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26)

 

가진 것이 너무 많아지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세상이 성자 프란체스코라고 부르는 사나이입니다. 제가 살았던 시대는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엽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백 년 전쯤이었지요. 저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그 덕에 부족한 것 없이 살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느 날 하나님의 역사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세상이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숨 쉬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거리의 걸인들과 함께 구걸하면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영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우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땅 부자가 되고 있던 당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스러운 표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뭐든 눈에 띄는 것이라면 자기 것으로 삼아 배를 불리고 있던 욕심이 풍기는 악취와는 다른 내면의 향기를 저는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옷과 몸에서 나는 냄새를 악취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보다 더한 악취는 다름 아닌 욕심 덩어리가 되고 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 앞에서 “자발적 가난”의 축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세상에서 자발적 가난이란,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삶의 결단입니다. 가난은 누구나 싫어하고 저주라고까지 여기지만, 저는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위로받고, 탐욕에 찬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부유하게 자란 제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을 때 주변은 놀라워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편안하게 살아도 될 터인데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고들 말이지요. 그러나 제가 택한 가난은 저도 미처 생각지도 않게 부자들의 탐욕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난한 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했습니다. 그걸 본 젊은이들이 저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수도원 공동체가 되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이 모여들어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존경받고, 가난하면서도 도리어 그 영혼이 부하고, 가난한데 무력하지 않은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가난이 주는 고통을 넘어서 가난으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맑아지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과 타협하는 일은 결코 생겨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잃을 것이 없으니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두렵지 않았고 어떻게든 움켜쥐겠다고 욕심을 부릴 일이 없으니 그 마음이 초조하거나 절망할 일도 없었습니다. 가난은 제게 평화를 주었고, 물질은 소박하고 영혼은 고귀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게 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제가 21세기의 한국에 와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부자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그건 이미 7백 년 전 일이라고 여겼는데 아직도 그 탐욕의 성채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세상의 영혼이 부해지는데, 교회가 부자가 되니 세상의 영혼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난이 세상의 욕심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교회의 부로 말미암아 정작 부끄러워지는 것은 교회인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처럼 굳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문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교회는 그 빈곤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부자가 되는 길로 가는 통로처럼 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영혼이 타락하는 것은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의 늪에 빠지게 하는 첩경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좇으면서 큰 교회를 짓고 목회자가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저 프란체스코는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나누어 주기만 하셨던 예수님이 물질적으로 부자였기 때문에 그러셨나요? 우리는 부자 예수를 기억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남기신 것이 거대한 교회건물이었나요? 옷 한 벌 달랑 남기고 가신 예수님에게서 자발적 가난의 증거를 그대는 목격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데도 한국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는 그런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대들은 눈이 멀었고 가장 큰 것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죄스럽게 아름다운 비단으로 차려입은 부자는 하나님의 빈자이고, 누더기를 입어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빈자입니다.

 

중세 유럽의 교회는 그렇게 부자로 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재산이 너무 많아지면서 이것이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공격당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 재산을 빼앗기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떴던 것이지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로 타율적 가난을 강제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는 재산과 권위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었고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바라기로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거하고, 그 뜻은 어떤 세상의 힘도 유혹하거나 짓밟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혼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기적이던 사람들이 공동체적 연대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걸 지키기 위해 그 영혼은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근본적인 잘못은 가치체계의 맨 꼭대기에 돈을 올려놓은 거지요. 진리와 사랑 대신에….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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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5)

 

메르스! 모르쇠?

 

 

메르스(MERS-CoV: 중동호흡기 증후군 코로나 바이러스)의 습격이 한국사회를 녹다운 시켰다. 방역체계가 뚫리고, 거대 유명 병원이 그 확산의 진원지가 되도록 정부는 모르쇠하다시피 하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되었다. 사망자와 환자들이 늘어나고 급기야는 임산부까지 확진명단에 들어가고 말았다. 농경사회에서 태어난 말인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미 세월호 참사를 통해 깨달을 대로 깨달았으리라고 여겼지만,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부관료들은 우왕좌왕과 대응능력 빵점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사필귀정이다. 관심이 딴 곳에 있었는데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순위일 리가 없었다. 결국 당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고 그 뒤처리까지 국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메르스는 괴질이 아니다. 게다가 방역망을 뚫을 만큼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인 정부의 진면목이 드러나자 국민들의 시선은 차가와졌다. 결국 대통령 박근혜의 방미도 연기될 정도로 민심은 바닥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을 지시라고 주절주절 하는 것을 보는 국민들의 가슴은 그만 먹먹해지고 말았다.

 

초동단계의 무능만이 아니라, 이후 정보공개부터 시작해서 국민들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회와 조건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 드러나자 도대체 이 정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자 존재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해 책임지는 자도 없고, 해결의 틀을 구조화시키는 움직임도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신뢰의 추락과 함께, 정부는 국민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었다. 이 와중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처가 주목받자 이에 대해 정부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했으며 이후 보수 언론들은 호들갑 운운으로 깎아내리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상황 모두를 종합해서 보자면, 현 정부에게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관심있는 것은 오로지 권력 강화에 정적(政敵) 핍박이다. 이것은 오랜 독재정권의 습관이었고, 그 연장선에서나 이해할 수 있는 사태다. 따지고 보면, 메르스 확산도 민주주의의 실종이라는 현실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국민들의 처지를 살펴보지 않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없다. 더군다나 정보통제에 익숙한 권력이 국민들의 알 권리, 자기보호의 권리를 존중할 리가 없다. 국민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는 워낙 민심이반이 심각해지니까 아이구, 이거 안 되겠구나 하고 일정한 태도 수정도 했지만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공학적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모르지 않는다. 이 와중에 황교안 청문회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치러졌고, 성완종 리스트 수사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메르스 사태 대응의 무능으로 정치적 현안을 덮고 간 셈이 되었다. 이건 더 나쁜 일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을 더 큰 사건으로 은폐하는 버릇은 권력의 고약한 습성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메르스 공포로 떨어야 했고, 무능에 대한 비판은 있으나 정작 자신들에게 향하는 칼날을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게 되었으니 크게 밑질 일은 아니라고 보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하도 겪다보니 국민들도 이골이 나서, 척 하면 척이다. 당장에는 메르스 공포가 지배하지만, 이러면서 무엇을 슬쩍 덮고 갔는지 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염려는 깊어간다. 정치가 하도 이러다보니 정치는 국민들의 비난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진지한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큰 줄거리로 보자면 가장 큰 피해는 국민들이 입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혐오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정치는 혐오스러운 자들의 손에 맡겨지는 꼴이 되고, 그 정치를 바꾸고 싶어했던 이들조차 점점 더 좌절하고 무관심해지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권력이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만 되면,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만들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고 동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일제 식민지 체제의 노예 교육의 유산이 이토록 우리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나 싶기도 하다. 권력에 대해 비판하거나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지 못하게 하는 교육은 이후 해방된 나라에서 그대로 답습되고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더더욱 강화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으로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며 비판적인 성찰의 능력을 박탈하고 있는 교육인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근현대사 교육의 비중을 줄이겠다는 것도 다 그런 유산의 되풀이다. 말은 공부의 부담을 줄인다, 고대사와 중세사 교육도 중요하다, 근현대사는 논쟁점이 많다, 어쩌구라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나 그건 다 호도다. 진짜 이유는 근현대사의 진상을 알게 되면, 역사와 현실의 진실에 대한 의식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행적과,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비교되고, 그런 가운데서 불의한 권력과 현실에 저항하고 바로 잡으려는 인간형이 길러지면 권력의 지배가 도전받기 때문이 아닌가?

