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44)

 

봄은 무어며 봄은 오느냐고

 

 

벌써 입춘입니다.

 

오늘의 날씨와 체감온도만 중시하는 요즘의 입춘이야 흘깃 지나가는 뉴스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우리네 옛 선조들은 이 날이면 얼어붙은 땅이 언제 녹고 그 매서운 북서풍이 언제 바뀔지 쉽게 가늠되지 않았던 엄동설한 속에서도 봄기운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묵은 땅을 갈 준비도 하고 새 땅에 뿌릴 씨앗도 챙기면서 한 해의 농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편 대문짝이나 문지방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또는 ‘세재■■ 만사여의대통’(歲在■■ 萬事如意大通)이라는 춘방(春榜)을 크게 붙여, 한 해 동안 집안일과 농사일이 잘 되기를 축원하였습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첫머리는 과연 만물에게 겨울동안 칼끝처럼 파고드는 냉기(冷氣)앞에서 자신을 지키느라고 바짝 움츠러들고 조였던 육신의 긴장을 스스럼없이 풀어주는 힘이 있다 싶습니다. 이른바 ‘생명의 무장해제(武裝解除)’입니다. 아직 완연한 봄을 이야기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지만, 봄은 더 말할 나위 없는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입니다.

 

그런데 왠지, 봄이 왔다는 시정(市井)에 봄기운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직도 겨울이라고, 봄은 아직 너무도 멀리 있다고 외쳐대는 얼어붙은 얼굴들, 분노와 허탈의 늪 속에 잠겨 있는 마음들이 덩어리져 있는 듯 합니다. 그토록 애써 왔는데 이게 뭐냐고 서로 헐뜯는 다툼이 계속됩니다. 분열이 치유되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과연 봄은 무어며 봄은 오느냐고.

 

봄은 하늘에서 벼락치듯 급작스럽게 오지 않습니다. 봄은 작은 소리로 스며들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완전히 뒤바꿉니다. 우리는 조직이나 위원회의 결성, 법의 개정이나 새로운 제도를 통해 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봄은 우리가 생각하듯 정치나 제도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봄을 가져오시는 궁극적인 힘은 오직 야웨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다만 그 봄을 기다리며 준비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다리기보다 마치 우리가 봄을 이룰 듯이 성급해 하거나 욕심을 부리고, 우리의 뜻이 그분의 뜻이라고 내세우며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미 겨울이 주는 얼음 속의 고요와 편안함에 익숙해 꽁꽁 얼은 안정만 찾고 있지는 않은지, 얼음이 녹아야 생명의 물이 되는데도 깨어지기 싫어 끼리끼리 꽝꽝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한껏 몸부림치지만 우리가 낳은 것은 한낱 바람에 불과하여 이 땅에 봄이 찾아오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아닌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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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35)

 

영혼의 두레박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새로운 한해가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며칠 못가서 어긋나곤 합니다. 지난 해를 보내면서 세월의 흐름만큼 우리 자신이 성장했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시간의 파편을 주워 모아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가늠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삶을 목표로 삼아야 되는가” 등등 간단치 않은 주제들과의 씨름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라고 설득하면 그로써 우리의 고뇌는 더 이상의 의문의 여지없는 상태로 안정되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의 생활과 분리되어 따로 종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또는 사사로운 문제와는 관련이 없이 보다 심오하고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들하고만 상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모두가 다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삶, 삶이 없는 믿음 모두가 다 허무하거나 혹은 껍질뿐인 앙상한 관념의 놀이에 그치기 십상입니다. 신앙이란 삶 그 자체의 절박한 주제이고, 그 삶을 펼쳐나가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는 매우 솔직하고 구체적입니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 놓거나 또는 그저 주변에서 맴도는 경우에도 성서를 읽게 되노라면 성서가 최상으로 경건한 책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과도 같은 생각들이 들어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하게 됩니다. 인간들의 일상의 고뇌를 비롯해서 전쟁, 파괴, 속임수, 간음, 질투, 투쟁, 사랑, 근친상간, 타락 등등 무수한 드라마가 그 안에 담겨 있어서 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사와 그리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하나님의 존재도 그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더욱 잔혹하고 편협하며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요구를 인간에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성서를 문학으로 이해하고, 혹자는 역사서로 이해하며 혹자는 이스라엘 민족종교의 경전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칩니다. 성서에 대한 이런 이해가 반드시 틀리지만은 않습니다. 성서는 그런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성서가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다가올 수 있는 길을 보게 됩니다. 무수한 세월 속에서 인간이 겪은 무수한 사건들을 삭이고 삭여서 그 오랜 시간의 풍파(風波)에 마모되지 않은 평생의 고백들이 정수(精髓)처럼 하나로 묶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통과해오면서도 그 삶에 깊숙한 연륜과 지혜가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의 새로운 깨우침을 얻습니다. 그 마음과 영혼이 온통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그 삶에 아름다운 품위가 있고, 경청할 만한 진리가 번뜩일 때에 우리는 그가 치룬 고난이 도리어 보석이 되어 빛나는 것을 경험하고 감격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그로써 얻은 진실에 대한 눈뜸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살면서 별로 고생도 해보지 않고, 인생 보는 눈이 가볍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은 자에게 우리는 인생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성서는 이런 온갖 고난의 골짜기를 힘겹게 통과한 연후, 자신의 영혼에 길러진 귀중한 생명의 진액을 인류에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사의 갖가지 곡절과 시비 앞에서 성서는 그 모든 문제들을 종국적으로 풀어나가는 힘의 원천이 결국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과 고백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이 성서 속에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 또는 종교적 교리든지 아니면 신학적 가르침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살이와 성서속의 세계가 하나로 만날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읽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에는 나사렛 예수와 한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진 예수께서 물을 길러 나온, 유태인들과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아무도 없는 호젓한 우물가에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종교지도자의 스캔들로 문제 삼을 만한 현장이었습니다. 물을 한잔 청하자 여인은 별로 친절하지 않게 대꾸하자,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를 알았다면 거꾸로 예수에게 여인이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두레박도 없는 주제에 무슨 소리냐”하면서 핀잔을 줍니다. 이에 예수는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라고 합니다. 매일 물을 길러오는 고된 노동에 시달려 있던 여인은 귀가 번쩍 뜨입니다. 팩팩 거리던 여인이 자신의 힘든 지경을 짚어나가는 예수 앞에서 마음이 한결 열린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는 여인의 삶, 그 본질적인 고뇌 즉,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며 이미 몇 사람의 남자를 거치면서 살아온 역경의 현실을 언급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전전하면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마음과 몸이 지쳐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있는 여인의 영혼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아픔을 어루만진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의 삶은 전격적으로 예수를 향해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긷기 위해 가져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동네를 향해 달려갑니다. 예수를 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여인이 우물에 온 것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여인의 삶에 지금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물동이를 버리고 갑니다. 홀연 정작 중요한 것이 깨달아 지는 순간, 지금껏 집착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의 삶, 그 처지를 바로 보고 짚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매달려 있던 욕망이라든가 좌절감이라든가 또는 허망한 생각에서 단숨에 우리를 깨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 그 깊숙한 곳까지 부드럽게 육박해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 생명의 힘을 길어 올릴 두레박을 얻은 여인입니다. 바로 그런 “얻음”이 있었기에 물동이는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영혼의 두레박’, 그것을 우리가 얻게 되면 우리는 인생의 갈증을 새롭게 축이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무수히 방황하는 심령들은 모두 바로 이 두레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올 한 해, 부디 그런 두레박을 얻으셔서 삶의 새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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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35)

