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7)


팔랑리 풍미식당


너덜너덜해질 만큼 로드맵을 손에 들고 다닌 것은 그것이 내가 지닌 유일한 나침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열하루 동안 걸을 길을 지도도 없이, 다른 기기의 도움도 없이 단지 지명이 적혀 있는 인쇄물만을 들고 다니는 나를 걱정 반 딱함 반으로 바라보던 김정권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로드맵을 따라 양구 동면에 있는 팔랑리를 지나게 되었다. ‘팔랑리’라는 지명은 낯설다. 무슨 내력이 있을 것 같아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팔랑(八郞)은 한자로 여덟 팔(八)에 사내 랑(郞)이라 씁니다. 이곳에서 젖이 4개 달린 여자가 4쌍둥이씩 두 번을 출산을 해서 8형제가 태어나서, 모두 낭관(郎官) 벼슬을 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랑리로 불러집니다.>


<조선 중기쯤 함경도에 살던 전주 이 씨인 이학장(李學長)이라고 하는 도사(都事: 관리의 감찰과 규찰을 맡아보던 조선조의 종5품 관직)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오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태백산맥의 골짜기를 더듬어 오다가 양구 동북방 도솔산 남쪽에 있는 지금의 동면 팔랑리(八郞里)에 이르렀다. 이곳 산수가 가히 자기의 뼈를 묻을 만 한 곳이라고 생각한 그는 몇몇 친족들과 함께 여기에 터를 닦고 살게 되었다.


이학장은 여기에 터를 잡고 집도 세웠으나 늘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학장이 허전해 하는 것을 본 이웃 사람들은 “큰 집을 짓고 그것을 혼자 지키니 그럴 만도 하지. 집을 지었으면 아내를 맞아 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이학장에게 처녀를 맞아 짝을 지을 것을 권했다. 이학장은 결국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웃 마을에서 아리따운 낭자를 천거 받아 그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를 맞이한 첫날, 이학장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리따운 아내의 가슴에는 마치 짐승과 같이 네 개의 젖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학장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것도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며 배필이라고 생각하고 젖이 넷 달린 신부를 그대로 맞아 살기로 결심했다. 이학장의 신혼생활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1년이 채 못 되어 이학장의 아내는 아이를 가져 출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몇 해 있다가 또 출산을 했는데, 또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아들 여덟 명을 낳은 것이다. 그제야 이학장은 자신의 아내가 젖이 네 개 달린 수수께끼를 풀게 되었다.


두 부부는 8명의 아들을 정성을 다해 잘 길렀다. 어느덧 8형제는 장성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했으며 무술이 뛰어났다. 어느 해 봄 8형제는 나라에서 행하는 과거시험을 보고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래서 나란히 낭관(郎官) 벼슬(조선조의 6품관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마을은 여덟 사내아이를 낳아 낭관 벼슬을 시킨 곳이라고 해서 팔랑리(八郞里)라고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러지고 있다.>


그만한 사연이 있는 동네 팔랑리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민요도 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팔랑리는 곰취로 유명한 곳인데, 그래서 그럴까 나물 뜯는 노래인 <얼러지타령>이 전해져 내려온다.


돌산령, 달산령 선질꾼이 떴다 재작장이의 공지갈보야 술 걸러 놓아라.

대암산 용늪에 쌓인 눈이 녹거든 임자 당신과 소녀 단둘이 얼러지 캐러 갑시다.

대암산 용늪에 얼러지가 나거든 우리나 삼동세 얼러지 캐러 가세.

돌산령, 명당 구비에 쌓인 눈이 녹거든 당신하고 나하고 얼러지 캐러 갑시다.

대암산 멀구다래가 열거든 우리나 삼동세 멀구 따라 가세.

산천에야 그물은 머루 다래 인간에 그물은 당신이로구나.

돌산령 샛바람이 휘몰아치니 심곡사 종소리 요란도 하구나.

못 살겠구나 못 살겠구나 나는 못 살겠구나 돈 그리고 임이 그리워 나는 못살겠구나.

천질만질을 뚝 떨어져서 살았거든 정든 임이야 떨어져선 나는 못살겠구나.

바랑골 뒷산에 머루 다래 열거든 당신하고 나하고 머루 따러 갑시다.

산수갑산에 다랑칡은야 얼그러설그러졌는데 당신하고 나하고 언제나 얼그러설그러지느냐.

어스름 달밤에 백우산을 받고서 요리가자 조리가자 날 호리는구나.

무정한 기차야 말 실어다 놓구서랑 고향 실어줄 줄은 왜 날 몰라주나.

요놈아 총각아 손목을 놓아라 물같은 손목이 얄크러진다.


팔랑리는 지나가는 곳인데, 로드맵에는 팔랑리를 그냥 지나가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풍미식당’(구 한중관)을 꼭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풍미식당을 찾아가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장면이야 어디서든 먹을 수 있지만, 풍미식당에 가면 그곳에만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내가 뽑은 자장면 길이가 휴전선 철조망 길이의 열배쯤 될 것이라던 주인장은 뒷방신세. 며느리가 최전방에 사제 냄새를 올려 보내는 일을 하고 있음.”


풍미식당에서는 망설일 것도 없이 자장면을 시켰다. 제일 맛있는 자장면은 배고플 때 먹는 자장면일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가 먹는 자장면이었으니 그날의 자장면은 최고의 맛이었다. 후룩 후룩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자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사실 풍미식당을 찾으면서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자장 맛이 아니었다. 자신이 뽑아낸 자장면 면발의 길이를 휴전선 철조망에 빗댄 뒷방신세 영감님을 뵙고 싶었다. 그분의 얼굴에 배인 세월의 흔적을 마주하며 그동안 수고하셨다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또한 시아버지의 솜씨와 마음을 잇고 있는, 그래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게 여겨지는 며느리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었다.


자장면을 먹고 나오면서 계산대에 있는 할머니께 풍미식당을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잘 계신지 근황을 여쭸다. 그러자 할머니는 선뜻 대답을 못하시고는 이내 두 눈이 먼저 젖어들었다.


“어쩌지요, 남편은 지난해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손님이 여간 고맙지가 않은데 할아버지는 안 계시니, 그런 고마움을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대신하려는 듯 할머니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돌아가시던 날도 산에 가서 나무도 해오고, 자장면도 70여 그릇을 손수 만들어 팔았는데, 그렇게 정정했는데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뽑은 자장면 길이가 휴전선 철조망의 열 배쯤 될 것이라 했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당신이 일손을 놓을 때쯤엔 철조망도 거두어지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어가던 할머니가 생각이 났는지 주방에 있는 며느리를 불렀다. 할머니는 내게 들었던 이야기를 며느리에게 했고, 이야기를 들은 며느리는 목이 메는지 이내 숙연한 표정이었다.


시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고 풍미식당을 소개해준 사람이 고마웠기 때문일 것이다, 며느리는 풍미식당을 소개한 분의 이름을 물었고, 메모지에 그 이름을 적었다.


