분을 모셔다가 함께 마음 맞춰 그런 시간을 가지면 되지요. 그걸 또 제도화하진 말고. 사람들이 그렇게 빠져나오는 순간에 파라오와 같은 기존 종교 시스템은 고립될 것입니다. 파라오는 날이 갈수록 바로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점점 혼자가 되다가 끝에는 고립되잖아요. 이처럼 우리도 고립전략을 써야 해요. 문제가 되는 기존 대형교회와의 연대와 지원과 손잡기를 모두 그만두는 것이죠. 조금이라도 설 자리를 주지 않는 거죠. 그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게 아니거든요. 싸우는 것도, 덤벼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쫙 빠져나오는 것이죠.


도법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김민웅 하나의 방법만 있다고 보지 않아요. 사람들이 빠져나오려면 이유가 제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교회의 지식인 집단이나 성직자들이 기존 종교의 기만을 계속 해서 보여주고 폭로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봐요. “이것은 기만이다, 종교가 아니다, 여러분은 속고 있다, 거기 있으면 계속해서 강도가 지배하는 집단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 줘야겠죠. 이것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것이 기존 체제를 빠져나오는 일차적인 방법이라고 봐요. 특히 개신교는 설교가 막강하게 영향을 미치니까 성서 해석학의 틀을 새롭게 제공해주는 것도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보는 눈을 제공해주는 것이죠. 기존의 체제에 회의를 느끼게 하고, 새로운 자기 해석의 권리를 되찾아오는 거죠. 이것이 일차적일 것 같아요. 그리고 기존 종교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해야 하겠지요. 이 두 가지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본래의 종교가 회복되지 않을까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보면 예수가 찾아오자 대심문관이 기겁을 하잖아요. 그래서 “빵만 주면 된다”고 하면서 제발 가라고 하죠. 본래 자리를 배반해버린 자들이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식은 똑같다고 봐요. 기존의 악덕에 찬 시스템에서부터 모든 지원을 철수시키는 겁니다. 끊어버리는 것이죠. 빠져나오는 것이죠. 나쁜 신문 안 보고 나쁜 방송 안 보는 식으로 빠져 나오고, 빠져 나오므로 해서 기존질서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것이죠. 저는 이런 일이 압축적으로 벌어지는 현장이 선거라고 봅니다.


도법 가톨릭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한가요?


김인국 빠져 나온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도법 어디서 있었어요?


김인국 프로테스탄트가 빠져나왔잖아요.


도법 그럼 또 다시 빠져나가야 해.(웃음)


김인국 끊임없이 빠져나감으로 주류를 흔들고 무너뜨려야 해요. 스님, 정토회 모델은 어떻습니까. 대놓고 뭐라고는 안 하겠지만 조계종단이 정토회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법륜스님이 조계종에 있었다면 지금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도법 못하지!


김인국 승적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모델을 마련한 법륜 스님이 결국 조계종단을 살린다고 봐요. 


도법 그럼요. 나는 현 체제의 종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논리에서 이의가 없어요.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게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거죠. 간디의 독립운동의 성격이 뭐에요? 물레질이었잖아요.

김민웅 물레가 영국이 지배하는 산업 시스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었죠.


도법 당시 상황에서는 영국 제품의 옷을 사 입으려면 인도 민중들의 몇 달 월급을 들여도 사 입을까 말까 했어요. 간디는 요즘 말로 자본주의와 싸움의 무기로 물레를 들고 나온 거잖아요. 물레란 뭡니까? 인도의 자원, 인도의 노동력, 인도의 기술로 자기 옷을 스스로 해결하는 거잖아요. 영국제품을 안 사 입으니까 영국 옷 장사들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겠죠. 이것은 가장 강력한 싸움이죠. 하지만 한 두 사람이 나서서 될 일은 아니잖아요. 다수가 되어야 효과를 보는데 독립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독립 운동의 핵심에 서 있는 지도부가 물레질을 선택했으니까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우리의 현실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한다면 무슨 수로 빠져나올 수 있겠느냐는 거죠. 저도 조계종단 안에 들어가서 꼭 무언가를 해야 불교가 구원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현재의 불교를 그냥 살리자는 차원도 아니고, 이것을 깨부수든 새로운 모델로 만들든 하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를 묻는 거죠. 불교의 고고한 수행자들은 좋은 사람이에요. 돈이 많지도 않고, 권력을 탐하지도 않아요.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삶의 현장으로 안 오는 거죠. 