 

어찌 보면 이것은 조선시대 노론세력이 지금까지 모습만 바꿔서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붙어 사대하면서 온갖 권세를 누리다가 일본 식민지 체제에 아부하고 이후 미국으로 입신의 근거를 바꾸면서 지금까지 세도가들이 된 자들의 손에 교육이 맡겨진 결과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가장 중요하게 혁파해야 할 곳은 교육이다. 제대로 선 교육이 있게 되면 제대로 된 미래 정치가 가능해진다. 그에 더하여 제대로 된 미래정치의 주체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교육혁명이다. 그것은 의식혁명이고 세계관의 변화이다. 정의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일이며, 그것을 위해 공적 임무에 헌신하는 이들의 출현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자들을 길러 세상을 달리 보는 방법을 일러주시고 각자가 자신의 주체적인 존재로 커가도록 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각자의 내면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미래라는 일깨움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의식혁명이었다. 그것은 외부의 권위에 굴종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영혼에 일깨워진 새로운 가치관을 용기 있게 들고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교육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다. 이야말로 혁명의 구호다. 새 부대는 새로운 교육 방식, 제도, 법, 정치, 사회의 재구성이다. 새 술이 본래의 맛을 더더욱 낼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새롭게 조성하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마치 자기가 새 술인 척 하려고 부대는 바꾸지 않고 헌 부대를 쓰면서 그 안에 수혈이요, 뭐요, 하면서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 든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새술마저 악취가 나도록 만드는 일을 벌인다.

 

기가 막히게도, 진보적인 지식인까지도 이런 식의 정치공학을 야당도 이기려면 배우라고 난리다. 그럴까? 부대는 바꾸지 않고 바꾼 척 하라고? 새 술이 담겨 있으니 와서 마시라고?

 

이런 식의 생각이 낡은 것이다. 이런 식의 태도가 바로 헌 부대를 존속하게 하는 사고다. 그래서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판치게 하는 사기술이다. 그걸 배우라고?

 

우리는 근본을 치고 나가야 한다. 진실을 향해 육박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진실과 거짓이 드러난다. 여기서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다.

 

메르스 대책의 무능만이 아니라 이후 벌어지는 그 모든 정치적 사기술을 관통하는 헌 부대의 술책에 이 사회가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진실에 대한 의식이 바로 서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똑바른 발언들이 여기저기서 나올 뿐만 아니라, 교육혁명이 그 근본에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음을 일깨우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혁명을 향해 가는 용기가 그 밑바닥에 넘쳐야 한다.

 

메르스 앞에서 계속 헛다리 짚는 권력을 우린 이제 버려야할 때가 온 것 아닌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모르쇠 하는 권력이 존속하는 것 자체가 위기요, 위협이다. 이제 이만하면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현명한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는 법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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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4)

 

공멸의 사회를 만들려 하는가

 

 

한국사회가 난마처럼 얽히고 있다. 메르스는 그야말로 블랙홀이다. 수습책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회를 이끌고 있는 정치권이나 지식인 사회, 특히 종교계조차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공동체에서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확신이 퍼져 나갈 때, 그것이야말로 위기 가운데 위기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위기 수습에 딱 부러지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총체적인 역량 파산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사태들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다. 이 나라가 얼마나 비리와 부정으로 가득 찬 지를 드러낸 성완종 사태도 그렇고, 갈등이 첨예한 정치적 현안과 관련해서 사회적 조정력이 얼마나 부실한지는 세월호 참사, 끝없이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는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원전 부지 선정 등으로 드러났다. 이제 또다시 한국사회를 소용돌이치게 할 메르스 문제도 우리 사회의 수습 능력을 고도로 시험하고 있다. 메르스와 거의 동시에 평택에 출현한 탄저균 사태는 또 어떤가. 이런 상황에 이 나라의 수장은 ‘나몰랑’이라는 유행어를 남기고 있으니 답답함을 넘어 참람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진보와 보수의 대결 상태는 중간지대가 허용되지 않는 극단의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그 어디에도 서로 간에 진지한 대화와 해결책 모색을 위한 공론의 의지나 노력이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정신적 낙후성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낙후성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문제 해결의 낙후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자고 나면 무수한 문제들이 한국사회를 기다리고 있고, 터지는 소리는 나지만 제대로 수습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잊혀지고 또다시 반복된다. 그렇게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실로 사회 구성원들을 매우 피로하게 만들며, 공동체 전체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을 비합리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합리적 논의의 공간은 소멸하고, 힘이 있는 쪽에서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사회적 상식이 되어 간다.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은 어디론가 실종되고 방법론상의 소모적인 논쟁과 대결이 주가 된다. 정작 해결해야 할 사태의 핵심은 이렇게 해서 가려지고, 방법의 잘못된 선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욱 늘어나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 심화되어 가면, 사람들의 신경은 더더욱 날카로워진다. 그것은 문제 해결의 성숙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리다 보면 문제의 본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져든다. 그리고 모두가 그 미로에서 헤매면서 누군가를 질타하고 비난하며 책임 전가하는 상황이 증폭된다. 모두가 모두에게 이리떼와 같은 대립과 충돌이 점차 일상화해 가는 것이다. 권위 있는 심판관도 없으며,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원로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 사회에 환멸을 안 느낄 사람은 없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문제 해결의 극단주의

 

이러한 현상의 일차적인 책임은 누가 뭐래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권과 정치권이 지지 않을 수 없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헌신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고, 그로써 사회적 존경을 획득하는 가운데 발휘되는 설득력은 힘을 갖는다. 그러나 정쟁에 휩싸이고 소모적인 권력투쟁과 말싸움, 말꼬리 잡기에 몰두하고 있는 정치권은 이미 문제 해결의 권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을 뽑은 것은 사회의 각종 난제를 지혜롭게 풀어주기를 기대해서인데 이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니 이해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격돌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정치권은 자기들 기득권에 매달려 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만의 투쟁과 그들만의 잔치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

 

그 격돌의 와중에서 공동체의 공동 이해는 손상 받고 치열한 갈등의 과정에서 형성된 적대감은 문제 해결을 더욱 가로막는다. 일단 적대감이 형성되면, 편가름이 시작되고 그로써 합리적 논의와 대화의 통로는 막힌다. 결국 상호 적대감이 날로 깊어지면서 한국사회는 내부적 합의가 기반을 잃어버리고 사회 통합의 능력이 마치 공중 분해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내부적으로 심각한 해체의 과정을 격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문제 해결의 극단주의, 그리고 폭력적 해결 과정으로 점철된 사회로 옮아가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재차 강조하건대,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는 문제가 일어나면 그것을 서로 차분히 짚어 가면서 대화하고 숙의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작금의 메르스 사태에 직면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종편에 나와 상식 이하의 이야기를 하는 인사들을 보면 혀를 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에는 흥분하고 삿대질하면서 “와~” 하고 덤벼들지만, 사태의 배후와 전후좌우 그리고 이후의 전망과 해결책,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없는 것이다. 의견이 다른 상대의 주장에도 깊이 귀를 기울이고, 반박할 것에 대해선 명확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반박하며, 너무도 갈등이 첨예할 때에는 휴지기도 가지면서, 끝내 문제 해결에 접근해 가려는 사회적 양식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일단 해결된 듯이 보이거나 시간이 지나서 관심이 시들해지면 그냥 망각해 버린다. 그 당시 어떤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으며, 왜 그러한 갈등이 생겼고 사후 처리 과정에서 재점검해 봐야 할 일은 없는지에 대한 집단적 논의와 공동체적 대화의 통로나 체제가 없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새로 논의를 시작해야 하고 지루하고 신경 돋우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열을 올리니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설득력과 상대의 자리에 서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고 능력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 일들이 무수하다. 작은 안전사고에서부터 집단적 갈등에 이르기까지 그 유형이 유사한 경우가 적지 않으며 원인 또한 동일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니 이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지치고 힘들겠는가. 잊을 만하면 또 그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되었나 싶으면 어느새 다시 고개를 디밀고 나오는 문제들 앞에서 한국사회는 피로하다. 절망한다. 그리고 마침내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만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고 과외의 부담을 우리 사회에 지우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무엇보다 먼저 차분히 대화하고 토론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능력보다 ‘듣는 힘’이다. 우리 사회는 좀체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진정한 대화의 맥은 끊기고 서로 자기 할 말만 줄기차게 하다가 돌아서니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해결책의 싹은 발견되지 못한다. 일방적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그러니 힘이 있는 자의 주장이 대세를 쥐는 것은 당연하다. 권력과 재력이 결합할 때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침묵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으면 분노의 소리로 표출되어 나오며, 그때 권력자들은 당황하고 그제서야 수습하려 하지만, 때가 늦은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왜 ‘삼성병원’이 평택보다 더 큰 메르스 바이러스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좀더 차분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해결된 듯해도 자괴감만 깊어지는 결과를 낳는 일과, 당장에는 문제 해결이 안 된 듯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마음이 열리는 결과를 맛보는 일이 있다. 이 후자가 그 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고도로 성숙시키는 결정적인 힘이다.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격돌의 구조에서만 맴돌면, 한국사회는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현실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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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3)

 

언제 예수가 깨끗한 부자가 되라고 가르쳤나?