휴전선 철조망 길이의 열배나 되는 자장면을 뽑아내던 할아버지는 훌쩍 이 땅을 떠나고 지금이야 며느리가 그 일을 잇고 있다지만, 과연 풍미식당 자장면 사제 냄새는 언제까지나 최전방 고지로 퍼져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팔랑리나 그 인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풍미식당을 찾아가 자장면을 맛보시기를 권한다. 자장면이야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지만 오직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고,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며느리가 있는 곳이니 얼마든지 들를 만하다 싶다.


한 가지, 풍미식당을 찾을 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식당은 아침 11시에 문을 연다. 일찍 간다고 대충 받아주지 않는다. 음식 준비를 제대로 한 뒤에야 손님을 맞으려는, 그 또한 할아버지가 남긴 미더운 고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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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7)


왜, 지혜의 낙관적 기대를 무너뜨리는가?


지혜는 유산처럼 아름답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전도자)은 지혜의 가치와 유용성을 말하고 가르치는 지혜 선생이다(전도서 12:9-10). 그에게 지혜는 유산처럼 아름답고, 돈의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유익하다. 지혜를 소유한 자는 생명까지 보호받는다(7:11-12).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라

(7:11-12, 개역개정)


코헬렛이 지혜의 가치를 돈과 비교하니 이 보다 더 적나라할 수 있을까 싶다. 이 말은 잠언의 지혜처럼, 지혜의 오른 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와 명예가 있다(잠언 3:16)라는 지혜의 실용적인 맥락과 일치한다. 게다가 지혜를 얻은 자에게 지혜가 생명나무가 된다(잠언 3:18)라는 이스라엘 지혜 전통과도 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5:10)라는 가시 박힌 말도 거침없이 한다. 동시에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10:19, 새번역)라며 돈에 대한 솔직한 관점도 주저하지 않았다. 코헬렛이 돈의 전능성을 말한 것인가? 아니다. 돈은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재화다.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서 돈의 가치를 평가한 말이다. 필요를 채우는 효용가치를 생각한 것이지, 돈을 필요 이상으로 절대화 시켜 돈의 만능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현대사회에서 돈은 요술방망이 같은 환상과 성공의 잣대다. 지금 우리는 자본의 힘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자본 만능의 시대를 산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의 유익을 말하면서도 지혜의 유익에 빗대어 지혜의 가치를 더 옹호했다(7:12). 돈이 주는 유익이 있지만 지혜만큼은 아니다. 돈은 결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엎어진 지혜의 기획

코헬렛은 지혜와 돈이 삶의 은신처가 될 수 있지만, 돈이 지혜의 탁월성을 대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렇게 그는 주류 지혜의 전통과 결별하지 않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흑과 백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는 사람의 지혜로운 행동이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틈을 관찰했다. ‘지혜’는 ‘전쟁 무기’보다 강하지만(9:18),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지혜가 힘보다 좋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9:16, 개역개정)


인생은 우리의 기대처럼 호락호락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코헬렛은 전통적인 지혜의 생각, 곧 지혜가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보편적인 기대에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틈을 생각했다. 주류 지혜전통으로 통하는 잠언에서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을 가진 자는 힘을 가질 수 있다(잠언 24:5)라고 했지만, 코헬렛은 그 맥락을 이어가면서도 거기서 벗어난 다른 측면을 관찰했다. 그는 지혜가 가져올 유익과 기대를 꺾는 반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지혜 전통과 현실 사이의 괴리, 곧 지혜의 기획까지 엎어버리는 지혜의 역설이다.


전통 지혜의 가르침은 ‘지혜’와 선(善)을 동의적 개념으로 여기지만, 코헬렛이 보기에 지혜의 가치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지혜가 전쟁 무기 보다 좋다

그러나 죄인 한 사람많은 을 무너지게 한다(9:18, 필자의 번역).


코헬렛은 많은 선을 무너지게 만드는 죄인 한사람의 파괴적인 힘과 착함의 무력함까지 콕 찍어 말했다. 착함의 무력함처럼 무기보다 좋은 지혜가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은 하찮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10:1, 개역개정).


변변치 않은 어리석음이 지혜와 영광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니. 지혜가 탁월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어리석음과 죄의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다. 코헬렛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중화된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지혜의 낙관적 기대를 전복시켰다.


왜일까. 어쩌자고 코헬렛은 우리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기대를 격파하고 들어오는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지나치게 떠받들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귀중한 것을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뜻인가? 끝내 코헬렛은 지혜의 우수성을 의심하는 것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7:16, 개역개정).


코헬렛은 먹고 마시며 노동 안에서 즐기는 일상의 가치를 드높였지만, 그의 말에는 일상의 지식을 뛰어넘는 통찰이 있다. 지혜조차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을 관찰한 그는 수립된 전통적인 체계들을 계승하면서도 대중화된 지혜의 가치와 배움을 해체시킨다. 나는 그에게서 치열하게 관찰하고 사유하는 자유를 배워간다. 인생길은 오르막과 내리막, 슬픔과 기쁨의 양극적인 사태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3:1-8) 형통한 날은 즐거워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면 된다(7:14). 안달복달하며 발버둥 칠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코헬렛은 지나치게 지혜롭지 말라며 극단을 피하는 자세를 논했다. 인생의 기복에 의연해지기를 바라는 코헬렛이 ‘지나침’을 경계하며 축적된 지혜 경험의 한계, 곧 지혜의 불확실성을 말한 것이다. 보고 또 보고 묻고 또 묻는 그였지만, 누적된 온갖 지혜의 성과들을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다. 그러니 광대하고 아득한 ‘미지’의 영역, 곧 ‘영원’을 말했을 터(3:11). 이것은 온갖 지혜와 지식에 관한 한계 인식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허함을 터득하는 창문이며 통로다. 하여 지혜의 야심찬 기획마저 무너뜨리는 그의 말들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마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준엄한 뜻의 권고다.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여기하십니까?》 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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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6)


‘화’와 ‘소’



끝을 안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 얼마만큼을 견디면 주어진 시간이 끝날 지를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말로 힘든 것은 끝을 모르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보다는 때를 짐작할 수가 없다는 것, 우리를 지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다.


2995m가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는 거지, 돌산령터널 앞에서도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터널은 만만치 않았다. 길어도 정말 길었다. 심호흡을 길게 한다 생각하면 빠져나가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가도 가도 제자리다 싶었다. 중간에 만들어놓은 차량 대피소를 몇 차례나 지나야 했다. 터널 끝 출구로 보이는 하얀 점은 커지지도 않았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아, 내가 걸어가는 만큼 뒤로 물러서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길을 걸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하늘도 그랬고 나무도 그랬다.



해산을 떠나 돌산령터널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지쳤던지라 그야말로 터널 속을 터덜터덜 가고 있는데,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내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뭔가가 눈에 띄었다. 눈여겨보니 ‘화’라는 글자였다.


이게 뭐지 싶었다. 왜 이 글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일까, 이런 것이 소위 화두(話頭)라는 것, ‘화’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뜻일까 싶었다.  