김민웅 그게 문제죠. 자기들 수행에 몰두하시는 것은 좋지만, 그 수행의 목적이란 결국 이 세상을 위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도법 왜 그런 것일까! 불교에는 바람직한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려면 삶의 현장이 아니라 심산유곡으로 들어가서 고고하게 수행을 해야만 된다는, 그것이 불교라는 철저한 믿음이 있어요. 삶의 현장을 도외시한 수행으로 불교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알려 줄 길이 없는 거예요.


김민웅 부처님도 아픔의 현장에서 깨우침의 계기를 얻으셨던 것 아닙니까?


김인국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는 말씀은 어디로 간 겁니까? 여간해서 생각이 바뀌는 법은 없으니 세상과 거리를 두는 수행이라야 제 밥값을 다했다고 믿는 분들은 그냥 그렇게 사시는 수밖에 없어요. 설득한다고 해서 낡은 통념이 돌아서는 법은 없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익히는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대세를 이루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민웅 이것이 수행이다, 라고 오래 생각했던 사람들이 밖에서 역할을 하는 분들을 보고 바뀔 수도 있잖아요.


도법 간디가 미얀마 불교계의 초청을 받아서 가서 법회를 했습니다. 그때 간디는 은둔수행을 정신적 사치라고 비판해요. 간디는 늘 1등으로 현장에 있었던 거예요. 현장 속에서 기도를 했고, 아니 삶이 기도였던 것이죠. 그래서 은둔수행을 강력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한국 불교의 현실이나 관행을 보면 심산유곡에서 조용하고 고고하게 하는 것만이 진짜 수행이라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어요. 은둔수행자들은 권력을 탐하거나 명예와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거부하죠. 주지하라고 해도 안 하고, 종정하라 해도 안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은둔수행만이 진짜 수행이고, 수행자는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거죠. 현재 이게 대세인 거예요.


김민웅 그런 분들이 불의와 마주치면 어떻게 행동하나요?


도법 밖에서는 법륜 스님이 하는 활동이 새로운 불교라고 보죠. 그러나 고고하게 수행하는 사람들? 법륜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웃기고 있네!” 이러는 거죠.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면 문제는 쉬워요. 그냥 욕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착하고 고고한 수행자들이 ‘불교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면 문제가 심각해지죠. 불교 대중들도 그 사람들만 진짜 스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가장 참신하고, 올바르고, 바람직하기 때문에 한국 불교의 희망은 거기에서 나온다고 믿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쳐다보지도 않아.(웃음)


김인국 성철 스님이 살아계셨다면 법륜 스님을 그다지 예쁘게 보지 않았겠지요. 

  

도법 그렇겠죠. 아니, 일정 부분은 인정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렇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불교라는 가치 평가는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조계종단에 중노릇 하러 왔던 사람들 중 “아 저게 진짜구나”하면서 법륜 스님 따라 간 사람 한 사람도 없잖아.(웃음)


대한문 앞에 서있는 이태석 신부


도법 차동엽 신부는 어때요? 유명하던데.


김인국 열정이 많은 분이지요. 여기선 논외로 하고요, 요즘엔 너도나도 이태석 신부님을 찾습니다. 누구라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지요. 그런데 대부분 신부라면 이태석 신부님 같아야지 한다는 겁니다. 용산, 제주 구럼비에 가고, 대한문 옆 쌍용자동차 분향소에 가고 하면 이상하다, 수상하다고 여기는 부류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도법 그것도 똑같은 맥락이에요.


김민웅 대한문 앞에 서 있는 이태석 신부라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거죠. 고통의 현장에 자기를 던지는 것은 동일한 맥락인데.


김인국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천주교회만의 고유 현상입니다. 주교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전국 단위의 신부들의 자유로운 결사체지요. 사제단은 1972년 유신 체제가 탄생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이 체포 구금되면서 전국의 신부들이 들고 일어났지요. 그런데 지학순 주교님이 세상의 불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천주교원주교구가 갖고 있던 원주MBC의 지분을 박정희가 빼앗는 바람에 몹시 화가 나셨다고 합니다. 한 번이라도 당해봐야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지 그러지 않고는 잘 몰라요. 심산유곡의 수행자들도 산이라도 빼앗기고, 세금같은 것은 아니라도 어디라도 한 번 제대로 맞고보면 대번에 일어날 걸요.(일동 웃음)


도법 그 사람들은 세금 엉터리로 두들겨 맞을 게 없어.(웃음)


김인국 총무원이야 다르겠지요. 


도법 그 사람들은 두들겨 맞을 것도, 빼앗길 것도 있어.