 

박근혜, 오염된 카리스마

 

 

대통령 박근혜는 자신이 대단히 강단 있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민주사회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독선의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시대적인 연좌제라고 생각했는데, 독재자의 딸 독재자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독재 권력은 당장 승세를 쥐고 있는 듯 하지만 그 말로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박근혜는 지금 그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영향력, 권위 있는 지도력, 그 사람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그리 크게 고민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이 사회에서 존경할 만한 분들이 있었던 편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이 많이 변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학식이나 인품, 또는 그 비판정신이나 윤리적 순결함, 자기희생 등이 존경의 기준이 되었던 시절은 이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무언가를 이룬 성취,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이른바 성공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가치판단의 척도가 되어가다 보니 과거에는 존경받을 위치에 있는 분들도 이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취급 받는 사태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세태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자신의 장래를 어떤 모델에 맞추어 살아가려는가가 이로써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 “부자 되세요”, “성공 하세요.” 등의 인사는 우리 사회가 무엇을 그토록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지요.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가치, 역사적 의미,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뭐냐는 쪽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과정은 어떤지 따지지 않고 재력으로 성공한 사람을 높이 떠받들면서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고 마는 거지요. CEO 출신이 지도자가 되면 모두가 잘 살게 된다, 국가도 기업처럼 경영해야 한다, 식의 논법은 한 사회와 국가가 어떤 윤리적 가치, 역사적 목표를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기대와 가치는 우리 사회에 천문학적인 정부예산의 낭비와 자연의 훼손, 그리고 경박한 물질적 가치관의 팽배 등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또 어떤가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경제정책의 실현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은 없는지,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되고 존경받는 인물은 누구인지, 그런 문제는 우리사회의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정부 여당의 온갖 거짓말과 궤변은 진실의 은폐, 실종, 억압의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사회적 논의를 배제한 우격다짐과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오만, 독선은 파시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이걸 확신으로 내세워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통치능력으로 착각하고 있기조차 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군까지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교육의 군사화까지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파시즘의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하늘이 내린 능력과 은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영향력이나 권위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매우 특별하게 그 사람에게 주어진 타고 난 능력과 권위, 영향력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에서는 주로 대단히 강력하고 폼 나고 그럴싸한 권위나 지도력, 또는 개인적 매력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가령 배우 최민수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과 결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보스 기질의 품성을 느끼게 되는 이미지 때문일 것입니다. <십계><벤 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도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연기인으로 기억들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가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추앙되고 있는 까닭도 그에게는 보통사람들이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그 어떤 강력한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진정한 카리스마는 누군가를 위에서 압도하고 군림하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품성을 진정한 카리스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카리스마를 떠올려보면 카리스마라는 말이 현실에서 얼마나 잘못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카리스마를 연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만과 위선, 그리고 위장이 있는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늘이 한 개인에게 특별한 능력과 은총으로 내리는 카리스마는 결코 그 사람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힘이 아닙니다. 그걸 통해서 이 세상에서 힘없고 억울하며 그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라고 허락된 능력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카리스마는 위압적이거나 군림하려 들거나 자기 과시에 치우치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내린 진실한 카리스마는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겸손합니다. 사랑이 풍성하고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낮은 곳에 임합니다. 군림이 아니라 섬기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책임을 감당하고 자기희생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성공과 욕망을 향해 줄달음치는 그런 지도력이 아니라, 역사의 뜻을 묻고 욕망이 아니라 진리와 평화, 정의와 생명을 향해 모두를 이끄는 그런 권위와 힘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권력, 재력, 학식, 인맥, 출신배경 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한없이 낮아져서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이를 치유하고 생명의 능력으로 채우기 위해 나설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이 카리스마를 오염시키고 오해로 가득 차게 만드는 세상의 논법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이루어내는 카리스마를 구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감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주어지는 사랑과 희생의 능력입니다. 새로운 미래는 그런 지도력을 가진 카리스마에서 태어납니다. 역사의 진실을 뭉개고 그 위에다 조작된 역사를 덧칠하면서 만드는 카리스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입니다. 거짓은 모래 위에 짓는 집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 듯 하게 보여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무너짐이 더욱 심합니다. 그래야 어느 것이 진짜 제대로 된 집인지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는 거지요. 우리는 그걸 역사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진실은 그런 것이니까요. 진정한 카리스마는 진실과 한 몸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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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욕하면서 배운다(?)

 

 

나사렛 예수께서 선교사역을 다니신 시기는 로마 제국의 지배와 헤롯의 통치로 이스라엘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무수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이런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다 때려 부수자’ 하는 봉기의 선동이다. 나사렛 예수는 실로 이 봉기의 슬로건을 내세워 선교하셨다. 그러나 그 차원이 다른 저항운동과는 전혀 달랐다. 어떻게 보자면, 복종과 현실 수긍의 논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는 발언들을 예수는 하셨던 것이다.

 

한이 맺힌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꿈꾸도록 되었을 때 그들의 현실을 보는 눈은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깊은 불만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세상을 볼 때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권력을 쥐고 있고, 부패한 자들이 지도자 행세를 하고 있으며, 무능력한 자들이 높은 지위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왕과 귀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현실은 이들에게 의분을 끓게 하는 일이었고, 세례 요한의 불 같은 함성은 이들의 잠자고 있던 의식을 일깨웠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의분의 불길을 하나로 모아 기존체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방도 외에는 썩어빠지고 부정의한 세상을 구할 길이 없어 보인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는 바로 이 일을, 이 거사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점에 모아져 있었다. 하여 이들 이스라엘 민중들을 모아놓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치적 발언은 “이제 때가 왔다. 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모두 끌어내서 본때를 보여주고, 우리들 세상을 만듭시다. 자, 나를 따르라”고 해야 영웅이 되는 것이고, 그 시대를 구원하는 자로서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는데,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로 열기가 가득한데도 그 어떤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이들을 집결시키거나 결속하지 않는다.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이들의 전의를 약화시킬 만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식의 말이었다. 그 동안 우리를 인간처럼 보지 않은 저 나쁜 놈들을 이제 처단할 기회가 오고 있는 것만 같은데 원수를 사랑하라니? 그러면 저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라는 이야기인가?