걸어오면서 드리고 있던, 태어나서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을 위해 드리던 기도를 잠시 멈추고 우연처럼 만난 글자 ‘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이끄시는 그 분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을 터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마음속의 ‘화’였다. 내 마음속에도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분노(anger)들이 있다. 모두 거룩한 분노는 아니다. 잡다한, 어리석은 분노도 있다. 내 맘에 ‘안 드는’ 것은, 내 속이 ‘좁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말씀하신 ‘멸망의 자식’(요17:12)이 떠오르니,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和’도 떠올랐다. 하나 됨에 대해 생각했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걸까, 큰 숙제처럼 다가온다. ‘和‘는 벼 화’(禾)에 ‘입 구’(口)가 합해진 글자, 곡식을 함께 경작하여 함께 먹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일까? 함께 심고, 함께 가꾸고, 함께 먹는다면 화목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중의 무엇 하나가 빠지든지, 누군가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니 갈등이 빚어지는 것이겠지…. 


‘花’도 떠올랐다. 꽃처럼 산다는 것은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머잖아 진다는 것을 알기에 피어있는 순간을 절정으로 삼는 것. 남에게 보일 때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이 될 때가 아름답다는 것. 망초가 장미 흉내를 낼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모습으로 설 때가 자연스럽다는 것….


나도 있어요, 끼어들 듯 ‘貨’도 떠올랐다. 재물에 대한 생각은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는 테르스 테겐의 시로 대신했다.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 탁 터져서 장비 없이 빈손으로/ 많이 모은 소유는 우리 동작에 발꿈치에 무거울 뿐/ 원하거든 쓰러지도록 소유하라/ 우린 버리고 가리라/ 적은 것을 사랑하며/ 부득이한 것만을 한 손에 움켜쥐고.”


그래,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살자!

 

 

 

무시무시한 구호가 적혀 있을 것 같은 군부대 담장에도

얼마든지 따뜻한 글과 그림이 담겨 있었다.

 


‘화’에 대해 생각하며 걸은 걸음이 제법이다 싶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빛의 출구는 저 멀리 아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바닥에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가 내가 걸어갈 길을 알고 미리 앞서가면서 뭔가를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하나의 숙제를 마쳤더니 또 하나의 숙제가 주어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소’였다. 문득 짐작이 되는 것이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짐짓 물리고 다시 ‘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 단강에서 썼던 ‘소’가 떠올랐다. 


“소는 착해요/ 불쌍하게 착해요/ 질긴 침 질질 흘려/ 논밭을 갈고/ 싫단 말 한번 없이 험한 밭 갈고/ 쉬는 시간/ 여물을 꺼내 씹고/ 혓바닥 아프게 핥아준 귀여운 새끼/ 겅중 송아지/ 어디 멀리 팔아도/ 이틀 울음뿐/ 나머진 속울음/ 그러다가 마지막 죽어 고기로 남는// 소의 두 눈엔/ 엄마가 보여요/ 껌벅이는 두 눈 속엔 엄마가 있어요” 


소의 걸음, 소의 눈매, 우직하고 미련한 소 같은 삶을 생각했다.


‘자연스레 ‘小’와 ‘少’가 떠올랐다. 작음과 적음, 작아짐과 낮아짐과 떠밀림과 잊힘을 견디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단단해져야 하는 걸까를 생각했다.


‘笑’가 떠오르는 순간, 딸 소리가 떠올랐다. 첫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笑里’라 지었다. 너 사는 마을에 너로 하여 웃음 넘치기를, 그런 축복의 마음을 담았다.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집갈 때까지 끼고 살아야지 했던 것과는 달리 소리는 지금 독일에서 지내고 있다. 독일에서 목회를 마치고 귀국을 할 때 소리가 고3, 한창 부모의 배려와 격려가 필요할 때에 동생 둘을 맡기고 귀국을 했으니 아비로서는 참 모진 선택을 한 셈이다. 두고두고 미안한 일, 아이들 보고 싶은 마음이 와락 밀려들었다.

 

 

 

혼자 길을 걷다 보면 뭔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일들을 만나고는 했다.

 


 

터널 속에서 만난 ‘화’와 ‘소’라는 글자. 짐작이 되는 것이 있었지만 끝내 ‘기’나 ‘전’이라는 글자를 만나지 못한 것을 보면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화와 ’소‘이기에 길을 걸으며 그것을 생각하라는 그 분의 뜻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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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5)


해안(亥安)


‘해안’이라는 지명은 낯설었다. 오히려 ‘펀치볼’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땅인데도 영어로 된 이름이 더 친숙한 아이러니라니!


‘펀치볼’은 6.25전쟁 당시 미군 정찰병들이 해안의 특이한 지형을 보고는 과일 화채를 담는데 쓰이는 ‘Punch Bowl’과 그 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별명처럼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해안을 떠나며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그곳이 왜 펀치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를 한눈에 이해하게 되었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채 그 안에 펼쳐진 드넓은 땅, 펀치볼은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놓인 빈 그릇 같았다.


‘해안’이라는 이름의 뜻도 뜻밖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곳을 가리키는 ‘海岸’이 아니었다. 실제로 ‘해안’에는 어디에도 바다와 맞닿은 곳이 없어 ‘海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다.


‘해안’은 ‘亥安’이라 쓰고 있었는데, ‘돼지 해’(亥)에 ‘편안할 안’(安)을 합한 말이었다. 이름이 ‘亥安’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고 한다. 분지로 이루어진 그 지역엔 유독 뱀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뱀의 천적이 되는 돼지를 많이 키우게 되었는데, 돼지들이 그 많던 뱀을 잡아먹고 나서야 그 지역이 안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亥安’이라니, 이야기를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화채 그릇 모양으로 둥근 산이 둘러싼 해안, 그 그릇이 얼마나 큰지 감자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해안에서는 두어 가지 마음에 남을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안보건지소 직원들의 친절을 잊을 수가 없다. 원통에서 동행한 김정권 형은 그날 서울로 올라가야 해서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길을 떠났고, 다시 나만 혼자 남았다. 마침 해안에 도착한 시간이 보건소가 문을 닫기 전, 서둘러 보건소를 찾았던 것은 발 상태 때문이었다. 물집 잡힌 것이 여전하여 앞으로 걸어갈 길이 걱정이 되었다.


배낭을 멘 채 지친 모습으로 들어섰기 때문일까, 훅 풍기는 땀 냄새 때문이었을까, 늘 보던 익숙한 주민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보건소 직원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왔는지를 물었다. 잠시 상황을 설명하며 발에 잡힌 물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보건소 직원은 순간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건소를 담당하는 공중보건의가 출타 중이어서 규정상 자신들은 진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려 하자 잠깐 기다려 보라 하더니 이내 시원한 음료부터 가져다주었다. 과일즙을 희석시킨 음료가 참 시원하고 개운했다. 이번에는 다른 직원 한 분이 압박붕대와 폼 드레싱을 찾아 전해주었다.


의자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동안 그들은 내게 왜 길을 걷는지를 물었고, 걷는 이유를 말하자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무엇이 나를 목사로 보이게 했을까?