 

 

오늘날 교회의 강단은 보다 쉽고 보다 편하고 보다 재미있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대중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심드렁해진다.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힘든 판국에 교회에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오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성공’과 ‘부’가 가미되면 금상첨화다. 그러기에,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추종하려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시장의 논리’란 대중들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다. 보다 많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말씀의 내용과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 부흥의 원리가 되고 있고, 성도(聖徒)라고 표현되는 교회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성서가 증언하는 ‘참된 복음’과는 한참 멀게 되었다.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할 것이다”(욥기 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마가복음 9:2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

 

이 세 구절은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 성장 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성서의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이 말씀을 듣고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재기의 의욕을 불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는 이러한 의욕의 무진장한 공급처였으며 그로써 한국 사회의 발전을 보다 힘 있게 지원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가 겪은 가난과 열등감과 목표 상실의 현실에서 풍요와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슬로건처럼 이 세 구절은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서 이해는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힘겨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의 언어’로 신앙인들을 사로잡아왔다.

 

 

 

 

기득권에 눈 먼 허가 받은 축복의 배급자

 

믿음이 좋은 것은 세속적 현실에서의 능력과 관련이 있고, 그로 해서 ‘성공’하는 것은 믿음의 결과가 되었다. 낙오는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으며, 따라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서 능력을 얻어 현실에서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의 정도와 내용이 높고 풍족할수록 축복을 많이 받은 존재로 인정되는 인식 체계를 한국 교회 안에 자라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목회자는 ‘허가 받은 축복의 배급자’처럼 그 위치를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특권적 위계질서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적 위계질서는 정치·경제적인 특권과 연결되면서 한국 교회를 기득권 세력화했으며, 그 기득권의 방어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져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정치적 권위주의가 요구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를 강화시켜왔으며, 이로써 이러한 체제가 추구하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온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인가,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성공주의의 윤리적 기초는 건드려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와 의’라는 대전제는 이러한 성공주의적 선교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 자리가 없었으며, 오로지 세속적 능력과 위치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으면 그로써 축복이 확인되는 시스템이 가동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창대함이며, 무엇을 위한 능력인가

 

그러나 성서의 근본정신은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무너질 것을 보고, 패배하는 듯하지만 위대한 시작을 보는 하나님의 섭리에 그 중심이 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섭리의 핵심이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목격했지만 신앙은 거기에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과 그 의를 위한 헌신은 그 무엇으로도 소멸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은 전혀 다른 평가 속에 놓이게 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처럼 보여도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몰락과 패배처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나라와 의에 접붙여진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광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고 그로써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간과 사회가 병들어가는 것이다. 그 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적 타락과 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저울’에서 맛보는 허탈한 인생의 무게

 

사실, 성공을 전제로 한 세상의 견해와 여론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외면적 가치 기준에 사로잡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실의 면모에 눈멀기 쉽다. 세상은 가진 것과 누리는 것과 쌓아올린 지위와 지식 그리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존재 여부로 판세를 읽는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그것이 그 소유자의 인간성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 기준에 따라 잘난 인간과 못난 인간이 구별되고, 성공과 실패가 나누어지며 존경과 멸시가 갈라진다. 이 기준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세(大勢)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내리는 결론이다.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의 저울’에 올라서서 자신의 인생과 현실의 무게를 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교만이나 열등감이 나오고, 허영이나 패배 의식이 나오며, 만용이나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실로 온통 이 저울에 수시로 자신을 올려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기에 바쁜 나날들이다. 그래서 그 저울의 눈금이 자신의 무게를 얼마만큼으로 표시하는가에 매달려, 기뻐하기도 하고 낙망하기도 하며, 뻐기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령 욕망의 달성을 성공으로 착각하고, 그 과정에서 황폐해진 인간성은 성공 이후 교만해지거나 타락한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욕망의 성취가 낳는 열매는 그런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생의 무게는 허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작 우리의 인생을 달아보아야 할 저울은 ‘하나님의 저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저울도 때로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을 달아볼 수 없으며, 또는 우주 전체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생명을 달아볼 수 없다. 마음의 진실을 달아볼 수 있는 저울도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마음이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도, 이 세상의 가장 큰 것도 들어갈 수 있는 자리이다. 바로 그 ‘마음자리’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재는 저울을 어디에서 발견하겠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 또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삶 가운데 어떤 진실이 있는가에 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이룬 듯해도 그것이 그 인간의 진실 됨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허사이다. 얼핏 보기에는 아직 미미하고 초라할지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저울에서 참된 무게를 드러내는 삶이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먼저 하나님의 저울에 자신의 인생을 달아 그로써 자신의 삶이 가진 가치와 진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큰 힘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진실과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사는 진정한 능력은 그로써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힘이 아니겠는가.

 

청부론이란 외피 두른 포장된 성공주의

 

이제 복음으로 포장된 성공주의는 요즈음 ‘청부론’과 ‘훌륭한 거부’라는 외피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강하고 부한 것을 열망하면서 그 기회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탐욕과 야망과 죄와 교만과 차별 등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래서 그 그물망을 찢고 그로써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영혼을 해방시켜야 하는데 교회가 그런 일에 나서기보다는 오히려 당대의 주류에 들어설 것을 부추긴다.

 

권력을 쥔 ‘깨끗한 부자’가 선망의 대상이다. ‘깨끗한 부자’와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잘 되어 간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구호도 없을 것이다. 손가락질 받는 부자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존경을 한 손에 거머쥘 방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짱’이다. 양손의 떡이다.

 

게다가 믿음만 좋으면 그저 영적 성숙만이 아니라 물질적 형통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판국에 마다할 까닭이 없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뭐 문제인가, ‘잘 벌어서 잘 쓰면 되지’라는 주장,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물질에 대한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는 ‘기복주의’라는 비난도 이렇게 면할 수 있다. 신앙과 물질이 모두 풍요하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태, 실로 ‘종교적 엑스터시’가 아니지 않는가?

 

주류가 되고 싶은 신자들이여…

 

한국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총리 후보로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황교안 씨도 항간에 돈독한(?) 신앙인임을 내세우지만 벌써 여러모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사회의 타락과 부패의 사슬에 관련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 당혹스럽다. 목사와 장로들이 사회적 비리와 관련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교회의 장로는 과거의 꿋꿋하면서도 엄격한 모습의 경건한 신앙인의 모범적 모델에서부터, 어느새 ‘부’를 거머쥔 기업체의 이사 정도의 모습으로 그 종교적 이미지가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기존의 주류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하려는 것을 이른바 ‘성공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부추기는 것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하나님나라의 의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실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세속적 성공이 바로 성공이라는 착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물질의 신을 모두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우리의 신앙에서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일에 있다. 그 열매로써 얻어지는 부는 참되다. 그것은 의로운 과정과 의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 한 번 우리에게 훌륭한 거부, 깨끗한 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르친 바가 있던가?

 

그렇지 않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러한 문제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하도록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는 이의 길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신 부는 그를 진정 부유하게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겪는 빈곤 또한 그를 부유하게 할 것이다. 이것을 믿고 사는 자에게 ‘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의와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그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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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22)

 

‘그분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

 

 

인간의 목숨은 언젠가 끝이 있습니다. 몸은 늙고 더는 기운이 없어 무너져 갑니다. 그 몸에 담아 둔 영혼은 그래서 몸에 더 이상은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살아생전 몸이 태어나 자라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영혼도 함께 자라나고 변모하지만 몸에 끝이 오면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 이후 그 영혼이 계속 성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몸과 더불어 자란 만큼만 성장해서 그 영원한 운명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의지하자면, 그 다음에는 지금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을 입고 살아갈 테니 역시 영혼도 새로운 차원의 성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간은 바로 그 새로운 몸과 만나는 준비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고 낡지 않으며 병들지 않고 고단하지 않는 그런 몸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아프고 때로 괴롭고 때로 다치면서 그 영혼도 함께 아프고 괴롭고 다치기도 합니다. 영혼이 몸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몸이 영혼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몸과 영혼의 불균형 상태가 지속되면 몸과 영혼 모두 비틀거리면서 헤매일 수 있습니다. 몸이 영혼을 돕고 영혼이 몸을 도우면서 서로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정작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걸 경험하게 되면, 이 몸을 벗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설 때 새로 받을 몸과 우리의 영혼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기쁠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를 넘어선 차원에서 받게 되는 몸과 이생에서 길러진 영혼이 서로 만나 알아보고 함께 더불어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이물감도 없는 감격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새롭게 사는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몸은 주어지는데 그 영혼은 그 몸에 담아낼 수 없는 지경이라면 그 몸은 괴로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은 그 영혼을 또한 힘겹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몸과 영혼의 불균형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듯이 살아가는 길을 깨우칩니다. 몸은 이 땅에 아직 속해 있으나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그 “아직도”와 “이미”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거리가 소멸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이 있게 되면, 우리는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의 시간이 낯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그 너머의 세계가 두려워지고 말 겁니다.