 

 

 

이런 의구심이 일어날 법한데도 예수는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이런 발언을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누가복음 6:37).

 

이것은 그의 인기를 위해서나, 이스라엘의 혁명을 위해서나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될수록 독하게 마음을 먹고, 사사로운 정은 접어두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만큼 일벌백계의 마음으로 처단할 자는 과감히 처단하는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새 세상은 오지 않는다고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사렛 예수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들에게 다가간다. 이렇게 힘들고 억울하고 봉기의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정죄하거나 용서하지 못하고 끝끝내 그 미움을 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대목은 단순히 기독교 윤리의 개인적 품성과 관계된 말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도저히 품기가 어려운 갈등이 첨예한 현실에서 요구되고 있는 덕목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의 깊은 차원에 눈을 뜨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냥 만사가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편안하면 남을 심판할 이유도 없고, 정죄할 마음이 일어날 이유도 없으며, 남을 굳이 용서하지 못할 바가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악한 일을 당하고 자기 가족이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인간은 이성을 잃어버린다. 또 그런 경우에 어쩌다가 집단의 힘까지 얻게 되면 그는 잔인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의로운 분노’로 충분히 위장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수 있다.

 

악한 일을 당하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악한 일을 당하면서 치르게 되는 고통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그 당사자가 악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지만, 대단한 민주투사가 정권을 잡고 독재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며, 고된 시집살이를 한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그 시어머니보다 더 독한 인간이 되는 경우도 희귀한 것이 아니다. 실로 이런저런 일로 고되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음이 관대하고 어려운 사람의 입장을 잘 알고 도와줄 듯하지만, 자신을 고난에 빠뜨리고 어려운 때에 누구 하나 자기를 제대로 도와준 자가 없다고 여기면 세상에 또 이렇게 독한 사람이 없을 듯하게 무정하고 냉혹해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의 열망을 알지 못하실 리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성취되기를 기원하신다. 이들이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인간적 존엄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정의로운 미래가 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고된 삶으로 해서 이들의 마음이 악해지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며, 기회가 왔을 때 정죄와 처벌의 권리를 함부로 휘두르는 자가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현실이 결코 될 수 없다. 인간사에 전개되었던 무수한 혁명과 개혁조처가 대체로 실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심판과 정죄와 용서하지 못함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의 반드시 ‘반동의 시대’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인간을 파괴시키고 만다.

 

하여, 하나님의 의를 마음에 품고 인간과 현실의 변화를 원하고 꿈꾸며 실천하는 경우일지라도, 자신을 심판자, 정죄자, 용서의 권리를 가진 자의 위치에 놓는 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거스르는 일이 된다. 악한 일을 당하면서 저도 모르게 같이 악해지고 거칠어져 가는 인간들에게 나사렛 예수는 그런 중에도 저들 악한 자들을 닮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세워나가는 미래는 인간을 상처내고 파괴시켜 나갈 뿐이다. 현실이 아무리 거칠고 독이 오르게 해도 ‘저들을 닮아서는 아니 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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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34)

 

청년 예수께 길을 묻습니다

 

 

“순결한 남자들

저녁노을같이 붉고 곱던 남자들

그들과 함께 한 시대도 저물어

채울 길 없는 끔찍한 날들이 많았다

…길을 떠나려다 문득문득

순결한 남자들 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뜨거움도 간절함도 없이 살고 있어서

눈물도 절규도 없이 살고 있어서”

 

- <저녁노을>, 도종환

 

역사를 고뇌하고 이상에 자신을 걸고 아무런 계산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이들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시인의 아픔이 절절히 다가옵니다.

 

시인은 다시 <그리운 강>에서 꿈꾸는 새로운 출발을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와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세속의 욕심과 야망으로 자신의 생명을 병들게 하는 세대 앞에서 때 묻지 않은 맑은 청년의 영혼, 그것을 지니고 살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그의 그런 소망은 우리 모두에게 한때 청춘의 꿈이었고 또한 우리를 언제나 다시 순결의 깨우침으로 이끄는 미래의 그리움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기백이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고난을 겪지 않아 든든하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청년들의 선배세대들이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았는지 아느냐, 하는 다그침을 받습니다. 그러면 청년들은 더욱 위축됩니다. 우리는 도대체 뭐냐, 하는 자괴감이 깊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들 청년 세대들이 아무런 고난이 없다는 것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대학을 가는 청년들은 당장에 등록금 부담으로 휘청거립니다. 그렇지 않은 청년들도 그들대로 현실을 감당하느라 힘겨워 합니다. 대학을 나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취업의 문은 좁고, 하는 일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사회에 나오게 되어도 봐주는 건 물론 없습니다.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정치적 격투에 시달리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도 그들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더 깊이 말하자면 많이들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는 별반 없고 낙담스러운 상황만 자꾸 전개될 뿐입니다.

 

등록금 문제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부담 아래 이들에게는 기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학 강의실에 가보면 압니다. 이들은 질문이 없고, 스스로 밀고 나가는 기운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우울한 겁니다. 학점 따는 것은 그래서 목숨을 거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뭔가 스스로 선택해서 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이미 정해진 틀에서 잘 될 수 있는 것에만 생각을 모읍니다.

 

이와 같은 청년세대의 미래는 앞으로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한참 발랄하고 유쾌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청년세대가 부족한 이 나라의 미래는 과연 어찌 될까요? 청년의 시대에 무수한 시험과 선택, 또는 모험과 흥겨움을 느껴보지 못한 세대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 우울함은 남고, 시야와 사고는 좁아지기 마련입니다.

 

세대가 이어지면서 역사는 발전해야 하고, 인생에 대한 낙관이 보다 넓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꾸 듣게 되면서 우리는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길러주고 있나요? 청년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소리가 반복되는 곳에서, 온갖 상식 이하의 일이 벌어지는 곳에서 이들은 어떠한 미래의 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청년세대의 약동적인 힘이 느껴지지 못하면 교회의 미래 또한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나이 많은 이들의 축 늘어진 모임으로 전락할 위기가 오는 겁니다. 서구의 교회가 거처 왔던 길을 이 나라도 걷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로와 용기, 그리고 지혜로운 청년들로 커나가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해주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존재이유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청년 예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보았던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분노했던 세상과 그가 꿈꾸었던 미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으로 청년 예수에게 가야 합니다. 그는 힘과 재력으로 지배되는 세상에 분노했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현실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 단호했고, 약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고 존엄한 주체성으로 바로 서는 길을 온 몸으로 뚫고 나가려 했습니다. 거기에서 민중들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역사. 여기서 우리는 청년 예수의 힘과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청년 예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부자들의 교회가 되고 있고 또 되려고 몸부림치다시피 합니다. 권력을 기뻐하는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청년 예수의 갈망과 다릅니다.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외침은 그래서 올바른 지적입니다. 이것부터 제대로 바꾸는 운동이 일어나야겠습니다. 아니면 우리는 청년 세대에게 보여줄 예수 없는 교회를 지키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절망의 시대는 희망을 낳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청년 세대가 마주친 막다른 골목은 오히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너지지 마라, 다시 일어나자, 저 새로운 길을 향해 믿음의 모험을 하자, 이렇게 용기를 주면서 나가는 교회에 청년들은 모여들 겁니다. 정의롭게 살고 의미 있게 사는 길에 대한 질문이 풍부한 교회,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 청년들의 희망을 봐야 할 것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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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31)