“어떻게 알았어요?” 하자


“실은 우리도 크리스천이랍니다.” 하면서, 비무장지대를 따라 걸으며 기도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게 짐작을 했노라고 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지만 잠깐 사이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두 직원과 나누는 대화는 미덥고 즐거웠다.


보건소에서 나와 보건소로 가면서 본,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던, 주인이 멀리 나가 있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모텔 앞으로 와서 주인이 올 때를 기다리며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는데, 조금 전에 만났던 보건소 직원이 급히 그곳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모텔을 하는 분과 통화를 했는데, 식당 뒤편에 있는 문이 열려 있답니다. 그러니 식당에 들어가서 편히 쉬며 기다리라 해서요.” 알고 보니 2층 모텔과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의 주인이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나그네 된 입장에서 보자면 해안보건지소의 두 여직원은 천사처럼 친절했다. 지나가는 지친 길손에게 그들은 의무 이상의 배려를 전해 주었다.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붓꽃이 맘껏 피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안을 떠나 양구를 향할 때였다. 돌산령터널을 향해 걸어가다가 ‘펀치볼 야생화공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눈이 모자랄 만큼 드넓은 땅에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노란꽃창포가 눈길을 끌었고,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붓꽃이 맘껏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양구군 해안면은 토지 경사도가 높고 마사토가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다가 토질은 모래와 모래 진흙으로 되어 있어 겨울이 지나며 언 땅이 녹을 때나 많은 양의 비가 올 때면 다량의 흙탕물이 발생하여 하천 생태계의 오염이 심각했다고 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군에서는 토사 유출의 방지를 위해 피복력이 강한 향토 야생화와 토양을 덮어 풍해나 수해를 방지하여 주는 지피식물 (地皮植物)을 집단으로 재배하기로 한 것이었다. 야생화 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생태계를 보존하고 수질을 개선하는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시도한 것이었으니, 그런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토사 유출과 흙탕물 방지를 위해 만든 것이 야생화공원이라니, 그런 생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맞다, 많은 경우 꽃은 좋은 대안이다.


야생화 단지를 바라보며 길을 걷고 있자니, 망초 꽃이 가득 피어난 구역이 눈에 들어온다. 망초 또한 넓은 땅에 무리지어 피어나니 마치 안개꽃처럼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순간 드는 생각, 야생화공원에서 일부러 저곳에 망초를 심었을까, 그냥 방치한 땅에 망초가 피어난 걸까, 하긴 망초도 야생화이니 얼마든지 저 자리를 차지할 권한이 있는 꽃인데…, 그러다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흔한 꽃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 일부러 그곳에 심은 거라고.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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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4)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펀치볼은 그 옛날 운석이 떨어져 생겼다는 설과 차별침식분지라는 설이 양분합니다. 전 노아의 홍수 지구 재편 때 만들어진 하나님 작품이라고 주장합니다. 해질 무렵이면 그분이 빚은 작품을 만난다는 기대도 격려가 될 겁니다.”


함광복 장로님이 그렇게 표현했던 펀치볼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처음부터 긴 팔 옷을 입고 나선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조금만 가면 돌산령터널이 나오는데 돌산령터널 안은 한 여름에도 추우니 꼭 긴팔 옷을 챙겨 입으라고, 전날 보건지소에서 만난 마을분이 일러준 말을 너무 고지식하게 따른 결과였다. 바람막이 긴팔 옷은 이내 땀에 젖고 말았는데 그러면서도 터널이 금방 나타나겠지 싶어 옷을 벗지 않은 채 걸음을 이어갔으니, 역시 모르면 모르는 만큼 고생을 하는 것이었다.


금방 나온다고 했던 터널은 한참을 걸었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먼 길을 걸어서야 터널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터널로 향하는 길 바닥에는 파란색으로 그려진 자전거 길이 있었는데 자전거 길을 따라 나란히 달리는 것이 있었다. 철조망이었다. 저것이 악보를 적는 오선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철조망에는 음표 대신 ‘지뢰’라는 경고판이 같은 음으로 매달려 있었다. 파란색 자전거길 표지와 붉은색 지뢰 표지,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그렇게도 평화와 위험이 가까이 공존하고 있었다.


해안에서 양구로 가는 길목,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일러주듯 돌산령터널은 참으로 길었다.


돌산령터널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도솔산을 옆으로 끼고 해안과 양구를 잇는 터널이었다. 돌산령터널과 도솔산전투 또한 파란색 자전거길 표지와 붉은색 지뢰 표지만큼이나 역설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돌산령터널 입구까지 오느라 땀은 가득하고 숨은 벅찼지만 곧장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길을 걸으며 정한 원칙 중의 하나는 고개를 만나면 아무리 힘들어도 고개를 넘은 뒤에 쉬자는 것이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면 다시 일어나 걸을 때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었다.


터널 안엔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가장자리로 사람이 걸어갈 만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일반도로에서 그랬듯이 터널 안에서조차 사람이 걸어갈 길이 따로 없으면 얼마나 위험할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도로보다 조금 높은 곳에 일정한 크기의 콘크리트 덮개가 이어져 있었다. 덮개는 걸을 때마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차 한 대만 지나가도 터널 안에 엄청난 공명이 생겨 마치 거대한 터빈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괴롭기가 여간 아니었지만, 그래도 터널 안에 보행자 통로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 여겨졌다.


돌산령터널의 길이는 2995m, 꼭 5m 모자라는 3km였다. 말이 3km지 터널 속을 그만큼 걸어간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반대편에 하얀 작은 점 하나가 보이는데 출구지 싶은 그 희미한 점은 가도 가도 여전히 같은 크기를 유지하며 가까이 다가오지를 않았다. 어둠의 터널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지를 돌산령터널은 터널 속을 걷는 내내 생각하게 했다.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준 정장로님.


지루하다 싶을 만큼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또 걸으니 어느 샌가 저 끝으로 하얀 빛의 동그라미가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눈을 의심할 만한 일이 생긴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터널 맞은편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역광이기도 했지만 혹시 내가 환영을 본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은 그동안 길을 걸으며 길을 걷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처럼 길을 걷는 사람이 있구나, 그 사람을 터널 안에서 만나다니, 기가 막힌 인연이다 싶어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인사라도 나눠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터널 안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다.


“목사님…!”


순간 얼어붙는 줄 알았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둠 속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이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 양 옆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는 맞은 편 사람은 저벅저벅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나를 향해 걸어온 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성지교회 정 장로님이었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장로님은 빼앗듯이 내가 메고 있는 배낭을 벗겨 자신이 메고는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랬을까,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장로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싶었다. 엉엉 울고 싶었다. 두 눈이 금방 흐려졌다.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터널 밖에는 장로님의 부인 김 권사님이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님 내외는 새벽 일찍 길을 떠나 내가 걷고 있겠다 싶은 길을 짐작하며 역(逆)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제법 먼 길을 왔다 싶은데도 내 모습이 보이질 않자 펀치볼 입구인 돌산령터널까지만 가보고, 그래도 보이질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했단다. 그런 마음으로 돌산령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는데 누군가 터널 속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는 것이다. 걷는 모습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하긴 터널까지 오느라 힘을 소진한 상태였으니 걸음이 힘찼을 리는 없을 일이었다. 내 모습을 확인한 두 분은 터널 끝으로 나가 차를 유턴하여 반대편으로 온 것이었고, 길가에 차를 세워둔 뒤 장로님이 터널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반갑고 고마운 만남이 세상에 어디 흔할까? 일어난 일이 비현실적이다 싶어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권사님은 차에 챙겨온 이것저것 먹을 것을 꺼내주셨고, 우리는 길가 바닥에 앉아 드문 만남이 주는 은총을 마음껏 누렸다.


