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9)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줄이야?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Rembrandt )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시다니요!”(누가복음 15:11-32).

잘 아는 복음 대목이지만 참을성을 갖고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은 집에서 살기가 싫다며, 어느 날 집안의 돈을 모조리 싸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곧 돈도 다 떨어지고 실컷 고생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가 집에 당도하자 아버지는 굵은 몽둥이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길에서 큰아들을 만났다. ‘어딜 그리도 급히 가십니까?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 ‘몹쓸 놈의 네 아우가 돌아왔다. 단단히 두들겨 맞아도 싸다.’ ‘아버지, 저도 거들까요?’ ‘그래. 도와 다오.’ 그리하여 아버지와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을 두들겨 패 주었다. 아들을 실컷 때린 아버지는 제일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못된 아들을 벌주리라고 벼르고 벼르던 소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화해를 살다라는 책에 나오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글이란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들은 어린이가 나름대로 비유를 재구성한 것인데, 어쩌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꾸밈없이 담아 놓았나 싶다. 심보가 옹졸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사람은 두 개의 잣대를 갖고서 산다.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는 '자비'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잰다. 그분은 대자대비하시고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하신다. 따지거나 꾸짖거나 추궁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용서하신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는 정의라는 잣대가 쓰여져야 한다. 주님은 의로우시고 악한을 벌하시며 그것도 당장에 벼락으로 치셔야 옳다. 세리와 죄인이 예수의 말씀을 듣겠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못마땅해 하였다. 선량하고 신심 깊고 윤택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처신이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용서할 가치가 있는 자를 용서해야지.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개선의 가망이 없다.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비추시고 착한 사람의 밭에만 비를 내리셔야지 하느님의 도리(?).”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다. 하느님 마음은 어버이의 마음이고, 내가 남에게 가지는 마음은 시샘 많은 형제간의 그것이다. 하느님이 악인을 벼락으로 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 자신이 제일 먼저 맞아 죽었을 텐데. 그러나 하느님 마음을 아직 배우지 못한 우리는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복음 7:2)는 말씀을 듣고도 아랑곳없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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