 

이미 있으나 아직 없는 길

 

 

이제 무더운 여름철도 그 기세가 한 풀 꺾여 갑니다. 계절의 변화를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겠지요. 어느 누구도 태양을 바다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산 위로 꺼내 올릴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별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다시 나오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 우주의 흐름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궤도를 정해놓으셨고, 그에 따라 인간의 삶도 그 변화의 흐름과 궤도, 그 길 위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이미 있기도 하고 아직 없기도 합니다. 기존의 궤도를 돌아 움직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아직 그 위에 서 보지 않아 길은 있으나 그 길이 아직 자신이 걸어갈 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길이지만, 그 길 위를 걷는 이에 따라 그 길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결국 도달해서 얻게 되는 종국적인 뜻이 같을 지라도 그 여정의 내용과 과정은 사뭇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간의 운명과 그 길은 이미 있는 것이지만, 그 길을 처음 가는 이에게는 “이미 있으나 아직 없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무수히 오간 길도 그 길을 처음 밟는 이에게는 낯선 길입니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오랜 옛날 그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의 영혼, 숨결, 그리고 인생과 역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겪었던 고뇌, 슬픔, 좌절과 갈망 그런 것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순례>는 바로 그러한 여정을 우리에게 준비시킵니다.

 

순례는 다만 성지를 다녀오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뇌와 절망, 그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의 꿈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든 우리에게 순례의 현장이 됩니다. 그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영성과 깨우침이 일어나면 그 순례는 성공적이 될 것입니다. 그건 무언가를 찾아 나선 길이 결국 그 무언가를 찾았다는 걸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뛰어가면서 살아가는 때에 순례는 그 속도가 너무 느리게 보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세월에 이 숨차게 돌아가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때에, 긴 시간을 뚝 떼어내서 그 어디론가 순례의 길을 떠난다고 하면 그건 세월의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낙오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실생활에 결국 도움이 되는 것을 구하는 때에, 그보다는 고답적이고 정신적이며 생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순례자의 삶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리기만 했다가 그 여정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과 깨우쳐야 할 것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속도는 있지만 방향은 없고, 빠르기는 하지만 결국 도달할 곳에 도달하는 것은 아닌 기이한 인생의 모순에 직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큰 맥락을 놓치고 살아가기에 자신의 삶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 인생사의 커다란 지도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가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아는 어리석음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현실의 삶이란 그 정신적 능력에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세끼 밥 먹고 자기 욕심 채우고 살면 다 되는 줄로 아는 자기 삶의 품격을 스스로 저버리고 마는 지경에 빠져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순례의 길로 떠나는 것은 사실 먼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갑자기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 최일선으로 떠나자 아내는 엉터리 위문단의 일원이 되어 가수로 베트남에 가게 됩니다. <님은 먼 곳에>라는 영화의 줄거리 대략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남편인 님을 김추자의 노래처럼 “늦기 전에” 만나지만 그곳에서 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도 만나게 됩니다. 님은 먼 곳에 있으나 그녀의 순례는 그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떠남으로써 님과 자신 모두를 동시에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순례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님”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만난 자신을 만나는 그런 여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님은 먼 곳에”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가슴, 영혼, 삶 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이 순례의 여정은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자기 안의 순례로 귀결됩니다. 길을 가면서 순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치해야 하고 자신과 긴장해야 하며 자신과 새롭게 조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이루어나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순례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갖지 못한 민족입니다. 정신적 성지가 없는 민족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건 우리에게 부끄러움이기도 합니다. 나라가 힘들고 사회가 어지럽고 정치가 파행을 겪을 때, 우리에게 순례자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긴 호흡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미래를 예견하는 그런 정신적 순결의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의 이해에만 휘둘리는 그런 저열함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세상은 한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 사는 본질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행복해하고 싶고 자유와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저 오지 않습니다. 정신적 성지를 향한 순례로 순결해지는 영성을 가진 개인과 사회가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그것입니다. 빠르기만 하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집중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기만 하면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깊고 깊은 영성의 힘이 솟구칠 때, 이 혼란의 시대를 뚫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을바람이 불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의 머리 위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일 것입니다. 숲은 춤추며 노래하고 강은 우리보다 앞서서 달려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길 떠난 자이며 아직 그곳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벌써부터 축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갈 것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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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30)

 

무지개와 별들이 무척 보고 싶은 오늘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막바지 고비를 넘기고 있는 듯 합니다. 바람과 비를 한껏 품은 태풍이 지나가더니 하루 사이에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를 간빙기라고 하지요. 이 시기에 지구환경은 격변을 겪게 됩니다. 지구 전체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처절한 과정을 거쳤고 인류는 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밟아나갔습니다. 태양계가 급격하게 팽창하거나 위축되는 우주적 주름살이 만들어지는 이 거대한 충격의 시간은 지구촌의 지층과 기후를 결정하는 때였고, 이로써 인류는 자연에만 의존하는 방식이 아닌 문명을 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인류는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매우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온난화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고 이제는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변화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계절개념은 무너져 내리고 있고 예측 불허한 여러 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래 전 지구촌의 격변과 오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때에는 어디론가 피할 길이 있었고 그러면서 인류가 살아갈 지역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지구를 탈출하지 않고서는 살 길이 없게 되는 상황이 예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난화 현상은 지구 어디를 막론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고 따로 피할 방법이 없는 환경재앙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급격하게 진행되는 사막화, 견디기 어려운 열대기온, 예고되지 않는 폭설, 대홍수와 해일 등은 지구촌 도처에서 계속 들리는 소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젠 안전지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은 과거의 빙하기나 간빙기의 격변과는 달리 모두 인간의 인위적 죄악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발전이라고 여긴 일체의 산업화가 가져온 재난입니다. 지구를 지켜내고 있는 오존층을 인간 자신이 구멍을 내고 보호막을 스스로 망쳐버린 결과입니다.