길을 걷다 쓰러지면 안 된다고, 앞서간 권사님이 정한 식당은 토종닭 백숙집이었다.


그날 장로님은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같이 걸었다. 권사님은 우리보다 앞서가며 식당을 예약하는 등 선도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차를 운전하는 권사님이 여전히 목사의 배낭을 대신 메고서 걷는 장로님께 배낭을 차에 싣자고 했다. 차 뒷자리에 싣고 빈 몸으로 걸으면 훨씬 편하게 길을 걸을 수 있으니 나도 그러자고 했는데, 장로님은 배낭 안에 큰 보물이라도 있는 듯 고집을 부렸다. 지지 않아도 될 배낭을 종일 메고서 걸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런 모습이 보물이었다.


그날 나는 장로님을 통해 짐을 함께 진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짐이 무엇인지 짐을 어떻게 벗을 수 있는지 말로 하는 것도 아니었고, 짐을 진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혹은 함께 편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짐을 나누어지는 것, 그러느라 함께 땀을 흘리는 것, 그것밖엔 없었다.


길고 지리한 돌산령터널, 내 배낭을 대신 메고 앞서 걸어가는 장로님의 뒤를 따라 터널을 빠져나올 때, 내가 빠져나온 것은 돌산령터널만은 아니지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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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6)


전도서에서 말하는 노동은?


종교인의 세금납부 의무를 2년 유예시키자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법안 발의를 주도한 국회의원들이 모두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종교인의 세금납부 정당성과 찬반문제를 논하기 전에 교회 공동체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수고하는 이른바 ‘목회’ 혹은 ‘교회사역’이 노동의 영역인가를 정의하는 제도권 교회의 내부적인 합의가 우선되어야겠다. ‘목회’가 ‘노동’으로 간주되면 그 대가로 발생한 소득 때문에 목회자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납부의 의무를 이행해야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몸을 움직여 일하여 필요한 물자를 얻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노력과 수고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목회활동은 노동의 영역인가? 기독교의 삶의 표준인 정경으로서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지만, 전도서가 이 노동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로운 가르침을 준다.


교회 사역과 노동 사이에서

전도서는 저세상이 아니라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 가르침의 강조점이 구원역사 보다 창조질서와 보편적 삶의 실천적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창조와 우주질서의 의미,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 곧 시장과 거리, 광장,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일상의 문제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은 코헬렛(전도자)에게 중요한 관심사다. 왜냐하면 노동은 창조자 하나님을 닮은 인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지만, 땅의 짐승들과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노동 행위로 창조되었다. 땅에 충만하여 땅을 돌보아야 하는 창조명령을 받은 인간에게 노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사명이다(창세기 1:24-28).


그러나 첫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노동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3:18-19). 땅과 흙에 기반을 둔 사람의 고된 삶의 현실을 관찰한 코헬렛은 자신의 다양한 담론 전개를 위한 화두로서 ‘노동’의 문제를 제기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3, 개역개정).


여기서 “수고”로 번역된 말은 ‘노동’이다. 히브리말 ‘아말’은 노력, 고생, 수고, 일, 노동을 일컫는다. 코헬렛이 즐겨 사용하는 ‘해 아래’ 라는 말과 함께 인류의 온갖 노동과 관련된 현상들을 포함시켜 노동의 “유익”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유익”으로 번역된 ‘이트론’은 구약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은 전도서에만 유일하게 반복 사용된 경제적인 용어다.


구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전도서는 노동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다. 코헬렛은 사람이 먹고 마시고 노동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2:24; 5:18; 9:9)라는 말을 반복하며,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죽음이 있으니 사는 동안 힘을 다해 노동할 것을 권한다(9:10). 그렇게 그는 먹고, 마시며, 노동하며 사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드높인 지혜 선생이다.


그러면 ‘목회’는 노동인가?

목회는 노동이다. 이 말이 낯설게 들리겠지만, 땅 위에서의 모든 종류의 노동은 생존을 위해 양식과 자원을 얻기 위한 행위다. 물론 이 말은 경제적인 측면이 고려된 광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코헬렛의 노동의 관점을 따라가 보면, 노동은 단지 생존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관계된 일이다(2:24; 3:13; 3:22; 5:18; 8:15; 9:9).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와 노동, 에덴 정원 관리인으로서 경작을 책임지는 노동과 애정 어린 돌봄을 수행할 사람의 이야기(창세기1-2장), 그리고 전도서에서 말하는 노동은 창조신학적인 관점에서 숙고해야할 신학적인 문제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노동을 “인간 내면의 기쁨과 세상 저변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목회자의 목회활동 역시 세상의 필요와 기쁨이 만나는 노동이다. ‘목사’는 하나님과 교회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한 개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기쁨으로 수행하겠다고 선택한 직업이다. 목회자의 일은 생존과 연결되었지만, 그 수고로움과 노동을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교회의 부름에 응답했다면,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목회자는 목회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문제를 해결한다.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는 무보수의 자원봉사가 아니라 전문성을 인정받은 수고, 곧 정신적 육체적 노동 행위에 따른 보상인 셈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제도권 교회는 목회자가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심방하고, 복음 전도하는 일련의 목회 활동을 평신도의 세속적인 노동과 구별하여 특권화 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핵심가치 중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생존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직업을 예리하게 구분했는가? 우리가 만일 이 지점에서 교회 사역을 노동이 아닌 특권화한 ‘사역’으로 간주하고, 일반적인 노동과 구별하여 성과 속의 영역으로 나눈다면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 아닌가? 목회와 노동 사이의 분명한 개념정립을 하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측면에서 나쁜 사례들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목회자를 ‘성직’이라는 미명아래 목회 ‘훈련’과 거룩한 ‘사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쉼을 허락하지 않는 노동력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서슴지 않는 목회자들 사이의 악한 관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묻고 싶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세의 천국을 소망하는 것만이 복음적인 삶인가?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새번역 주기도문; 마태복음 6:10)라고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서 다양한 직업으로 노동하며 살아간다. 때문에 신자들의 다향한 직업과 노동처럼 목회자의 ‘교회사역’도 노동이다. 신자의 세속적인 직업과 목회자의 교회사역은 동등하게 신성하다.



노동은 삶의 기쁨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촉진제

만약 우리가 목회자의 교회사역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동 자체를 천시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이 자리 잡은 것인지 모른다. 또한 목회자의 교회사역을 노동이라고 말할 때, 목회자는 ‘성직’으로 특화된 계급이 아니라 모든 신자와 더불어 동등하게 제사장적인 소명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을 완수하는 것 아닐까. 코헬렛은 먹고, 마시고 노동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밝혔다(2:24; 3:22; 5:18-19; 8:15).