김인국 신부들은 뒤늦게 감옥에 들어가서 그곳에 먼저 와 계신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의 학생이나 노동자들을 보면서 반성을 했습니다. 거기서 얻은 깨달음과 거기서 맺은 인연으로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도 현장으로 달려간 거고. 좀 다른 이야기지만 민주화를 위한 사제단의 투신은 선교에도 퍽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사회학자들은 흔히 한국천주교회의 아름다운 성장 요인으로 민주화를 위한 사회참여를 꼽습니다. 그 선두에 사제단이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인데 주교들은 그 점을 외면하고 사제단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열매는 가져가면서 농부의 수고는 무시하는 거지요. 


도법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거야.


김인국 그게 아깝다는 것은 아니고요.(일동 웃음) 제 고민은 사제단 때문에 세상이 한국천주교회를 과대평가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천주교회는 ‘개념 있는’ 교회라고 한다고요. 사제단을 빼놓고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신부들의 사회참여를 보면서 사람들은 천주교회에 호감을 갖게 되고,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면 주교들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엉뚱한 자신감이 생겨서 자정과 쇄신보다 성장에 박차를 가하며 보수적인 입장으로 흘러요. 그렇다고 우리의 본분을 멈출 수도 없고…. 이런 교회에서 탈출하긴 해야 하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네요. 교회는 사실 엄청난 둥지가 되고 안전망이거든요. 


김민웅 도구가 되기도 하고.


김인국 그렇다고 교회를 내려놓고 나올 수도 없잖아요.


김민웅 놓고 나오는 순간 운동의 근거가 사라지기도 하니까.


도법 나오는 것이 해답이 되면 나올 수도 있겠지.


스님 아닌 스님, 목사 아닌 목사, 신부 아닌 신부


김민웅 나온다는 것의 의미가 뭐냐는 거죠. 그것은 신부를 그만두거나 스님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신부나 스님으로서의 신분과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영역에서 움직이기도 하는 모습이 아닐까 해요. 가령 제가 미국에서 목회도 했지만 언론인 생활도 같이 했거든요. 우리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좀 시간이 걸렸어요. 목사님이 그냥 목사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국제 전문가나 언론인으로 한국에 소개가 되니 달갑지 않았던 거죠. 당연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목사님은 본래 저래, 하고 한편으로는 포기하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웃음)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했습니다만, 뭔가 새로운 종교인의 모델을 만들어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 PBS 방송국의 한 유명한 언론인이 있어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소속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UCC(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의 목사이면서 저널리스트였지요.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한 손에 신문, 한 손에 성서를 든 목회자였죠. 현실과 성서를 만나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분은 그걸 삶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통일해내셨더군요. 저는 바로 이런 게 "나온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해요. "나온다"는 것이 주류 세력에게는 일종의 이단이 되는 것이니까. 저널리스트이자 목사로 사는 것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형태를 창출하는 것이죠. 그 안에 있으면서도 그 안에 없는 그런 존재의 역설, 그래서 경계선을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 말이죠. 저는 종교가 지금까지 보아 온 스님이 아닌 스님, 신부님이 아닌 신부님, 목사님이 아닌 목사님을 만들어 낼 책임이 있는 게 아니냐고 봐요. 이것이 지금은 소수파에 비주류이고 주변부에 머무르겠지만 결국은 새로운 형태의 대세와 주체세력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 보는 거죠. 신학교도 목사를 길러내서 교회에만 보내려 들지 말고, 신학 공부한 목사이면서 연출가, 기자, 연기자, 작가, 출판인, 농부, 목수 뭐 많잖아요? 제가 몇 년 전 감리교단의 부탁으로 강화도에 가서 3일 동안 부흥회를 했어요. 지금 입은 것처럼 캐주얼한 복장으로 갔어요. 예배 때에는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을 줄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3박 4일 동안 그렇게 캐주얼 복장을 바꿔가면서 부흥회를 했어요. 처음엔 초청한 쪽에서 당황스러웠을 거에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런 복장으로 간 의도가 있었거든요. 신앙이란 일상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가 입은 옷 자체로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다양한 색깔의 옷을 가지고 갔어요. 우리의 상황과 신앙의 색깔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마지막 날은 핑크 빛을 입었어요. 붉은 색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상징은 무한하니까요. 첫날에는 왜 옷을 이렇게 입고 왔는지 설명을 하니까 신도들이 잘 받아주셨어요. 아닌 분들도 그 중에 계시긴 하셨겠지만, 목사님들도 그 다음날부터 캐주얼로 옷을 바꿔 입고 오셨어요. 나중에는 “아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들 하시더군요. 종교인들의 권위를 세워주는 방식을 허무는 거요. 그렇게 입고 부흥회를 인도하는 데는 제게도 용기가 필요했었어요. 의도치 않게 실례가 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제겐 분명한 이유가 있었어요. 일상 속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야 되니까. 모든 예배 때마다 그럴 순 없겠지만 1년에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그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저는 설교단에만 있지 않고 여기저기 좌석 사이로 움직였어요. 그 분들에겐 생소한 모습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게 예수의 모델이라고 보았어요. 같이 얘기하며 호흡하고, 조크도 나누고 말이죠. 이처럼 기존 종교가 이미 관성화시킨 모델에서 빠져나오는 일들이 번져갔으면 해요. 종교가 일상과 만나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일, 이게 애초에 예수께서 하시고자 했던 말씀이고 사역이 아니었을까요? 일상과 하나님 나라의 통일 말이죠. 