 

기온이 달라지면 그건 다른 방법으로 막아낼 도리도 없고, 생태계 전반에 걸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일어납니다. 단지 기온이 몇 도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태계 전반의 고리가 변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의 근본을 흔드는 사태와 이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이는 질병의 발생과 확산까지 가져오는 사건입니다. 이토록 중대한 문제에 대해 이미 세계 기후협약이 마련되어 노력해왔지만 미국은 부시 정권 당시 이를 거부했고 아직도 이는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업이라는 이익에 묶여 인질이 된 지구촌의 생명입니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이해하거나 그 안의 에너지를 뽑아내려고만 하는 발상에서 이러한 재앙은 시작됩니다.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려 인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자동차 매연의 오염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도 문제지만, 온실가스의 배출이 지구촌 전체에 걸쳐 팽창하면서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공해 해결능력을 넘어서고 있는 현실은 가공할 지경입니다.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고 숲을 깎아버리며 강을 뒤집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일들이 곧 인류의 미래를 벼랑으로 밀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개발은 더 이상 자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릅니다. 땅을 인간이 살아가야 할 터가 아니라 투기와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그 귀중한 자산은 파괴되어 갑니다. 자연이 일단 파괴되면 이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걸 마음대로 파헤치고 뜯고 뽑아내고 질식시켜가고 있습니다. 썩지 않는 쓰레기를 묻고, 기후에 영향을 미칠 배기가스에 대한 통제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 죄는 부메랑처럼 우리 인간의 현실과 미래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미래를 놓고 벌이는 논란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비극입니다. 인류 전체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하려 노력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기초적인 논란만 있지 실제로 지구 온난화를 막아내기 위한 작은 실천도 생활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숲이 사라지면서 지구의 허파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면 지구촌 도처의 작은 아마존 숲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경고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한반도의 허파에 대한 민감한 각성이 없습니다.

 

그 각성의 부재는 이른바 4대강 사업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강을 손대는 것은 주변 숲을 망가뜨리는 일과 직결됩니다. 강을 손대는 것은 자연을 질식시키는 일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숨결은 가빠지게 됩니다. 산업공해는 감당할 수 없이 자연의 회복력을 손상하게 함으로써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을 앞당기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무덤덤합니다. 경제적 계산만 따지고 있습니다. 이왕 따지려면 제대로 따져야 합니다. 자연의 미래적 가치를 희생시키고 얻는 이익이 과연 얼마일까요? 게다가 그 이익은 누구에게로 돌아가고 있나요? 골프장을 짓겠다고 산을 마구 깎아 우기에 그리도 재난을 자초하더니 강을 뒤집어 어떤 재난을 자초하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구 온난화도 애초에는 “뭐 별 일 있겠어?”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 죄는 과거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운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지구촌, 땅별이 더는 살 곳이 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우리 생전에 그런 일이 없다고 해서 후손의 권리를 미리 박탈해버리는 것은 또 옳은가요? 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도 물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합니다. 지금 지구촌이 인간이 살 곳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런 생각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위주로 파괴한 자연, 욕망을 채우겠다고 추진한 산업,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행복을 진정 만들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방향 선회를 해야 합니다. 행복의 기준을 새로 잡아야 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자족할 줄 아는 행복의 세계관이 담긴 “오래된 미래”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계속 이러면 인간은 망합니다. 당장 자연을 인간의 욕망에 굴종시키는 오늘의 모든 논리와 결별해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때, 우리는 마침내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는 무지개도 쉽게 보지 못하고 하늘의 별도 제대로 못 보는 그런 메마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무지개와 별들이 무척 보고 싶은 오늘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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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9)

 

해방과 분단 70년, 친일과 주류

 

 

20세기의 전반기는 민족의 주권이 박탈당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여러 가지 저항이 있었고, 그것은 이후 해방된 조국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의 저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정에 의한 자주적 국가건설이 가로막히고, 친일잔재세력의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으로 해방된 나라는 식민지 유산의 연속이라는 기형적 역사전개의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민족에게 고통을 가했던 자들이 다시 권좌에 오르고, 외세에 빌붙어 민족에게 피를 흘리게 했던 자들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해방정국은 들끓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친일잔재세력들과 민중들은 대립했으나 미군정의 지원과 친일잔재세력의 기득권이 결합하여 대세를 쥐게 되면서 사태는 민족사의 요구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이 당시 교회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정치적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해방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상실해버리고 만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독교는 정권과의 관계에서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또한 미국의 원조물자의 배분과정에 끼어 들어간 개신교는 이 과정에서 타락과 부패의 사슬에 얽히게 되며 이후 교회를 병들게 한 물량주의의 시작을 경험하게 된다. 강대국을 등에 업고 권력에 충성하며 재물까지 손에 쥐는 기회를 갖게 된 교회는 민족의 진로보다 교회의 기득권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고, 이 와중에 뜻있는 목자들은 외롭고 고난에 찬 길을 걸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교회

 

교회는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고 정치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위를 확보할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이러면서 한국사회는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기대를 갖지 못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자신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데 열을 올리는 집단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힘이 있고 재력이 있는 이들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상품성이 점점 더 중요한 요구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해방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다기보다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점 더 강해진 것이었다.

 

해방정국의 혼돈을 뚫고 좌와 우의 이념대립을 넘어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의 전망을 내보여야 할 교회가 지위와 재물에 눈을 뜨니 교회의 내부는 시끄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고, 현실에 대한 교회의 당당한 발언은 들어보기가 어려워졌다. 민족의 분단이 현실로 다가왔으나 교회는 이에 대하여 치열하게 저항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이 구호로 부르짖었던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마저도 받아들이는 반평화적인 발상에 동조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분단정권이 이후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적인 내전으로 나타나면서 기독교인들의 희생은 막대해진다. 북한정권은 기독교인들을 미국의 첩자정도로 인식하고 신앙인들을 탄압했고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은 북한의 공산주의에 의한 학살과 탄압으로 순교했고 이것은 이후 남북 대치상황에서 초기에 기독교가 민족화해보다는 반공과 반북적인 기치를 들어올리게 되는 상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아무튼, 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건국의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고 미국에 의한 군정과 분단정권이라는 절름발이 해방으로 20세기 중반을 맞이한 끝에 치르게 된 전쟁은 20세기 민족사 전체를 걸쳐 가장 끔찍한 비극이었다. 무려 5백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이 전쟁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같은 민족을 향한 증오를 배웠고, 용서할 수 없는 대립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 원수를 사랑하고 끝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나, 민족의 분단과 냉전 체제의 현실은 기독교 신앙의 한계선을 설정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었다.