때로는 노동의 유익과 가치를 보상받지 못하는 부조리하고 불편한 현실과 부딪히곤 하지만, 전도서의 가르침처럼 노동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사건들과 연결하여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노동은 신성한 사건이다. 그러하여 노동은 신학적인 문제요, 각 사람의 생존과 기쁨을 위한 삶의 문제요, 사회를 건강하게 존속시키는 기반으로서 사회적인 문제다. 노동은 단지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잠재력 발휘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촉진제가 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하늘 아래서’ 행하는 갖가지 ‘노동’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거룩한 일이 된다. 이것이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모든 신자의 ‘사명’ 아닌가.


김순영/《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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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3)


이 땅 기우소서!


산은 말없이

길을 품고

길은 말없이

산을 넘느니

좋은 벗 좋은 길

좋은 벗 좋은 길


-‘동행’


매해 여름이 되면 부산 <기쁨의 집>에서 주최하는 독서캠프가 열린다. 책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만남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2박3일 시간을 함께 보낸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소한 것에 감탄하고, 별 것 아닌 것에 웃음과 눈물이 터지는, 따뜻하고 진지하고 맑은 모임이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를 하고 있는데, 몇 해 전 모임을 가질 때였다. 모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모임을 마치는 날 ‘동행’이라는 짧은 글 하나를 썼고 노래꾼으로 참여한 박보영 씨가 곡을 붙였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어렵지 않게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은 가사와 곡이 단순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행’의 의미를 서로가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나흘째 되는 날,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함께 길을 걸을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전날 밤 김정권 목사님이 찾아 왔다. 길을 떠나며 몇 몇 분들에게 기도 부탁을 할 겸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둔 형이 하루라도 같이 걷고 싶다면서 먼 길을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길을 걷는 일정 동안 형이 유일하게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이라고 했다.


정권 형은 지금 영월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수요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영월에서 떠나 원통으로 달려왔다. 어둔 밤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형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을 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다음날 일정을 위해 시간을 아꼈다. 형과 둘이 한 방에서 같이 자는 잠, 피곤한 내가 코를 심하게 골아 형이 잠을 못 이루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고 말아 그날 밤이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단히 씻고는 문제가 된 발을 처치했다. 발가락은 물론 발바닥에도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으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떠나기 전날 오집사님이 전해준 약품을 꺼내 할 수 있는 모든 처방을 다했다. 걷기 초반에 탈이 나면 안 된다 싶었기 때문이다. 두툼한 폼 드레싱을 통째로 발바닥에 깔고 압박붕대로 칭칭 감은 뒤에 양말을 신었다.


오늘 걸어야 할 구간은 원통에서 시작하여 양구 해안, 펀치볼까지다. 함장로님이 적어준 로드맵에는 30km로 되어 있지만 이틀간의 경험에 의하면 그보다는 분명 더 먼 길을 걸어야 할 것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아는 이는 다 아는 익숙한 말이다. 오지 중의 오지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입대를 해서 인제나 원통으로 배치를 받으면 마치 땅 끝으로 배치를 받는 느낌이 들었던, 바로 그 원통 길을 걸어서 가게 된 것이다.


곳곳에 탱크로 된 조형물이 있었다. 평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탱크라는 역설.


역시 원통은 최전방 지역이다 싶었다. 지축을 울리며 지나가는 탱크도 여러 대를 보았고, 곳곳에서 총소리도 자주 들려왔다. 탱크가 지나갈 때면 아예 길 밖으로 서너 걸음 피해 있어야 할 만큼 탱크의 위용은 대단했다.


일정 내내 날씨가 비슷했지만 그날 형과 걷는 길은 더욱더 유별났다. 하늘에선 구름을 찾기가 어려웠고 볕은 벌침 같이 쏟아졌는데,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길을 걷는 내내 그늘을 만나기도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혼자라면 훨씬 더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선배가 함께 걸으니 한결 마음이 든든했다. 정권 형은 원통에서 목회를 한 경험이 있어 인근 지리에도 익숙했다. 때마다 길을 묻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지 몰랐다.


땡볕 아래를 걷다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정권 형이 길가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마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후배 목사님이었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가려 하는데, 굳이 점심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다. 아직 길은 멀고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 그런데도 후배의 말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던 것은 그 마을을 지나가면 한동안 식당이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후배가 안내한 식당은 후배 목사님 교회의 교우가 하는 식당이었는데, 길가 바로 옆에 있는 작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최고의 식당이었다. 그날 우리가 먹은 콩국수를 두고 선배는 당신 생애에 가장 맛있는 콩국수였다고 했는데, 그 칭찬이 빈말이 아니었던 것은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문을 한 콩국수는 한참 만에 나왔는데, 식당을 꾸려가는 분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주문을 받은 뒤에야 콩을 갈았다. 그래야 고소함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면발은 신기할 만큼 쫄깃했다. 궁금해서 여쭸더니 직접 반죽을 해서 만든 면발이라고 했다. 팔과 어깨가 아프도록 치대면 그렇게 쫄깃해진다는 것이었다. 면발이 그렇다면 말씀의 깊은 맛은 더욱 가볍게 드는 것이 아닐 것이었다.


그 식당에서 콩국수 맛보다 더 감동했던 것은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콩국수를 정말로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를 드리자, 당신들은 식당을 찾는 이들은 손님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모처럼 찾아온 형제를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저 맘 하나면 되지, 무엇이 더 필요할까 싶었다.


고맙고 든든한 점심을 먹고 다시 나선 길, 도로는 더욱 달궈져 있었다. 도로 위에 계란을 깨뜨리면 얼마든지 프라이가 될 것 같았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어쩌다 그늘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늘 아래로 들어 배낭을 베고 누웠는데,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났다. 쓰러지는 것보다는 고꾸라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아예 잠이 들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고단한 일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벌침 같은 볕 아래를 걷는 것은 순간순간 한계를 경험하는 일이었다. 드물게 그늘이 보이면 그야말로 고꾸라지고는 했다.


그날 기억될 것은 지글지글 가마솥 같던 날씨도,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던 35km 거리도 아닐 것이다. 먼 길을 찾아와 함께 걸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길이 멀고 험할수록 동행은 더욱 든든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갈라진 이 땅 기워달라는 기도가 간절함으로 남은 날이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다. 점심을 먹으며 정권 형이 드린 기도다. 형은 나직한 목소리로 간절함을 담아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갈라진 이 땅을 기우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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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2)


지팡이와 막대기


길을 걷는 동안 내내 한 손에 스틱을 잡았다. 스틱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되랴만, 그래도 짐의 무게를 줄이려고 하나만 챙겨 떠난 스틱이었다.