 

믿음의 깊이를 지닌 이들이 죽음 너머의 세계와 그 시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까닭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미 저 너머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현실의 힘에서 자유롭습니다. 어떤 권력도 그들을 무서워 떨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유혹도 그들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궁지도 그들을 곤고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의 몸과 영혼으로 이미 살아가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죽음 너머의 세계를 향해 눈을 들어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이 주는 능력과 감격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세계가 존재함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이 현실의 장벽을 뚫고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부활의 능력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은 그런 세계가 현실이 되게 하는 축복과 능력입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신앙의 가르침은 그래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로 살아가라는 것이 또한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초월성을 말하게 되면 그건 마치 현실에서 벗어나 영 다른 세계에서 노니는 것을 말하는 듯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초월성은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이며, 그래서 초월의 세계가 주는 기운을 받아 현실이 그 기운에 의해 변모하도록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믿음이 강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던지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현실에서 이길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살리라’ 하신 것도 이렇게 해서 그 진의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 너머의 차원에 눈뜨고 그 영원의 몸과 영혼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살아가는 이들은 그 어떤 현실의 조건에 마주해도 그에 사로잡히거나 흔들리거나 안주하지 않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사고가 도달한 차원은 예수의 장성한 분량이요, 그 장성한 분량은 죽음을 넘어선 초월성에 있음이며 그 초월성은 언제나 현실로 돌아와 그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펼쳐보이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치유의 능력을 보이실 수 있었고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드러내실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죽음 너머의 세계로부터 오는 이 놀라운 생명력에 대한 감사와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죽음 너머는 죽음이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곳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질 새 몸과 새 영혼의 존재로 매일 매일 힘차게 자라나시기를 빕니다. 교회는 그 믿음의 연습장이며 실천의 자리이자 그걸 현실에서 증거 하는 하나님의 터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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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20)

 

차이는 존중해야 하고 차별은 거부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서 창조되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의 기준은 인류사회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인권선언이다. 모든 종교는 신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전제하고 이를 강조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러한 선언은, 신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차이만 부각시키는 여타의 종교적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존엄성이 신적 위상을 가지고 있음을 아울러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은 다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는 하나님의 형상, 그러니까 그 신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인간을 모독하고 짓밟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짓밟고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가 성서의 기본 정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빌론제국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성서의 선언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엄성을 깨우쳤으며, 최고의 인격적 자부심을 꺾지 않고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는 힘과 용기를 길러왔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인간관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간 상호관계에서 존엄을 지켜내는 자세를 촉구한다. 따라서 ‘차별’이란 기독교 사상에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기독교인은 차별에 저항하고 차별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며, 차별을 폐지하는 운동을 펼쳐나가게 되어 있다. 차별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도리어 차별로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거나 그걸 통해 자신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기독교와 상관이 없으며, 도리어 기독교의 본질과 대적하는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이에 차이는 존재한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를 획일적으로 대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일이 된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각자의 희망과 목표가 있다. 견해의 차이도 있고 감정적 반응의 강도나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신은 왜 그래?” 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서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고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인권탄압이다. 한국 교육의 획일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개인적 차이가 가지고 있는 존엄한 가치를 살피지 않고 어떤 목표를 일단 정해놓고 여기에 다 두들겨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세상을 다양하게 만들고 우리들의 능력을 보다 풍부하게 해준다. 차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가를 일깨워준다. 그 차이가 조화롭게 결합되기만 하면 또 얼마나 멋진 세상과 대안적 현실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를 알게 한다. 차이는 그 차이로 해서 세상 사는 재미를 있게 하며, 각자 가지기 못한 바를 상대에게서 찾게 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존엄한 것이며 흥미로운 것이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총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차이를 차별과 혼동하는 일이다. 차이는 인간의 개별적 존엄성에 주목하는 반면, 차별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열을 매기고 우열을 정하며 그에 따라 지배할 수 있는 자와 지배받아야 할 자를 정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진정한 대화와 관계를 봉쇄해버리고 만다. 차별로 해서 생기는 억울함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차별로 해서 생기는 특권도 생존경쟁의 당연한 결과라고 옹호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평등한 것이 아니라, 잘난 자의 권리와 못난 자의 슬픔이 공존하는 것이 본래 세상의 질서라고 가르친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고, 여자는 그에 순종해야 한다고 교육시킨다. 이렇게 되면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조정과 지배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랑하는 여성을 이렇게 여기는 것이 온당할까?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또한 정당한 일일까?

 

성적에 따라 인간의 순위를 매기는 사회가 대한민국 사회 아닌가. 제도 교육에서 성적이란 그 제도에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의 성취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다른 방식의 교육과 다른 가치관 아래 만들어지는 과제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성적이 그대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가 수학 성적이 나쁘다고 장래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수학은 잘하지만 영어는 못하는 아이가 수학과 영어를 함께 잘하는 아이보다 못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성적이 상대적으로 처지는 아이가 다른 분야에서 월등할 수 있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성품을 가진 경우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회에 보다 기여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조선족 동포들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여성들을 차별하고 모독하는 이들도 아직 우리 사회에 여전하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깔보거나, 학력수준이 다르거나 특정지역 출신이라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주변부화 하는 힘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엄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적 소수자나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대는 험악하기 그지없다. 그런 사회는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자기 자신이 겪는 아픔은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회이다. 차별은 그런 사회에서 자라나는 ‘악의 꽃’이다.

 

최근 서울의 어느 사립초등학교는 아이들의 교복 어깨에 견장을 단다고 한다. 녹색 견장엔 서울대 교표를 크게 수놓았고 ‘지위’에 따라 점이 덧붙는다고 한다. 학급 부회장은 1개, 학급 회장은 2개, 전교 부회장은 3개, 전교 회장은 4개다. ‘계급장’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표식은 결국 아이들의 ‘지위’를 드러낼 뿐이다.

 

차이는 존중해야 하고 차별은 거부해야 한다. 차이는 소중하며, 차별은 소멸시켜야 한다. 차이는 당연한 것이며 차별은 당연하지 않다. 차이는 세상을 발전시키지만 차별은 세상을 퇴보시킬 뿐이다. 차이는 은혜이고, 차별은 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아끼고 존중하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평등한 세상을 향해 가는 기독교, 그것이 나사렛 예수께서 열망하신 이 땅의 하나님 나라 그 진실한 모습의 하나이다. 다시 한 번 애기하지만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을 거부해야 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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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20)

 

우리 죄가 이리 큽니다

 

 

하나님, 만물이 푸르른 계절이 왔습니다. 겨우내 숨죽여 지냈다고 여긴 생명이 알고 보니 지금의 순간을 준비하는 나름의 고투를 겪어 온 것을 새삼 알겠습니다. 그건 어딘가로 도피하거나 또는 기력이 쇠해져서 안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긴 인내와 간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꽃들이 피고 개구리의 모습이 보이고, 새들이 지저귀는 산하가 아름답습니다. 나무들이 하늘을 수놓는 화단이 되고 사람들은 그걸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이 이토록 절경입니다. 그건 애초에 에덴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깨닫게 해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리 저리 얼룩진 이 세상도 이렇듯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쁨을 따로 마련해놓으셨는데 에덴은 어떨지 감히 상상해 보게 됩니다.