 

 

 

 

군사정권의 지배, 저항과 자유의 함성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은 사람들에게 깊은 좌절을 주었고, 상실의 시대를 열었다. 창백한 모습의 실존주의적 허무감이 지배했고, 가난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현실은 자신감을 실종하게 했다. 한국민족의 앞날은 희망이 없어 보였고, 이대로 가난하게 살다가 마는 나라처럼 생각되었다. 정치권은 모두를 실망하게 했고, 돌파구 없는 나라의 암담함으로 다가왔다.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교회는 침묵했고, 고난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회의 상층부는 미국의 원조물자를 뜯어먹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며, 권력은 흉폭해져갔다. 마침내 일어난 4·19는 잠시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정신적 원리의 분명한 수립을 하지 못하면서 정국은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갔다.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려는 움직임이 이 시기에 일어났으나,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이 가한 이념 환경으로 인해 제동이 걸렸다. 좌파적 경향을 가진 이른바 혁신세력의 등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분단을 극복하려는 목소리나, 빈곤에서의 정의로운 탈출이나 또는 사상적 자유를 부르짖는 움직임 등 역사를 개혁하려는 노력들이 잇따라 있었으나 시대적 전환점을 형성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른하늘에 벼락처럼 일어난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이 모든 상황을 일거에 바꾸어버리는 철권통치의 시대를 열었다. 식민지의 비극적 잔재와 분단의 고통, 전쟁의 후유증,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빈곤이라는 현실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은 젊은 군인들의 등장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건다. 기존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상에 질릴대로 질린 상황에서 이들 군인들의 정치참여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렇게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지배로 인해 이 나라는 단기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그러한 공적을 뒤덮을 만큼의 무수한 역사적 질곡을 양산하는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사에서 박정희 체제의 등장 이상의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 또한 없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기될 정도로 그에 대한 애증의 교차는 극심하다. 무능하고 비효율적이었던 정치권의 현실에 비해 그의 등장은 국가권력을 매우 신속하게 조직화하고 이에 맞추어 국가발전의 추진력을 엄청나게 발휘하는 시대를 연 것이었다. 왕이 없어 혼란스러워하고 약자의 처지에 빠져 있다고 여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했고, 이에 사울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이 강국의 현실로 갈 수 있었던 것과 비견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사울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자유, 정의, 통일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치열한 논쟁을 야기 시켰으며 어떤 선택이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고 마땅했는가에 대한 도전을 가해왔다.

 

경제성장의 프로그램은 한편으로는 빈곤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던 국민들에게 매우 조직화된 역량을 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반면에, 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가치와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빵을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위에 소수의 부가 축적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움직임은 권력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뼈저린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일부는 여전히 침묵하거나 권력의 입장에 동조했고, 다른 일부는 저항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주화 투쟁의 시대가 우리의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현실참여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고, 일부 교회는 반체제 운동의 근거지가 되어갔다. 산업현장의 핍박 또한 교회의 참여를 요구, 도시산업선교라는 형태로 교회는 강도 높은 자본축적과정에서 희생당하는 이들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냉전체제의 경직된 이념체계하에서 ‘빨갱이’로 몰렸으며, 현실에 안주하던 교회는 물량성장의 길로 일로매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회 성장의 방식을 놓고 두 가지 길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경제성장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협력해야 하며 이것은 교회성장의 원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교회내부의 교권주의가 강해졌고, 권력의 권위주의적 체제와 유사한 당회장의 권위주의적 교회정치가 당연한 것으로 용납되어갔다. 이와 함께, 교회는 경제성장의 과실을 축복의 구체적인 증거로 가르쳤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삶을 외면하는 현실에 빠져 들어갔다.

 

반면에, 이러한 경제성장의 정의롭지 못한 측면에 눈을 뜬 일부 교회는 권력과 사회를 향해 더 이상 이러한 방식으로 가다가는 인간의 생명이 짓밟힐 뿐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외로운 광야의 소리였다. 하지만 자유의 함성이 그로써 그친 것이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자유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게 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현실상에 대한 생각을 심화시켜 나갔다. 고난의 연대가 이루어졌고, 권력과 재물로부터 버려진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길러나가고 훈련하는 귀중한 역사의 은총을 체험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고통스러웠던 군사적 권력의 지배도 끝나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교회는 새로운 진로를 선택하는 일에 고뇌해야 했다. 시대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 또한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다양해져갔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이전의 가치관으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긴장도 사라지고, 민간정권 수립의 흥분도 가라앉은 상황에서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다채로운 실존적 사회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사회 또한 과거에 볼 수 있었던 획일적인 사고체계나 가치관은 더 이상 존재이유를 갖지 못한 반면에, 그러다 보니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카오스적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당장에 교육현장의 붕괴로부터 시작해서 성문화의 혼란스러운 양태, 정치윤리의 파산, 원로의 부재, 기준을 갖지 못한 표류하는 사회 등 우리의 20세기 말은 (지금도 혼란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뚜렷하게 체험했다.

 

이와 함께 그간 은폐되어 있던 역사의 정체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됨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자화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20%에 이르는 빈곤층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정의로운 공동체’의 건설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에 다시 부딪히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20대 80의 사회”라는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의 비극도 통과하고 있다.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끝난 줄로 알았으나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상위 5%의 사람이 무려 80%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한국사회에 어떤 좌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인지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모두 우리 사회에 해방과 분단 70년의 역사가 무엇을 만들어 놓았으며 무엇을 남겨놓았고 무엇을 가능하도록 해주고 있는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우리의 20세기는 주체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상실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를 혹독한 시련으로 감당해내었다. 그리고 이후 우리의 현실은 나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력층과 사회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 가치관의 혼란과 민족적 자주성의 약화, 빈부격차와 불신의 극대화, 잘못된 과거 청산의 미비, 은폐된 역사의 비극 등의 질곡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 질곡을 풀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에 대한 공동체적 의지와 순수한 열정조차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식어가고 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역사의 전환을 기대하고 환호했지만 그 환호에 걸맞는 전망과 대책이 없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실 70여년 전 우리민족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의 반복을 예감하게 하는 사태이다. 세계는 모두 자신의 발전을 위한 나름의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건만 우리는 지금 낭비적인 파쟁과 미래적 가치의 중심이 서있지 못한 혼란과 환멸에 절은 무력감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준비된 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기회가 와도 소용이 없게 된다. 등불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처럼 문이 닫히고 어두운 밤의 시대를 문 밖에서 이를 갈며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시간을 보내는 자에게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소득이 없는 세월만 있을 뿐이며 그마저 있던 달란트도 사라지고 만다. 우리민족이 지금 자칫 그럴 위기에 처해 있다.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는 슬로건에 휩싸여 팡파르를 아무리 울려도, 이는 마치 “피리를 불지만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해방과 분단 6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바를 바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파선(破船)의 고통을 또다시 겪게 될지 모른다. 파도가 배를 향해 덮치고 있는데 요나는 기도하지 않고 있으며, 돛을 올려 가야할 바를 가르키는 믿음의 담력이 없는 현실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일제시대·미국 지배체제 소산물이 결합해 만들어낸 기득권층

 

한때 정가에서는 ‘주류론’으로 시끄러웠다. 정적(政敵)을 향해 그런 식으로는 이 나라의 주류, 메인 스트림에게 거부당할 것이라는 정치 공세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나라 이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메인 스트림은 과연 누구인가?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주류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민족사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이 땅에 등장한 정치경제적 주류 세력은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 세력에게 부역했던 자들이었으며, 이들은 미국 군정의 배경을 뒤로 하고 다시 자신들의 권세를 보호하면서 주류 행세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봉건시대의 잔재와 맥이 닿아 있으며, 이러한 연고로 해서 해방 이후 남한에 세워진 국가를 장악한 주류 세력들은 이 땅의 민족적 열망을 배반한 자들이었다.

