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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모두를 재워 한희철의 얘기마을(135) 밤은 모두를 재워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말은 멍석 펼치듯 노을도 없는 어둠산 그림자 앞세우며 익숙하게 밀려왔다. 차라리 밤은 커다란 솜이불모두를 덮고 모두를 집으로 돌린다.몇 번 개들이 짖고 나면 그냥 어둠 뿐,빛도 소리도 잠이 든다. 하나 둘 별들이 하늘로 돋고대답하듯 번져가는 고만고만한 불빛들저마다의 창 저마다의 불빛 속엔저마다의 슬픔이 잠깐씩 빛나고그것도 잠깐 검은 바다 흐른다. 그렇다.밤은 모두를 재워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날마다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킨다.검은 바다를 홀로 지나 것들을. - (1992년) 2020. 11. 5.
조율하는 날 신동숙의 글밭(269) 조율하는 날 밥은 먹었니?가슴 따뜻해지는 말 차 한 잔 하자가슴 설레이는 말 어느 날 문득그러한 초대에 따뜻해지지도 설레이지도 않는 날 내 마음의 결을 고요히 조율하는 날 2020. 11. 5.
먼 곳에서 벗이 찾으니 한희철의 얘기마을(134) 먼 곳에서 벗이 찾으니 막 수요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낯선 청년 세 명이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뒤편 한 구석에 배낭을 벗어 놓더니 나란히 뒷자리에 앉는다.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며, 설교를 하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짐작 가는 데가 없다. 누굴까, 누가 단강을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릴까, 궁금증이 들쑥날쑥 머릿속을 드나들었다. 설교를 마치고 성도의 교제시간, 소개를 부탁했다. 단강이 그리워서, 단강교회 교우들이 보고 싶어서 왔노라고 했다. 짧은 소개를 박수로 받았다. 예배를 마치고 모두들 난롯가에 둘러앉았다. 멀리 울산에서 올라왔다는 말보다는, 교우들을 소개 했을 때 익히 알던 분을 만난 듯 익숙한 이름을 되뇌는 청년들의 모습에 교우들이 .. 2020. 11. 4.
투명한 예수 신동숙의 글밭(268) 투명한 예수 공생애를 사시던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제가 유심히 살펴보던 점은 모든 행함 중에 보이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모든 순간의 말과 행적을 놓치지 않으며 제 마음에 비추어 보는 일이 다름 아닌 성경 읽기와 사람 읽기, 마음 읽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일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일이니까요. 결혼식 축하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후 보이신 예수의 마음에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혈우병을 앓던 여인이 군중 사이를 지나던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서 병이 나음을 보이시고도, 예수는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할 뿐입니다. 신약의 전문을 낱낱이 살펴보아도 이른바 종교인들이 내세우는, 예수가 행하신 이적과 기적 중에도, 예수는 언제나 자신의 공로와 의를.. 2020. 11. 4.
쉬운 삶 한희철의 얘기마을(133) 쉬운 삶 안갑순 속장님이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끝정자로 내려갔습니다. 아직껏 가슴이 뛴다는 속장님의 얼굴이 많이 부어있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깟 강아지 두 마리에 웬 수선이냐 할진 몰라도 이야길 들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일 년 내내 번 돈을 아껴 집사님 내외분은 강아지 두 마리를 샀습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사람 주먹보다도 작은 귀한 강아지였습니다. 그림같이 인형같이 생긴 강아지 두 마리를 방안에 키우며 며칠 동안은 고놈들 귀여운 맛에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들인 거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아지들은 귀여움 투성이였습니다. 자식 없이 살아가는 노년의 외로움을 그렇게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고가 나던 날, 마침 바깥 볕.. 2020. 11. 3.
비가 그친 후 소나무 숲 냄새 신동숙의 글밭(267) 비가 그친 후 소나무 숲 냄새 간밤에 가을비가 순하게 내리는가 싶더니, 명상의 집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한결 순하게 젖어든 아침입니다. 아이들을 등교 시킨 후 뒷설거지를 하고 이부자리와 방 정리까지 마무리를 한 뒤 강론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선 바쁜 아침을 보내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엄마 없는 빈 집으로 제일 먼저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의 눈에 널브러진 방으로 맞이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방바닥의 먼지까지는 닦지 못하더래도, 옷가지며 이불이며 제 자리에 있을 것들은 제 자리에 두고서 집을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 대신 토마스 머튼의 강론 수업 시간에 오늘 만큼은 기필코 지각하지 않기로, 지난 며칠간 혼자서 속으로 다짐했던 엄마의 열심을 내려놓기로 한 .. 2020. 11. 3.
우리는 가난합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132) 우리는 가난합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더는 허름할 수 없는 언덕배기 작은 토담집, 시커멓게 그을린 한쪽 흙벽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또렷한 글씨, 5학년 봉철이었을까, 중학교 다니는 민숙이였을까, 누가 그 말을 거기에 그렇게 썼을까? 아까운 줄 모르게 던진 나뭇단 불길이 반딧불 같은 불티를 날리며 하늘 높이 솟고,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불가로 둘러섰을 때, 불길에 비친 까만 벽의 하얀 글씨. “우리는 가난합니다.” 보건소장님의 연락을 받고 작실로 올라갔을 땐, 이미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입으로 코로 흰 거품을 뿜으며 아무 의식이 없었다. 혈압 240-140. 손전등으로 불을 비춰도 동공에 반응이 없었다. 변정림 성도. 한동안 뵙지 못한 그를 난 그.. 2020. 11. 2.
귀를 순하게 하는 소리 신동숙의 글밭(266) 귀를 순하게 하는 소리 낮동안 울리던 귀를밤이면 순하게 슬어주던 풀벌레 소리 멈추고가을밤은 깊어갑니다 오늘밤엔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가을비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우리의 귀를 순하게 하는 자연의 소리는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멈추어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2020. 11. 2.
"평화에도 머물지 말라" 신동숙의 글밭(265) "평화에도 머물지 말라" 모처럼 제 방 안에 앉아 있으려니,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이 오고 밤이 옵니다. 지난 시월 한 달 동안의 주말 저녁은 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홀로 저녁 하늘과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잠기곤 하였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 마당 위로 유난히 하얗게 빛나며 금실거리던 시월의 별들을 바라보다가, 또한 저 별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한 마음이 문득 별처럼 떠올라, 가슴이 그대로 고요한 가을밤이 되고 어둠이 되던 순간도 이제는 꿈결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초여름부터 어김없이 들려오던 창밖의 풀벌레 소리가 오늘은 멈추었습니다. 이렇게 고요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풀벌레들의 침묵입니다. 태화강변을 따라서 아직은 화려한 가을잎.. 2020.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