 

겨울이 길면 언제 봄이 오나 하고 지루해하거나 봄이 과연 오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내심이 없고 자주 절망하고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봄이 오면 감탄을 그치지 못합니다. 생명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앞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이토록 넘칩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가 과연 이런 축복과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아무래도 이런 즐거움이 우리에게 당연한 권리나 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는 것이 죄이고, 배신이며 또한 허언입니다. 이 말 했다가 저 짓을 합니다. 저 말 했다가 이 짓을 합니다. 그걸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하나님, 지난 5월 8일 어버이 날,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그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야만의 시대를 방조하며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고은비 그림

 

내 작은 아픔에는 한을 쌓으면서도 이웃의 큰 아픔에는 무감각한 죄인이고, 크게 받은 사랑과 도움에는 실로 감사하지 않으면서 몇 번 안 되는 수모에도 차갑게 굳어지는 저희들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 자존심의 손상, 굴욕, 저버림의 순간들은 악몽처럼 잊지 못하면서, 평생의 아픔으로 못 박아 두었을 내 악한 언행은 까마득하게 잊으며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경제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많은 가정들이 힘든 고비를 겪고 있습니다. 해고 노동자들의 가정은 더욱 곤고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화사한 계절이 왔지만, 여전히 겨울의 찬바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의 위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육 현장의 혼란은 또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사회적 좌절로 가정생활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고,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판국에 마치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삭막해져 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가정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여중생, 여고생들이 자진해서 벌이고 있는 원조 교제는 이제 특별한 뉴스도 아니게 된 우리 사회의 윤리적 좌초는 미래에 대하여 자신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학부에서 최고의 인재들이 자기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자살을 한 청년들의 나약한 심성을 탓하는 목소리 이전에 우리 스스로 생명이 질식할 정도의 경쟁체제를 꾸짖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생명이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다는 깨우침을 목이 터지라고 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옆에서 부추기면서 ‘그 정도 경쟁이야 당연하지, 그걸 왜 못 이겨내’ 하고 채찍질하는 일에 가세한 죄 또한 있습니다.

 

그래도 한 때는 정의로운 길에 나서서 십자가를 앞세웠고 그것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으로 삼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 자신도 많이 변하고 만 것만 같습니다. 처음의 사랑을 버린 죄입니다. 그러고도 그걸 당연한 시대적 변화인 양 스스로 호도하고 있습니다. 어디 정의가 시대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린 복음이 일깨우는 의로움이 아니라, 달라진 정세와 형편에 묶여 있는 자들입니다.

 

회개는 습관이 되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그저 종교적 절차에 그치고 마는 저희들입니다. 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보니, 부끄럽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제는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터놓으신 길을 마다하고 제 욕심을 차리느라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고, 탐욕의 늪에 빠져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들과 딸을 둔 적이 없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이 가운데 교회의 죄는 가장 크니 어찌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라 해놓고 우리 자신은 그보다 더한 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서 손가락질을 당하고서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수치를 모릅니다. 전혀 당당할 수 없는 일 앞에서도 여전히 떳떳합니다. 신앙심 깊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던 주님. 그렇게 주님을 따랐던 교회가 가난한 교회에서 부자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버리기는커녕 더 손에 쥐려고 힘을 기울이고, 혈족이 지배하는 집단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고도 교회에 오라고 하니, 어찌 합니까? 지금의 큰 성전도 감당하기 힘든데 그보다 더 큰 성전을 짓겠다고 나서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죄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죄는 무슨 죄?”라고 더 큰 소리를 칩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뿐만 아니라 상석에 앉겠다고 돈을 뿌린 목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조직이 지금 흔들흔들 하고 있습니다. 사필귀정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을 양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 죄가 이리 큽니다. 주님, 그래서 기도의 순간에는 늘 목이 메입니다. 허튼말이 너무 많았음에 입을 막을 만큼 참말이 더딘 까닭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일로도 목이 메이는 자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렵니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죄악의 세균에 감염된 우리, 병든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 상처 받은 슬픔이 토해낸 분노와 증오와 원망이 나를 버리는 사랑의 아픔 속에서 용해되게 하소서. 이기심이 낳은 오욕과 추함을 가없는 사랑으로 씻어 주소서. 낫우어 주소서. 내 안에 아담이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소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기 42:3-6)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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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19)

 

성서의 문을 여는 마음

 

 

최근 차정식 교수의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그리고 <꽃자리> 웹진에 “곽건용 목사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 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신앙인들에게 성서해석의 바른 관점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만큼 어려움을 주는 일 또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겨 놓았다고 할까.

 

 

 

 

그렇다. 고정적 관점이나 도식적인 이해, 등으로 구성되는 성서읽기가 될 경우, 성서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구태의연한 해석과 초보적 낱말풀이에서 그칠 경우 성서의 세계가 펼쳐주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의 진면목을 가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성서독법의 기본 결말에 대하여 전혀 예상이 불가능하고, 결론적 메시지에 대하여 속단하지 않는 성서읽기가 될 때 우리의 삶에 영적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성서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논리를 거스르는 반전과 역설의 충격으로 존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서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성서를 늘 새롭게 읽고, 재해석하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지금까지 이해하고 알아온 성서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더 깊은 깨우침을 얻는 일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전혀 새로 대하듯 성서를 읽어나가는 자세를 갖추지 않는 한 성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한 내게는 그 알고 있는 부분만 보일 뿐이다. 성서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는 깊고 깊은 세계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아무리 퍼 올리고 퍼 올려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아서 미리 판단해버리는 예단(禮斷)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성관념과 관점을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힘을 지닌 책이라는 점을 기억하여 나의 맹점(blind spot)이 어디에 있는지 성령으로부터 일깨움 받는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한 가지 사건의 기록을 놓고도 무수한 관점에서 그 의미의 지층(地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자신의 제한된 시각과 관점을 고정시켜 성서를 해석하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혹은 교과서적으로 정형화하는 것이 얼마나 성서에 대해 우(愚)를 범하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성서는 이미 죽어 박물화(博物化)되어버린 기록이 아니다. 성서를 대하는 이와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자라나는 책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성서 독자가 성서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 것인가가 관건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록되어 있는 문자의 표면적 세계 밑바닥에 숨겨져 있고, 쌓여 있는 놀라운 사연들이 한 올 한 올 풀려나올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체험하기를 바라시는 세계의 무궁무진함을 비로소 깨달아가는 것이다.

 

“나의 길은 너의 길과 다르다”고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파격’(破格)으로 다가오신다.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날아드는 화살처럼 우리들의 영혼을 찌르셔서 ‘전환(轉換)과 전복(顚覆)의 역설적 논리’로 우리가 이제껏 안심하고 디뎌왔던 대지를 뒤엎어 새 기초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앞에서 결코 안심하고 있을 수 없다. 나의 믿음과 생각, 그리고 결론을 지지해주고 증명해주는 책이라는 안이한 생각에서 그 반대의 관점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성서 앞에서 처음 서 있는 자이며, 어떤 결론에 직면하게 될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서읽기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음성을 난생 처음으로 듣는 기회이며, 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을 자신의 생애에 최초로 목격하게 되는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 성서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치열하게 도전해오는 책이다. 그 도전으로 낡고 헛된 껍데기가 벗겨지고 무너지게 하는 힘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나를 지탱했다고 여겼던 것이 소멸하고 지금까지 생각해볼 수 없었던 새 것이 생기는 그런 체험을 이루어내는 성서읽기가 될 때 성서는 우리의 영혼에 살을 붙여주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파격과 역설, 불시의 반전과 허점이 보이지 않는 도전, 인간이 만들어낸 형식논리의 완벽성을 깨는 대안 등이 성서에 잠복해 있다. 그런 점에서 일체의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성서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성서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비극과 절망, 희망과 재기, 갈등과 화해, 원한과 용서가 있다. 영광과 파멸, 배신과 우정, 전쟁과 평화, 타락과 공의, 탄압과 저항, 외로움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 위장과 생존, 약탈과 복수, 순결과 변질이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얽힌 사연들이 녹아 있다. 그리고 이 사연에 얽힌 아픔과 기쁨들이 하나님의 영혼과 결합하여 인간을 바로세우는 섭리의 흐름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 대하드라마가 담아내는 인간의 모습이 수천 년을 두고 영적 고뇌와 묵상 가운데서 삭고 삭아져서 역사의 풍파에 마모되지 않는 정수(精髓)만이 남아 인간의 심령을 치고, 일깨우며 하나님의 기르심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면서 성서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서를 대하는 우리들은,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서 이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어떤 선택을 하려 했는지 함께 호흡하는 추체험(推體驗)의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무슨 도전에 둘러싸였는지, 그리고 어떤 유형의 고뇌와 희망 사이에서 오갔는지 그 마음의 밑바닥과 객관적 상황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야 한다.