 

자연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사리사욕적으로 이용했고, 역대 정권에 붙어서 그 기득권을 지켜내는데 혈안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들 기득권 세력들은 이후 군사정권의 보호 아래 성장해 왔고, 그로써 자신의 기반을 방어해냈다. 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불의한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보수 세력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은 수구 세력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조차 한 것이다.

 

이른바 메인 스트림은 이 나라의 정치·경제·언론·교육·문화·군사 각 분야에서 인사와 물질을 좌우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의문시하는 존재나 세력을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들의 매도에는 반드시 '빨갱이'라는 단어가 위력을 발휘했고 그로써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어온 역사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 나라의 교육이나 가치관은 메인 스트림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면 그것은 곧 도발 행위로 진단되었고 파문의 대상으로 정리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친일 경찰이 해방된 나라의 경찰 수뇌부가 되었고, 일본군에 부역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자들이 모자만 바꾸어 국군의 기강을 세웠으며 친일 지식인들이 이 나라 교육의 토대를 감당했으니 그런 나라의 메인 스트림이 가진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분명하다.

 

이후 미국이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다시피 하는 시기가 오면서 한국의 메인 스트림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된다. 알아서 미국의 이익을 챙겨주고, 알아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알아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이들은 친일세력 이후의 신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수한 미국 유학생들이 이러한 친미 주류 세력의 구성 요소가 되었고 그로써 한국 사회의 메인 스트림은 이들의 향배에 따라 이루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보자면, 우리 사회의 메인 스트림은 일제시대 식민지 상황의 소산물과 미국의 압도적인 지배체제 하의 산물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 나라의 메인 스트림이란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헌신적으로 자신을 바친 이들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을 위해 강대국의 손에서 사육된 세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여 오늘날 한국의 언론들이 자주적이지 못하고, 강대국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 전달하는 까닭을 알게 된다. 태생적 한계와 출신의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들 메인 스트림은 이제 역사의 극복과 청산의 대상이며, 그로써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일에 장애가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역사의 시기에, 우리는 해방이라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고 만 결과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는 권력이다. 그래서 주류 ‘바깥에’ 있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주류이기를 갈망한다. 주류들도 주류 권력의 단맛을 계속 즐기고 싶어한다. 그래서 ‘주류 콤플렉스’는 주류는 물론 비주류 모두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정계·재계·관계 등에서 이른바 TK·PK·MK 등으로 상징되는 많은 파벌과 인맥, 혈연을 중심으로 한 족벌과 혼맥, 동문 등으로 맺어진 학맥.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힌 잡다한 인맥과 파벌이 할거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어쩌면 주류 콤플렉스에 깊이 빠진 사회의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이 아닐까. 주류론이 의미 있는 바는 어쩌면 이런 권력지향적인 헐벗은 군상들의 구체적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의 민족사 속에 담아놓으신 그분의 음성과 메시지

 

지난 1세기에 우리 민족이 흘린 눈물과 피로써 이미 우리는 민족사의 새로운 진로를 깨닫는 일에 족한 체험을 하지 않았는가? 이제 할 일은 그 눈물을 닦아주고 흘린 피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나가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해방과 분단이라는 역사의 질곡을 제대로 짚어나갈 때 그 역사가 제기한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풀 힘을 얻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난 700년의 민족사 속에 담아놓으신 그분의 음성과 메시지를 발견하라는 숙제 앞에 우리는 서있다. 시련을 겪고도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는 민족은 어리석다. 언젠가는 그 광야의 방랑이 끝나는 시간이 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갈 바를 몰라 헤매는 우리 민족의 앞날에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희망의 길’을 뚫어내는 일이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리대로 미완성의 해방과 분단의 아픔으로 빚어진 70년의 절망과 간구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때 민족사의 미래는 또다시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휘둘리게 될 것이다. 민족사의 축복을 구하는 길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말씀에 있다. 우리들 손에 쥐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이상 낭비하는 민족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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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8)

 

친일, 한국교회와 세속적 권력

 

 

8월 해방의 달이면서 올해는 해방 70주년이다. 민족에게 고통을 가했던 자들이 다시 권좌에 오르고, 외세에 빌붙어 민족에게 피를 흘리게 했던 자들이 득세하는 현실은 해방정국을 들끓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들은 이 나라의 주류 세력이 되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친일잔재세력들과 민중들은 대립했으나 미군정의 지원과 친일잔재세력의 기득권이 결합하여 대세를 쥐게 되면서 사태는 민족사의 요구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친일세력 청산과 관련해서 한국교회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않다. 아니, 분명치 않다기보다 “친일인명사전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거나 “등재된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세상의 권세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믿는다는 교회가 도리어 그 세상의 권세에 빌붙어 지내왔던 과거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토로하고 바로 서는 노력을 해방 이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했던 일부 기독교 선각자들의 역사를 해방 이후 마치 자신도 참여한 듯이 위장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적지 않았고, 친일 경력을 은폐하면서 계속 지도자연하는 이들이 또한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은 한국교회가 세상의 권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조찬기도회를 아무런 예언자적 양심 없이 옹호, 찬양해 온 처신을 낳고 말았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대다수가 민족을 압살하는 외세와 부패하고 반인륜적인 권력을 질타하기보다는, 그 앞에서 침묵하거나 적극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영광과 출세를 도모했던 것이다.

 

 

 

 

금과옥조처럼 여긴  ‘권세에 대한 복종론’

 

한국교회 지도자 상당수가 로마서 13장 1절이 담고 있는 ‘권세에 대한 복종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여기에 저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강박적으로 강조해왔던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부도덕하고 인간의 양심을 파괴하는 권력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변호하고 정당화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권력에 영광을 바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그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그 권세에 대한 복종이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라면, 그 권세의 품성은 성령의 열매와 동일한 내용의 것이 되어야 한다. 로마서가 13장의 대목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영이 어떤 영적 결실을 맺는가를 누누이 설명하고 있으며, 그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존재의 모습을 갈파하고 있다면,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의 품성 역시 어떠해야 하는가는 이미 맥락 전체의 뜻에서 파악해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학적 요체를 근거로 삼으면 간단히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이들의 필요에 진심으로 응하며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의 의에 충실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악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책임을 맡은 권세가라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한 마디로 인간에게 생명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만일 현세의 권세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가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 권세일 따름이다. 권력의 악마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긴다면 하나님을 도대체 어떤 분으로 고백하겠다는 것인가? 악한 권세를 가지고 선을 도모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13장 문제의 대목 바로 앞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악한 권세를 가지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억누르며 의를 짓밟는 권력은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지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 아니다. 악하고 폭력적인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그런 권세가라도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쓰셔서 세상의 선과 의를 도모한다? 그런 하나님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화신’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인간의 생명을 구하시는 분이지, 포악한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인간을 다스리시는 전제군주가 아니다. 예수께서 헤롯을 가리켜 ‘여우 새끼’라고 질타했던 것은 바로 부패하고 야만적인 권력의 포악한 품성에 대한 일갈이었다.