도법 모든 종교에는 자기 경전이 있어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이 오늘처럼 한 자리에 모여서 모든 경전의 언어를 일상의 거룩함을 발견하는 언어로 해석해 보는 겁니다. 


김민웅 그거 좋죠.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바도 바로 그겁니다.


도법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은 접어놓더라도 경전을 일상의 거룩함을 발견하는 언어로 해석하면서 “이것이 진짜 종교”라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거죠.


김민웅 그래서 우리 셋만의 담론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확대된 자리에서 그런 판을 벌여봤으면 좋겠어요. 


도법 그걸 지속적으로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이번엔 성경 주제 하나를 지금 여기 일상의 거룩함을 설명하는 언어로 해석해 봅니다. “이 구절은 일상의 이러이러한 부분들이 갖는 거룩함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모든 경전 중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은 별도로 대책을 갖더라도 말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 삶의 문제를 올바르게 볼 뿐 아니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명되어진 것이 경전이라고 봅니다.


김민웅 좋으신 말씀이에요.


도법 제가 생각하는 구제책은 바로 이거예요. 이런 모임을 갖게 되면 안에서 진지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바깥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김민웅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 판을 키웁시다. 다양한 종교가 참여하면 좋겠고, 종교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발견하는 거룩함의 이야기를 각자의 얘기로 끊임없이 풀어내는 것은 좋은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소설을 가지고, 다른 때는 불교 경전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할 수 있겠죠. 그렇게 하면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이 생각보다 많을 거예요. 탈출이라는 것이 본래의 틀을 깨는 거잖아요. 본래의 틀을 깨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잖아요. 빠져 나올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본래의 틀을 못 깨는 거 아닐까요? 빠져 나온 바로 그 순간 본래의 틀이 깨져나가고 새것이 만들어지겠죠.


도법 화엄 철학자들이 설명한 화엄경에는 깜짝 놀랄 부분이 많이 있어요. 보통은 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고, 부처가 있다고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화엄경은 이 셋을 똑같이 세계라고 그래요. 중생세계, 부처세계, 보통세계. 개별로 지칭하지 않는 겁니다. 부처도 중생도 세계적 존재인 거죠. 모든 것이 개별적이지 않고 사회적인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한 가지는, 보통은 부처 세상은 따로 있고, 중생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쭈글쭈글한 현장으로 봅니다. 그런데 화엄이란 중도적 사유방식으로 보면 똑같은 현장, 똑같은 사람, 똑같은 현장 그 자체가 거룩하다는 거죠. 반면에 일반적 사유방식이랄까 중생적 사유방식으로 보면 분명 부처세계가 다르고, 중생 세계가 다르죠. 중생세계는 돌이기 때문에 부처세계를 찾아가야 한다고 그럽니다. 하지만 중도적 눈으로 보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죠.


김민웅 사람들이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너희들 사이에 있다'고 한 말씀과 지금 스님 이야기가 똑 같아요. 그 존재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거죠. 이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일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고, 부처님 또한 원하시는 것인데 현재의 교회는 교회와 사회를 분리시킨 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거룩한 것이라 말하는 거죠. 중생 세계는 교회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기도 하구요. 바로 여기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고통에서도 우리를 분리시키고 말이죠. 이것은 정치이고, 경제이고, 사회라고 또 종교와 분리시킵니다. 이런 것들이 극복되고 통합적 인식으로 가는 운동을 하려면 아까 각자가 노력하는 부분과 함께 스님이 얘기하신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소중할 것 같아요. 이 정도로 종교 구원 문제는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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