스틱은 몇 가지 점에서 유용했다. 무엇보다도 안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걸을 때면 자동차가 지나는 쪽 손에 스틱을 잡았는데, 운전자가 길을 걷는 나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역할도 했다. 스틱을 손에 잡았다는 것은 하나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갑자기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를 내가 들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럴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동네를 지날 때마다 짖어대는 개들에게는 유용했다. 묶여 있는 개야 묶인 채로 짖다 말 뿐이었지만, 이따금씩은 풀려 있는 개를 만날 때가 있었다. 개가 볼 때에도 그냥 한 사람이 지나간다는 것과 지나가는 사람의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다는 것은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스틱은 개와 나 사이의 거리를 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짖어대는 개들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는 속담의 의미를 이해하게 했다. 대부분의 개들은 지나가는 나를 보고 짖어댔다.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다는 듯이 짖는 개도 있었고, 그것이 그래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어서 밥값을 하듯 짖어대는 개들도 있었다. 죽어라고 짖어대는 개들도 있었는데, 발자국 소리를 듣자마자 짖기 시작하여 한참을 지나가도록 짖어대곤 했다. 다른 개가 짖으니까 덩달아 짖는 개들도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짖어대는 개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거나 저 스스로가 겁이 많은 개들 아닐까 싶었다. 자기가 겁이 많아 그토록 열심히 짖어대는 것이라 생각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분명히 나를 처음 보는데도 짖지 않는 개들이 있었다. 유심히 내 모습을 살필 뿐 함부로 짖거나 나대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는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들보다는 짖지 않으면서 나를 살피는 개가 오히려 무섭게 여겨졌다.


짖지 않는 개들은 경험이 많아 자기 앞을 지나가는 존재가 자기가 지키고 있는 영역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지의 여부를 금방 파악하고 있다 싶었다. 경계해야 할 때와 경계할 필요가 없는 때를 분간할 줄 아는 지혜와 나설 때와 바라볼 때를 구분하는 용맹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개라 여겨졌다. 김이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고 하지 않는가.


몇 번인가는 길을 걷다가 뱀을 만난 적이 있다. 도로 위로 나왔다가 차에 깔려 죽은 뱀이 의외로 많았다. 한 번은 굵기와 크기가 보통이 아닌 보기 드문 구렁이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뱀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몹시 안타까웠다.


몇 번은 살아 있는 뱀을 보았다. 그 중에는 살모사지 싶은 독사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틱으로 탁 탁 소리를 내어 뱀에게 피할 시간을 주었다. 뱀도 같은 대지에서 살아가는 생명 아닌가. 사람이 뱀을 잡아먹기 시작한 뒤로 들쥐가 많아지고, 그러면서 렙토스피라가 번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뱀은 뱀대로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지키는데 필요한 자기 몫이 있을 것이었다.


스틱을 잡고 걸으니 생각지 않은 유익함도 누릴 수 있었다. 허리의 각도를 유지하게 해 주었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배낭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고,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기가 쉬울 터인데 스틱이 그것이 막아주었다.


도로에 떨어져 있는 것 중에는 못이 많았다. 달리는 차 바퀴에 박히면 어쩌나 싶어 보이는 대로 치워냈다.


스틱의 가장 유용한 소용은 따로 있었다. 도로 위에 떨어져 있는 못을 치울 때였다. 이상하리만치 도로에는 많은 못이 떨어져 있었다. 한 뼘쯤 되는 긴 못으로부터 어떤 타이어라도 단번에 뚫을 것 같은 굵은 나사못에 이르기까지, 떨어져 있는 못의 종류도 다양했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가 타이어에 펑크가 나 대형사고로 이어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런데 펑크가 나는 주된 원인이 타이어에 못이 박히는 것이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먼 길을 운전을 하고 다녀올 일이 있어 떠나기 전에 가까운 정비소를 찾아갔다. 타이어의 공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바람을 넣으며 공기압을 재던 정비사가 대뜸 말했다.


“펑크네요.”


바람을 넣어도 공기압이 올라가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타이어에 박힌 못을 빼내는데, 놀랍게도 타이어에는 두 개의 못이 박혀 있었다. 눈으로 볼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못이 두 개나 박혀 있다니, 그것도 모르고 고속도로를 고속으로 달렸으면 어쩔 뻔 했나 싶어 아찔했던 경험이 있다.


길을 걷다가 못이 보일 때마다 못을 도로 밖으로 치워냈다. 그럴 때마다 스틱을 이용했다. 스틱 끝으로 못을 치워냈는데, 그렇게 치운 못이 제법 많았다.


길을 걷다가 만난 철판. 나사못 몇 개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걸어가며 못을 치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운전자들은 자신이 달리는 도로 위에 못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과 누군가 길을 걸으며 그 못을 치웠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하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럴 것이다. 생각지 못한 큰 은혜를 힘입어 살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길을 걸으며 스틱이 전해준 유익함은 의외로 많았다. 문득 ‘지팡이와 막대기’가 떠오른다. 목자이신 주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켜준다는 말씀(시 23편) 속에는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하는 놀라운 은총이 담겨 있을 것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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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1)


숨겨두고 싶은 길


아직 휴가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십이선녀탕 입구는 한산했다. 아예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이 많았는데 다행히 문을 연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가니 할머니가 맞아 주셨다.


걷는 시간을 통해 덤처럼 누렸던 즐거움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때마다 누렸다.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손님이 없어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식들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렇게 시골에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할머니에게서 묻어나는 표정을 보면 전혀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할머니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혀요. 저는 이곳이 참 좋아요. 실은 친정이 바로 옆 동네예요.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셈인데 여전히 좋아요. 공기 좋지요, 물 맑지요, 마음 편하지요, 사람들 순하지요, 도시에서 복작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간 나는 지복(至福)을, 천복(天福)을 누리며 사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자족(自足)하기를 배운 이에게는 그가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늘과 잇닿은 자리이자 은총의 땅, 세상에 부러울 것이 따로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숨기고 싶은 길, 알리고 싶지 않은 길이 있었다.


점심식사 후에 걸어야 하는 길을 두고 로드맵에는 ‘반드시 강을 따라가는 옛 국도 고원통로를 찾아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로드맵에 ‘반드시’라는 말이 나오면 긴장을 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를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고원통로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그 일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식당 주인 할머니의 친정 동네가 그 쪽이기 때문이었다. 젊어서 원통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도 했다는 할머니는 길을 손금처럼 떠올리며 자세하게 일러주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고원통로 초입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고원통로는 열하루 일정 중에서 만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길이었다. 세상에서 서너 걸음 물러난 듯, 사람들의 눈길에서 벗어난 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 아래로 맑은 계곡물이 시원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도로와 계곡 사이에는 미끈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은 마냥 푸른빛이었고, 떠가는 흰 구름은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게다가 도로를 지나는 차들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맘 놓고 걸어갈 수도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햇볕과 바람은 마음까지를 말려주었지 싶다.


계곡 옆 소나무 그늘 아래에는 용케 그곳을 알고 있다 싶은 이들이 텐트를 치고서 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두고서 계속 걷기만 하는 것은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싶었다. 걸음을 멈추고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가 너른 바위 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지고 있던 배낭은 물론 스틱, 모자, 신발과 양말까지 벗었다. 목을 두르고 있던 스카프와 손에 끼고 있던 토시도 물에 빨아 바위 위에 펼쳐 놓았다.