 

높은 자를 낮추시고, 강하고 부한 자들을 진토로 돌리시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권세자들을 들판에 저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억압하고 의를 무너뜨리는 권력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만일 포악하고 야만적인 권력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한다면, 모세의 출애굽 대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바로 왕의 권세도 하나님에게서 왔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강변할 것인가? 성서의 무수한 예언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대립하는 권세와 마주했던 것을 무엇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하나님의 일꾼인 권세가들과 대적한 자들이라고 할 것인가?

 

성서의 기본 정신이 깔린 맥락 전체를 보고 세상의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깨닫기보다는, 단 한 구절의 말씀을 가지고 현세의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신학은 병든 것이며, 따로 은폐하는 저의가 있는 까닭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신앙의 테두리를 정한다면,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억압하고 그 생명을 짓밟는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했던 기독교 선각자들의 행위는 모두 하나님의 뜻과 대적했던 것이 되고 만다. 혹자는 그것은 이민족과의 싸움이니 마땅하다면서, 해방 이후의 상황은 다르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이민족인가 동족인가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주시하신다.

 

한국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가지고 홍역을 치렀다. 신사참배 문제는 우상 숭배와 관련된 문제이자 일제의 지배를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결국 신사참배의 행렬에 동참해 버렸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강력한 저항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신학적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지도 세력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기득권을 보장받고 있던 친일지주 세력이 중심으로 있는 현실이 이 배경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서도 옥석을 가리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일제하 한국교회의 지도세력 가운데 적지 않은 자들이 친일 세력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주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해방 이후 두 가지 중대한 민족적 요구를 외면하고 이에 저항했다는 사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은 첫째 친일세력 청산에 반기를 들었고, 둘째 대다수 농민들의 요구였던 토지 개혁에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교회의 물적 기반을 쥐고 있는 세력이 누구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6·25전쟁 이전에 월남한 적지 않은 수의 북한 지역 기독교인들이 친일지주 계층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이들이 중심이 된 이승만 정권 이후의 초기 한국교회의 주류 세력들이 손쉽게 권력에 빌붙고 사대주의적 사고에 찌들었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 요구에 적대적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진실한 예언자적 육성은 어디로 갔는가

 

이승만이 기독교 장로라는 사실 하나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옹호했고, 이후 박정희와 후속 권력자들에게 신앙 양심을 접고 머리를 조아린 것은 이들의 정신세계 속에 세상의 권세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친일 세력의 철저한 청산이 한국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병폐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한국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지향하는 질병에 걸려 있게 된 것이다.

 

권력에 대한 아부와 외세의 지배에 대한 변호는 거리낌 없이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는 일에는 꽁무니를 빼고 있음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친일 세력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또다시 이념적으로 매도하려는 움직임이 일부 감지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바른 역사적 양심과 신앙적 중심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부패하고 야만적인 권세를 용인하는 사탄의 궤계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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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7)

 

무섭다 못해 기괴한 말, 말, 말

 

 

신앙인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훈련 가운데 하나가 ‘말의 훈련’일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는지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우리 자신이 그런 상처를 입어보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처럼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말의 훈련에 조심스러움이 없는 것일까? 말의 정의는 무엇인가? 대체로 의사소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정의는 말이 가진 귀중한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의사소통 속에는 욕설과 분노, 그리고 저주도 포함되지 않는가? 그렇게 될 때 말은 이미 말이 아니라 ‘독이 묻은 비수’일 따름이다. 말의 형체는 있으되, 말의 진실한 역할을 상실해 버린 ‘변고’(變故)가 되는 것이다. 가령, 최근 여당 원내대표에게 쏘아 붙이는 이 나라 대통령의 말, 말, 말을 보라. 어찌 그리 함부로 말을 내뱉는지 무섭다 못해 기괴하다. 자신은 국민에게 한 약속에 대해 얼마나 배신을 때렸는지 알기나 한 걸까?

 

이 뿐인가 신문의 사설이나 칼럼, 종편의 패널들, SNS,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상대방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주지 않은 채 마구 매도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며, 한쪽으로 몰아대는 일 또한 적지 않다. 권력과 필력을 앞세운 난도질이다. 그건 이미 말이 아니라, 칼이고 도끼이다. 거기에 찔리고 맞는 사람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시름시름 앓고 깊은 병에 걸리기조차 한다.

 

 

 

 

이는 분명한 폭력이다. 말로 위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말을 하는 행위가 죽고 사는 일과 관계된다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슬며시 비방하고, 넌지시 욕하고 상석에 앉아 훈계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공치사하는 글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그 일들을 거꾸로 당하면 이 가운데 그런 것들을 제대로 참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늘 남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은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성품을 지녔다. 자신은 언제나 가해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피해자가 되는 구도에 익숙한 탓이다. 물론 자신이 가해자라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의당 당연한 권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하지만, 실로 말은 그 이상이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모함과 근거 없는 비방 때문에 그 대상이 되는 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초죽음이 되는가? 아부가 그 상대를 얼마나 정신적으로 썩게 만드는가?

 

그와 반대로 축복과 기원, 위로와 용기, 사랑과 감사가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귀중한 평안과 힘을 불어넣어 주는가? 창세기 1장은 말의 정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최초에 무엇을 하셨는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말은 빛의 사건을 만드는 능력이다. 우리의 인생과 이 시대에 빛을 만드는 책무를 가진 것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로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상처 내며 어둡게 하는 말의 사건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겪게 되는가? 허황된 말로 현혹하고, 거짓으로 눈멀게 하며, 정죄로 인간을 매장시키는 그런 사탄의 사건들이 횡행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구약성서 잠언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실을 일깨운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으니, 혀를 잘 쓰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 18:21)라는 사실이다. 내뱉은 말이 우리 자신에게 먹는 양식이 되어 돌아온 다는 것이다. 독한 열매를 내어놓았으면 우리는 그 ‘독과’(毒果)를 먹는 격이 된다. 그 반대로 선하고 아름다우며 진실된 말이 입에서 쏟아지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좋은 ‘양식’이 된다. 독을 품고 말하는 이는 사실은 그 자신이 그 독을 먹는 것이며, 선으로 말하는 이는 그 자신이 그 선한 열매를 스스로 먹는 것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지는 이로써 명백하다. 감사와 축복이 그 혀에 풍성한 이는 감사와 축복의 열매를 얻을 것이며, 욕설과 저주가 그 혀에 풍성한 자는 바로 그 욕과 저주가 그의 운명을 일그러뜨리고 말 것이다.

 

오늘 이 시대는 그 입을 열면 어떤 열매를 내어놓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으로 이 시대를 먹이고 있는가? 죽음인가? 생명인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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