 

이런 전이해(前理解)와 특히 상상력은 성서의 인간과 사건을 살아 있는 현실로서 오늘에 현장화 하는 과정이라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다시 말해서 성서가 오늘의 현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 만나는 접점을 발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오늘의 나의 삶과 우리의 공동체의 운명에 직격탄과 같은 발언권을 지닌 책으로서의 성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영적 감동의 저수지로서의 위상을 갖지 못한다. 성서를 쓴 기자들도 자신들이 삶의 현장에서 대면한 문제들이 성서의 고백 속에 흡수되어, 이 책을 읽게 될 얼굴 모를 무수한 인류의 후예들이 생명적 지침을 발견하기를 기원했다는 점은 성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서, 덧붙여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성서읽기의 목적은 성서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서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움직임이 한데 뒤엉켜 이루어내는 섭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행로를 담아낸 지도이자 화살표일 뿐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네 삶이다.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성서이다. 삶이 겪어내는 갖가지의 사연들이 일차적이고, 그 사연에 담긴 뜻의 신앙적 해석은 그 다음 단계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그 가운데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조밀하게 가늠하는 일이 앞서지 않으면, 성서는 우리들에게 그 안에 담겨 있는 놀라운 음성을 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의 내면에 있는 배신의 골짜기와 탐욕의 봉우리, 특권의 아집과 파멸의 고독 등 갖가지 삶의 결을 만져내야 한다. 이 삶이 손에 잡힐 때 우리는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본질적으로 이 같은 삶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고뇌와 아픔, 진퇴양난, 혼돈 등에 예민한 사람에게 자신을 스스럼없이 열어 보인다. 이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떤 길을 뚫어내시는지 성서는 증언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서를 대하는 자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인간과 역사의 정황을 조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황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접근하시는지 기대하면서 읽게 되면 우리는 마침내 성서의 중심 메시지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성서해석의 예

 

그럼 같이 성서의 문을 열어보자. 먼저, 마가복음 10장 31절의 “그러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겸허함을 강조한 말씀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의 무엇을 기습하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대목은 우선 부자 청년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그는 가진 것으로 보나, 교육수준으로 보나 또는 가정환경이나 그 개인의 성품과 자세로 보나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인격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영생에 대한 길을 묻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의외이다. 왜냐하면 그만한 정도면 누가 보아도 영생의 조건을 이미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문답과정에서 우리는 이 부자청년이 율법의 정도(正道)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연소한 청년이 존경할 만한 믿음과 인품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신다. 보기 드문 합격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세상이 그 청년에게 가장 부럽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영생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결정적 약점임을 지적하신다.

 

“이보게 청년, 이제 재물과 연을 끊으시게. 그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게.”

 

영생을 질문한 그에게 실상 최고의 우선권은 영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면서 자리를 뜨고 만다. 재물을 유지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일보다 앞서기에 그는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서버린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진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들어가기 어려운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성공하고 재물 많은 것이 축복의 징표요, 세상의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판국에 그것이 영생을 가로막고 있다는 선언은 결코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과 비교해볼 때 어느 면에서도 뛰어나고 존경스러운 청년이 영생과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본다. 자기들은 재물이 없으니 합격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었다. 먹고 살려면 때로 거짓말도 해야 되고, 피치 못하게 속일 때도 있고 없는 살림에 부모님 공양하기가 벅찰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돌파구를 연다. ‘다른 것은 그 청년과 비교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큼은 우리가 자신이 있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영생의 길에 들어서는 자격을 그래도 예수님, 당신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은 획득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인 동시에, 이를 스승의 입으로 직접 확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바로 이 현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마가복음 10장 13절 본문의 대목이다. 도대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보셨길래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한마디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 희생했다는 것, 고난을 당했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이들에게 이미 ‘기득권’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신 것이다.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이 기득권이 아니다. 재물을 포기했다는 것 또한 ‘배타적 기득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부자청년의 경우와는 또 다른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포기가 어느새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로 내세워지는 순간, 그것은 거꾸로 영생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로 돌변하고 만다는 것을 단호하게 짚어내신다.

 

헌신과 봉사, 투쟁과 고난, 양보와 인내 등은 참으로 아무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칭찬받기에 족한 행위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권의 위치를 주는 조건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면, 즉시 그 첫째 되는 삶의 모습은 꼴찌가 되는 조건으로 변질한다는 매서운 경고가 여기에 담겨 있다. 가령, 독립항쟁을 한 것이 자기도 모르게 기득권으로 여겨질 때 독립의 영웅들이 비극적으로 타락했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고난 받은 이들이 그 고난의 열매를 기득권화시킬 때 무너진 것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다. 만사를 제쳐놓고 희생적으로 헌신했던 선한 신앙인들이 그 헌신의 삶이 차츰차츰 교회 안의 기득권이 되어서 신앙공동체에 깊은 상처와 괴로움을 주는 일을 우리는 곧잘 보고 있지 않은가.

 

갖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 선교공동체의 지휘본부가 되었던 초대 제자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배타적 기득권의 향유라는 “먼저 되었던 자가 나중 되는 위기”에 직면했던 것을 마가는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고백적으로 증언했던 것이다. 잘 참아놓고 그 참은 것을 내세우는 순간, 기껏 마음 넓게 양보해 놓고 양보한 것을 무언가 획득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는 순간, 순수한 뜻으로 겪은 고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전율해야 한다. 내가 버린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남과 비교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득권의 징표가 된다고 여기는 마음을 일거에 격파해버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특히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적 위계질서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로 전혀 가볍지 않다.

 

움켜쥐고 있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가는 길을 가로막는 기득권이요, 버린 것도 그와 다를 바 없는 영생의 장애일 뿐인 기득권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한국교회의 가슴을 뜨겁게 내리치는 음성으로 들린다면 이 도전은 우리를 마침내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더 보도록 하자. 출애굽기 4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머뭇거리며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대목은 호렙산 떨기불꽃 앞에 선 모세가 하나님의 파견명령에 대하여 거듭거듭 따를 수 없음을 밝히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여러 가지로 능력이 없어서 맡기신 일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소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진정 그의 능력 부족에 대한 겸허함 때문일까? 그는 애굽으로 돌아가서도 그렇고, 이후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불평과 반란, 그리고 배신을 수없이 겪게 된다. 이것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낼 것을 요구하여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이 심해지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모두 모세에게로 집중되자, 모세는 하나님께 “아니, 이럴 것을 뻔히 아셨으면서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라고 항변한다.

 

훨씬 이후에, 물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능멸과 질타를 당하자, 하나님에게 지시받은 대로 바위에서 물을 내게 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동안 엉켰던 부화를 있는 대로 다 터뜨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인간에 대하여 깊은 환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애굽 감독관을 해치우고 동족을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동족의 밀고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지경에서 광야에서 수십 년의 기막힌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내면에, 자신의 동족이 고난을 겪고 있다고 했을 때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아, 속히 달려가야지’ 하였을까? 아니면, ‘그런 종자들은 고생을 더 해야 정신을 차려’ 했을까? 혹여 고난의 자리에서 동족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가 인간에게 겪은 환멸의 상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종족으로부터 배신당했던 사람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의로운 일을 했다고 여겼지만 바로 그들로부터 배반당했다. 그로 말미암은 환멸의 상처로 울분을 삭이며 광야로 떠나야 했던 모세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지 못한다면, 이 호렙산에서의 모세의 거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그로써 인간에 대한 환멸의 경험이 존재한다면 이 모세의 심사를 헤아리고도 남지 않을까?