물이 흐르는 곳으로 내려가 편한 바위를 찾아 발을 담갔다. 깨끗하고 맑게 흘러가는 물에 발을 담그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깨끗한 물이 지친 발을 씻어주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고, 기특하다고 자꾸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걷느라 발에 남았던 모든 피곤함이 모두 씻겨 나가는 같았다. 옛 선비들이 즐겼다는 ‘탁족’(濯足)이 이런 즐거움이었구나 싶었다.


둘러보니 산과 물과 바위와 나무와 하늘이 막힘없이 어울린다. 그 무엇 하나 어색한 것이 없다. 숨을 고르게 쉬고 있자니 나 또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맞다, 나도 자연의 일부, 자연의 한 조각일 뿐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탁족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너른 바위로 돌아와 앉아 발을 치료한다. 물집 잡혔던 곳을 둘렀던 밴드를 모두 떼어내고 햇볕을 쬔다. 새로 생긴 물집의 물기도 빼내고 바람을 쐰다. 다시 길을 떠나기 전에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일 것이지만, 정말로 발을 치료할 것은 약이 아니라 바람과 햇볕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볕은 따가웠지만 바위 위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본다. 세월도 저리 흘러가는 것이겠다 싶다.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 되는 건데 무엇 그리 순리를 역행하며 살까,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일들이 문득 어리석고 어색하게 여겨졌다. 불쌍하고 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바위에 앉아있는 시간은 마음까지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느라 날이 저물고 소나무 아래 어디선가 하루를 묵어도 좋겠다 싶지만 아직도 남은 길이 있다. 햇살이 배어 가볍게 느껴지는 배낭을 다시 메고, 햇살이 말린 뽀송뽀송한 양말을 신고, 햇살이 눅눅함을 모두 지워낸 신발을 신고 일어서니 걸음이 새롭다.


이름도 위치도 다 말했으니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을까만, 그래도 그 길은 끝내 숨겨두고 싶은 길 중의 하나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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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0)


도움 받으시다


우연히 눈에 띈 표지판 덕에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걷던 중 한 미술관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런 곳에 이런 미술관이 다 있구나 싶은, 독특한 조형미를 갖춘 <백공미술관>이었다.


때마침 한 젊은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몇 시에 개관을 하는지를 물어보았더니 10시라 했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 시간 차이가 제법 났다. 그냥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가 말했다.


“관심 있으면 들어오셔도 돼요.”


덕분에 2층으로 된 미술관을 혼자서 둘러보았다. 나를 받아준 직원은 일일이 전시관의 조명을 켜주며 불편 없이 둘러보게 해주었다. 수화 김환기, 고암 이응노 등 익숙한 화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낯선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낯선 것은 그의 한계가 아니라 나의 한계다. 내가 그를 모르는 것이다.


작품을 둘러볼 수 있게 해 준 직원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다시 걷기를 시작했는데, 얼마쯤 걷다보니 저만치 정체불명의 물체가 눈에 띄었다. 도로 옆 잣나무 숲에 뭔가가 서너 개 놓여 있는데, 바위 같기도 했고 무엇인가를 덮개로 덮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궁금하긴 했지만 가야 할 길이 멀어 그냥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생각하니 내가 이 길을 언제 또 지날 수 있을까 싶었다. 걸음을 되돌려 잣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각상이었다. 그것도 예수님에 관한 조각이었다. 작품마다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 십자가 지시다’, ‘예수 첫 번째 넘어지시다’, ‘예수 두 번째 넘어지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조각이었다. 커다란 화강암을 쪼아 만든 작품이었는데, 돌이라 그랬을까 십자가를 지고 있는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이 묵중하게 전해져 왔다.


잣나무 슾에서 우연히 발견한 조각 작품. 예수 십자가 지시다,  예수 첫 번째 넘어지시다, 예수 두 번째 넘어지시다.


작품 앞에서 사진을 한 장씩 찍고는 다시 맨 앞에 있는 작품 앞으로 왔다.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다 알 수가 없었다. ‘예수 키레네시몬의’이라는 제목은 보이는데 그 다음 제목이 떨어진 잣나무 마른 잎에 덮여 있었다.


조각된 내용이 작품의 제목을 짐작하게 해주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조각 앞에 무릎을 꿇고는 마른 잎을 손으로 치워냈다. 마침내 묻혀 있던 제목이 드러났다.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이랬다.


‘예수 키레네시몬의 도움 받으시다’


제목을 확인해야 했던 첫 번째 작품,  예수 키레네시몬의 도움 받으시다.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새기게 했다.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조각된 작품은 마치 돌에 새겨진 두 사람이 걸어서 나오듯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구레네 시몬이 지친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야 복음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마치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만난 것처럼 작품은 다가왔다.


가만히 바라보니 예수님도 시몬도 모두가 눈을 감고 있었다. 십자가는 모순과 고통,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순명(順命)이란 눈을 감는 것이다.


어쩌면 구레네 시몬은 억울함과 불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에게 멍에처럼 주어진 존재의 모순과 함께 당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시몬에 대한 미안함으로 두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있다. 하지만 허투루 지지는 않는다. 힘에 부친 십자가를 행여 놓칠까 두 손으로 십자가를 꼭 붙들고 있다. 십자가는 시몬의 어깨와 뺨에 닿아 있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어느새 기꺼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겨진다.


시몬의 바로 뒤에 예수님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보이지 않는다. 앞뒤로 두 사람이 섰지만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예수님인지를 대번 알게 하는 표지가 있다. 얼굴의 크기나 모양이 아니다. 머리에 쓴 가시면류관이다. 가시면류관은 한 사람의 머리에만 씌워져 있다.


머리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빛의 광채가 아니라 가시면류관을 쓴 모습이 그가 예수님임을 말없이, 그리고 충분히 일러준다.


그 때 그랬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위나 규모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광채나 후광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 머리에 쓰고 있는 가시면류관이 그가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십자가를 시몬에게 넘긴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모습으로 당신 대신 십자가를 지는 시몬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품을 바라보며 두 눈이 뜨거웠던 것은 십자가를 시몬에게 넘긴 예수님의 두 손이 비로소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당신 대신 십자가를 지지만, 여전히 주님은 한 손으로 십자가를 붙들고 있었다. 너희들이 십자가를 질 때 너희는 결코 혼자가 아니란다,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시몬의 어깨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두 눈을 감았지만, 당신의 십자가를 지는 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 지를 주님을 알고 계시다. 무엇을 가장 힘들어 하는지도 알고 있다. 눈을 감아도 아신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손을 내미신다.


자신의 어깨와 얼굴에 닿는 예수님의 손길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것을 알기에, 시몬도 자신의 눈을 감은 것인지도 모른다.


십자가의 길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과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나만 혼자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뒤에서 주님도 나와 함께 그 아픔을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주님이 눈을 감듯, 내게 필요한 것도 눈을 감는 것이었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몰랐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걷다가 우연처럼 만난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는 늘 그렇게 만나고 그렇게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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