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8)

사람이 하느님 신비를 알면 얼마나 알까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6-18).

사람은 ‘너’를 만나면서 ‘나’로 피어난다. 인간은 사랑의 햇살을 받아야만 피어나는 피조물이다. 하늘과 삼라만상에서, 그리고 부모와 여인에게서….

아담은 하느님이 만드신 걸작품이었지만 하와를 만나기까지 웃을 줄 몰랐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지성스럽게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솜씨를 다하시어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그러자 하느님의 모상인 아담의 입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터진다.

“야, 히야,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어서 당신의 가장 깊은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시면서 하느님께서 흐뭇하게 지으시는 미소….

머리께나 쓸 줄 안다는 철학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가까스로 도달한 유일신 사상,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매질을 당한 후에야 겨우겨우 배운 유일신 야훼 신앙, 인류가 수십만 년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아직까지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한 분이신 하느님' 신앙, 그 유일신 신앙을 하필이면 저쪽에서 오셨다는 그리스도께서 왜 이 믿음을 흔들어 놓으셨을까? (안식일 시비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닥 잡는 데도 무려 800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니체노-콘스탄티노플 신경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이가 있다면 “한 번 나와 보십시오”라고 외치고 쉽다.

 

 

사람이 하느님 신비를 알면 얼마나 알까, 조가비 껍질만한 머리로 말이다. 그래도 당신의 비밀을 숨기지 못하시는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비를 기어이 열어 보이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우리네 인간과는 다른 분이시다. 당신의 모상대로 지어내신 인생들인지라 ‘언젠가는 알아듣겠지.’ 이런 깊은 뜻을 품고 계시나 보다. 하여간 지금 내게는 유일하신 하느님이 지고하신 고독 속에서 홀로 갇혀 계신다는 믿음은 콜록콜록 홀로 누워 계시는 건넛방 시아버님을 연상시켜 오히려 거북하기만 하다.

하기야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말을 쓰셨다. 《소용없는 하느님》을 쓴 델레 신부의 표현처럼 하느님은 ‘단수’가 아니시고, 개인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분명히 복수이다. 왜냐고? 그 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그 사랑은 개인적이지도 사사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게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가르는 기준은 분명하다. 바로 사회적인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이 그것이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요 또 하나는 사회적인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이 인류를 두 도성으로 나누어 세웠으니 악인들의 도성과 의인들의 도성이 그것이다.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창세기 축자해석 11.15.20).

물론 인류의 첫 번째 공동선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다. 자신을 사랑해도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타인을 사랑해도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하지만 이웃을 외면하고 하느님만 우러르겠노라는 신앙, 나라와 사회를 잊고서 교회에만 매달리는 신심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저주하는 “사사로운 사랑”이리라.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도성에서는 사사로운 사랑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사회적 사랑만 존재하리라(아우구스티누스, 산상설교 강론 1.15.41).

심장에 가시망이 둘러쳐진 예수 성심을 바라보는 계절이 올 것이다. 사사로운 사랑이 범접하지 못하게 쳐 놓은 가시망은 아닐까? 팔은 안으로 안으로만 굽는다고, 아예 두 손을 십자가에 못질해 버린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또 배우노라면 우리도 영원한 경지에서 “우리 힘으로 하느님을 우러러 뵈오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눈으로!”(떼이야르).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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