 

이런 일을 겪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신앙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환멸에서 정작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환멸의 강을 사랑으로 넘을 때 신앙은 우리 안에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신앙인들이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는가? 이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가 예기치 않게 당하는 좌절과 고난, 그리고 상처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성숙의 단계로 진입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사실 따져보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실로 얼마나 환멸스러운 존재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시면서,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고 고백한다. 신앙인은 바로 그런 역사에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인간에 대한 환멸로 신앙의 의욕이 꺾이고, 주저앉고 싶을 때 호렙산의 모세가 지녔을 심사를 떠올리면서 그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격려와 능력주심으로 마침내 환멸의 골짜기를 건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섰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성서가 이렇게 읽어질 때 우리는 성서에서 한없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생명의 꺾을 수 없는 소생력을 피와 살로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이든, 신학자이든,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평신도이든, 누구라도 말씀의 보화의 한 부분을 접하게 될 때, 자기가 발견한 것이 그 말씀에 담겨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여러 보화 중에 한 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온전히 찾아낼 수 없었던 그 말씀의 부요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에 대해 감사하고 뒤에 남겨둔 풍요에 대해 믿음으로 기다리는, 그리하여 항시 말씀에 영혼의 두레박을 내려 영적 양식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정보화 시대라 그런지 스마트폰과 인터넷 매체와 더 많이 쏟아지는 종이쪽과 그 밖의 각종 전파와 영상들이 유용한 것이라며 쉴새 없이 정보를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지식과 정보들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기보다 허세와 허상을 키워주고, 우리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주면서 ‘괜찮다’(예레미야 6:14) 할 뿐이다. 다들 뱃속 비어가는 것 걱정하며 ‘뱃속을 살찌우는 데’ 열심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뼛속을 살찌우는’ 말씀에(잠언 15:30) 더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사야서가 말씀하듯이 어떤 영화와 영광을 누릴지라도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기”(이사야 40:6, 8) 때문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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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18)

 

역사와 현실을 외면한 영성의 무기력함

 

 

모든 생명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간과 더불어 명멸(明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그 생명의 시간이 기록해놓은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 위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갈망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역사에 대한 되새김이 없는 존재는 그 생명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앎을 억압하는 것은 생명을 억압하는 것과 같다.

 

진시왕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서 역사를 짓밟으려 한 것은 생명을 멸시한 소행이었고,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역사적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안목을 기르지 못하는 인생과 공동체는 그 생명을 새롭게 발전시키는데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역사에 대한 되새김,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신앙의 길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주목하게 한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은 그런 측면에서 인류적 통사(通史)이며 이 통사적 맥락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의 구체적인 실존적 삶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이를 망각하는 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억하라, 기억하라”고 명하신다. 망각이 죄가 되고, 역사에 대한 되새김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눈이 어두워지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실존의 역사성을 주시하게 한다. 지금 당장 한 개인의 짧은 인생 여정만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긴 역사의 여정에서 바라보면 알게 된다는 이들 선지자들의 혜안은 역사와 현실, 그리고 개인의 삶을 가치 있게 일구어 내는 영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져야 할 것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선지자들이 범인(凡人)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역사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면, 이들의 영성은 매우 민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 있으나 아무도 이를 체감(體感)하지 못한다. 그 안에 있으면 그 움직임의 거대한 축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 거대한 축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존재이다. 그만큼 그들의 영이 맑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에 멸망과 번영의 갈림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투시(透視)할 수 있고 그 축의 떨림을 듣는다.

 

그렇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은 대세의 흐름 속에 휩쓸려가고, 그 실존의 자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에 아무런 반성 없이 따라가지만, 영성이 뛰어난 선지자들은 이에 저항하고 이겨내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역사와 현실에 마주하지 않는 영성은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참된 의미의 영성이 아니다. 자신이 타고 있는 배의 운행과 그 운명을 알지 못하고 그저 배안의 객실이 일등석인지 이등석인지를 따지면서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침몰하는 배의 일등석은 힘차게 항해하는 선박의 삼등석과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 영의 맑고 아름다움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소유하는 일의 핵심적인 관건인 것을 밝히신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외치신 그분의 음성은 역사와 현실이 하나님 나라의 뜻과 만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과 분리된 하나님 나라는 없다.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성을 목격하고, 이 비극적 사태의 반전 내지는 역전을 꾀하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도전은 한 개인의 실존적, 내면적 영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공동체적 현실이 되는 지점에까지 가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둘, 셋이라도 모인 자리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란 ‘홀로의 고독한 실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임재(臨齋)’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확대를 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장막을 치셨다)”는 요한복음의 증언은, 다름 아닌 역사와 현실, 그 안에 녹아들어 새로운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지목하는 말씀이다.

 

 

 

                                           류연복 판화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 몸이 되는 영성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서 몸이 되지 않는 영성은 관념이며 추상이고 허상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생명은 관념과 추상, 허상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와 현실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존(現存)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교회는 영성과 역사, 영성과 현실이 조우(遭遇)하는 작업에 소홀히 해왔다. 아니, 소홀히 해왔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했고, 이 작업에 반대해 왔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역사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도외시했다. 심지어는 영성이 흐려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우리 사회 전체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죄에 무뎌지며 교만과 거짓된 풍요로 비대해져가고 있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역사의 무수한 사건을 외면했으며 그러한 일들을 방치하는 것이 한 개인의 실존적 인생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신앙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 권력 앞에서 굴하지 않았다.

 

권세 앞에서 체념과 비굴과 기회주의가 길러지는 것은 한 개인의 영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부정의한 일을 보고 침묵하며, 자신의 개인적 복락에만 관심을 쏟는 존재의 영성은 건전한 것일까?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양극화로 고통 받는 이들의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 귀를 막고 있는 이들의 영성은 무엇을 위한 영성일까? 이런 마음과 영성을 지닌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역사에 무지한 채로 역사의 죄과를 되풀이하는 이의 영성은 존경받을 만한 것인가? 민족 분단의 적대적 현실을 보고, 어떻게 민족적 화해와 협력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영성은 제 아무리 묵상의 길이가 깊고, 교회생활이 충실하다 해도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기독교 신앙의 영성은 먼저 인간과 우주 만물의 아픔에 눈뜨는 일에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일이 우리가 목표하는 영성이라면, 그분의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았던 그 절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제대로 된 영성의 기초이다. 오늘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는,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우주 만물의 절규를 듣는 것도 요구된다. “이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고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묻는 과정,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이며 곧 영성 훈련의 절차이다.

 

생명의 기력을 받아 이 아픔에 다가가는 능력이 영적 성장이라면, 우리는 아픔에 민감하고 그 아픔을 낫게 하는 사랑의 마음을 풍성하게 갖는 것이야말로 영성의 전제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아파하는 존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은 없다. 자신을 남보다 강하게 할 능력을 사모하고 과시하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은 단연코 사탄의 영이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모든 영이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믿지 말라”(요한일서 4:1)고 한 사도 요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양의 탈을 쓴 이리의 영이 신앙인들을 혹세무민하고 있다.

 

강자를 추종하는 세상적 영성

 

역사의 희생자들, 현실의 패배자들이 내지르는 통한의 절규에 귀가 멀어있다면 그의 영성은 강자를 추종하는 세상적 영성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할 수 없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버려진 자들을 향하여 다가가신 예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교회가 일찍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추구하면서, 신앙 선배들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으며 그 동역자가 되려는 노력을 꾸준히 쌓아왔다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됐다.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체를 구현하라는, 그래서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힘있게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개인적 고뇌가 어떤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

 

그런데,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역사와 현실, 그리고 개인적 영성의 관계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자칫 범하게 되는 오류에 관해서이다. 역사와 현실을 말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또 다시 새로운 관념주의와 추상주의에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다. 생생한 역사와 현실보다는, 자신의 역사관과 현실 해석이 앞서서 생동하는 현실과 역사의 숨결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와 현실 속에 들어있는 개인적 실존의 고뇌를 드러내기보다는 당위론적 주장에 치우쳐 마음 깊이 다가가는 영성의 섬세함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역사와 현실이라는 거창한 구도 속에 파묻히는 인간의 실존 자체를 주목하는 일이 필요하고 또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현실이라는 규모가 큰 장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이 요구되는데 그에 필요한 접근 능력이 우리에게는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주장은 난무한데 감동은 없고, 이성의 설득은 충만한데 영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당위론적 결단은 있으나 신앙적 확신은 없는 상태를 낳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와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대목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구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개인적 고뇌의 현장에 대한 체험과 이해가 풍부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생생한 아픔과 갈망의 뿌리를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아픔에 다가가는 언어 또한 생경하지 말아야 하며, 구체적인 생동감과 언어적 탄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언어적 탄력성이라는 것은 그 아픔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채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그토록 다면적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개인적 고뇌가 어떤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를 보도록 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제라고 여겼을 때는 힘들지만, 그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의 증언과 간증, 그리고 현실을 듣고 보는 일은 점차 안목을 넓혀 가는 기초가 된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역사와 현실에 도전함을 ‘새로운 생명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겨자나무가 되어 공중에 유리하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로써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향이 그 삶의 기초를 잡아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생명 공동체의 존재와 성장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사의 영성이 바로 세워지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자라나며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일체의 모순은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바로 마주하지 않는 기독교 영성에서 비롯되는 것도 적지 않다. 역사가 잘못 갈 때, 현실이 모순을 그대로 지속하려 들 때, 그것이 한 개인의 실존에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월호 참사와 대량 실업과 가족 공동체의 파괴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적 영성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신앙 선배들이 보여준 실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명 공동체의 능력을 길러나가야 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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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17)

 

목사들의 참회록인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해서 광화문의 풍경은 살벌했다. 경찰은 시민들을 완전히 봉쇄하고, 유가족들은 범법자들처럼 끌고 갔다. 인륜의 바닥을 보인 정권이다. 자식을 잃고 그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요구하는 이들을 잡아가는 권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러는 걸까?

 

교회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어느새 “세월호”는 입에 담기 쉽지 않은 부담스러운 용어가 되어버렸나 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권력에 대한 비판, 정치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더 나가서는 지겹다고 하는 자들도 있으니, 이건 인간 이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1주기를 맞아 글을 올린 김동호 목사의 페이스 북이 난리도 아니었다. 노란리본을 다네마네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인데, 문제는 세월호 참사의 본질에는 단 하나도 다가가지 않고 노란리본 타령만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월호 1주기.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치인들. 정치인들이라고 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별로 진실성은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거리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 같은 느낌이 든다.”

 

노란리본 뒤에 숨은 위선과 가식을 꼬집는다. 이게 문제가 될 리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그의 페이스북을 소란스럽게 한 것일까? 김동호 목사는 “진실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진실성은 무엇일까? 이게 문제의 핵심이 된다.

 

김동호 목사는 자신이 노란리본을 선뜻 달지 못하는 것은 혹여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려고 그러지는 않은가 하고 돌아보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그래서 나는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리본을 다는 건 비겁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쉽게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 다는 것이 옳다.

 

그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추도예배를 가자고 권한다.

 

“막내아들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세월호 추도예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함께 가지 못했다. 추도예배 하나 가 놓고 나를 변명할까봐 그것이 싫었다.

혹시 우리 막내아들 녀석 내가 추도예배 같이 안 갔다고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생각도, 의식도 없는 애비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된다. 그건 아닌데…”

 

추도예배를 가지 않은 까닭은 그것 하나로 세월호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그는 그 나름의 추도방식과 슬픔의 예를 다하려는 것이라는 의지를 여기서 이미 읽게 된다. 그는 노란리본을 달았냐, 아니냐로 그 사람의 마음을 구분 짓고 갈라놓지 말라는 뜻으로 다음 글을 잇는다.

 

“노란 리본을 달면 종북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의 페이스 북을 보았다. 큰 일 할 목사가 노란 리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누가 충고했다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단 오대식 목사가 나는 좋다.

그래도 난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큰 일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종북좌파로 몰릴까봐도 아니다.

누군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군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안 달 수도 없지만,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달 수도 없지 않은가?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되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된다.

노란 리본 달았다고 다 바리새인도 아니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모두 다 보수 꼴통도 아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에는 노란 리본 단 목사도 있고,

나처럼 노란 리본 안 단, 아니 못 단 목사도 있다.

노란 리본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고,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너는 네 식대로 아파하고,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좀 아파 하자.”

 

맞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과 선택으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나누고 기린다. 그러니 김동호 목사의 선택은 그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뭔가 그의 글을 읽고 난 뒤 마음이 깔끔하지 못하다.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는 노란리본 달지 않은 자신의 마음도 아프니, 그 아픔을 그대로 인정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그러면 되는가? 유가족들이 지난 1년 동안 길거리 시위와 집회, 투쟁을 해온 시간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알고 이러는 것일까? 특별법을 뭉개고, 시행령도 무력화시키는 정부권력에 대해 그는 분노 한번 제대로 느껴본 것일까? 노란리본 단 정치인들의 진실성 문제는 바로 이 대목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위선의 정체는 진상규명을 가로막으면서 마치 진상규명하는 듯 하는 거짓에 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단 한마디도 없다.

 

이게 그가 아파하는 그 자신 나름의 방식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방식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가짜’일 뿐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파하는 것은 다만 자식을 졸지에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진상을 알고자 하는 일에도 권력의 기만과 탄압이 이어지고 있기에 더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에 함께 하려면,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세력과 맞서야 옳다. 그건 노란리본을 달았느냐 달지 않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다.

 

‘그래요? 어떻게 아프신데요? 아파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진성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진짜로 대면해야 할 문제를 피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심을 굳히게 될 수밖에 없다.

 

 

 

 

선한목자 교회 유기성 목사의 글 또한 그 글을 읽는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 그는 세월호 참사 당시 이스라엘에 안식년으로 있었다면서, 그 충격적인 소식에 며칠을 울고 지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그 때 썼던 일기를 공개한다.

 

“자꾸 눈물이 납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너무나 눌리고 너무나 우울하였습니다. 이처럼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고난주간, 예루살렘에서 이런 마음의 아픔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어디가서 소리질러 울고 싶을 뿐입니다.

밤에 겟세마네 교회와 베드로의 통곡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겟세마네 교회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베드로 통곡 교회까지 걸어갔습니다.

마음은 끝이 없는 심연으로 빠져듭니다. 눈에도, 코에도, 입에도 깊은 어둠이 덮혔습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허우적거려 보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묵상하는데 ‘너 자신을 위하여 울라’(눅 23:28) 하셨습니다.

자꾸 세월 호의 선장 생각이 났습니다. 세월 호 선장이 꼭 저 같습니다. 저 자신이야말로 ‘준비되지 못한 미숙하고 무책임한 선장’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납니다. ‘나는 잘 하고 있나?’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에서 내려 서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려설 수도 없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옵니다. 저는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나?’”

 

그는 무엇에 분노한 것일까? 왜 자신이 세월호 선장과 같다고 한 것일까? 담임목사의 자리에서 내려서고 싶지만 많은 이들이 뒤 따라 오기에 내려설 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디로 계속 나가고 싶다는 말일까? 도무지 행간이 읽히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깊게 슬퍼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는 회개와 겸손의 은근한 과시라고만 읽힌다.

 

그 1년 동안 유기성 목사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유가족들이 길거리에서 모멸을 겪을 때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난데없이 박노해의 시 <감사한 죄>를 인용하면서 자신을 질타한다. 마무리 지으면서 감사한 것조차 죄가 되는 세월에 대해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무슨 감사를 했기에 죄의식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 죄를 더는 짓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무언가 위선이 느껴지는 글이라고 한다면 왜곡일까?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는 이들 앞에서 감사하는 삶조차 죄처럼 느껴졌다면,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해야 하는 것이 당연치 않은가? 그러나 그의 글에는 그 뒤가 없다. 그냥 거기서 끝이다. 이걸로 그의 처신을 변호하고 있을 뿐이다. 유가족들은 오늘도 정부권력의 강제연행과 봉쇄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있어도 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다. 그게 ‘죄’ 아닌가.

 

오늘날 예수께서 한국교회의 이런 행태를 보시면 뭐라 하실까? 위장된 슬픔, 악과의 대면을 피하는 교활함, 진실을 요구하지 않는 비겁함, 우는 자를 내버리며 자신의 감사에만 취하는 이기심, 그리고 정작은 권력과 짝하면서 성채의 기득권을 누리는 탐욕을 정면에서 치고 나서지 않으시겠는가?

 

참회록을 가장한 기만을 중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은폐되고 있어도 분노하지 않고, 유가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슬픔 어쩌구로 대충 때우고 가는 교회, 목사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독교, 한국교회에 염증을 내고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아, 그 죄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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