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55)

 

‘쥐뿔도 없는 아모스’, ‘이름 없는 명문가’ (2)

 

아모스의 질타

 

죄를 지으면서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아모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들의 특권이 건설한 요새가 과연 안심하고 피해 있어도 될 자리인지 묻고 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을 경고한다.

 

너희는 망한다. 시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사는 자들아, 사마리아의 요새만 믿고서 안심하고 사는 자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의지하는 으뜸가는 나라, 이스라엘의 고귀한 지도자들아.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서 살펴보아라. 거기에서 다시 큰 성읍 하맛으로 가 보아라. 그리고 블레셋 사람이 사는 가드로도 내려가보아라. 그들이 너희보다 더 강하냐? 그들의 영토가 너의 것보다 더 넓으냐? 너희는 재난이 닥쳐올 날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너희가 하는 일은 오히려 폭력의 날을 가까이 불러들이고 있다. ……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야, 사라져라! 유다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말아라. 이곳은 임금님의 처소요, 왕실이다.’ 아모스가 아마샤에에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 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아모스 6:1-3, 7:12-15).

 

그런데 아모스는 정작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남쪽의 유다 출신이었다. 그러니 그가 이스라엘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하였다. ‘네 집구석이나 잘 챙겨,’ ‘네가 무언데 우리 집안을 헐뜯는가?’하는 비아양이 금세 그를 향해 반격처럼 꽂힐 그런 상황이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의 신흥 명문가 아마샤와 일대 대결을 벌이고 있으니, 이건 누가 보아도 싸움이 되지 않을 듯한 한판이다.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한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인데, 여로보암 2세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엘리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지한 예후의 자손이다. 예후는 또 누구였던가? 이스라엘의 정신적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 엘리사의 권고에 따라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그로써 바알 숭배의 근본을 뒤집어 엎어버린 인물이었다. 그로써 이스라엘은 일대 영적 개혁의 시기에 들어갔고,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새로운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여로보암이기에 그에게 한 구석 기대를 걸 만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주변 제국들을 제압하는 강국으로 융성함을 떨쳤다. 그래서 여로보암 2세의 치적은 남들이 넘볼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 치적과 융성함의 이면에는 정의가 짓밟히고, 정신적 타락이 만연하며,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것이 사는 것인가 보다 했고, 여로보암식의 지배에 저항하지 못했다. 나라는 비록 분열되었으나, 그래도 여로보암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고, 강국으로 주변의 경계심까지 일으킬 정도가 되었으니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도전할 세력은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새롭게 세워진 베델의 성전은 여로보암 체제를 종교적으로 옹호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아모스라는 인물이 출현한 것이다. 여로보암 2세로서는 한참 끗발 좋게 잘 나가고 있는 판국에 웬 낮도깨비 같은 자가 나타나서 잔치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아모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부정과 타락과 부정의의 죄를 신랄하게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 예언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이 따위로 살면서 온전할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리라고 여겼다가는 오산이다. 늦기 전에 돌아서라. 아니면, 모두 망할 것이다.”

 

이렇게 여로보암 가문을 비난하고 다니는 것을 아마샤가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혹세무민에다가 온갖 유언비어 그리고 왕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까지 함부로 하고 다니는 이런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의 입을 막으려 한다.

 

“유다 출신 주제에 어디서 와서 행패냐? 여긴 너 따위가 입을 벌리고 다닐 그런 땅이 아니다. 너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명문가의 왕이 계신 처소요, 왕실이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에게 반역하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정작 그는 왕이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쥐뿔도 없는 아모스’, ‘이름 없는 명문가’

 

그때 아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아마샤, 너는 베델의 명문가 제사장이라고 뻐기는구나. 그래 나는 무슨 이름난 예언자도 아니고, 또 누구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은 바도 없다. 나는 명함 한 장 없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자신을 묘사한다. ‘나는 집짐승이나 먹이고, 돌 무화과나 가꾸는 천한 놈이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그래, 나는 네가 보기에 밥이나 빌어먹게 생긴, 쥐뿔도 없는 놈이다. 그런데, 그런 천한 놈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내리셔서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내셨다.’

 

아모스는 이런 말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을 가로막느냐?’ 그가 자신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행위를 ‘붙잡아 내셔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들판에서 계속 그대로 양을 치고 과실수를 가꾸는 일에만 묻혀 있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신 하나님의 영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초라한 행색과 그 출신을 보고 능멸하였으나, 아모스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 ‘쥐뿔도 없는 아모스’가 그 대단한 명문가의 세도와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광경은 눈부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는 위엄과 생명의 영력이 그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너희의 삶이 사실은 망할 길을 재촉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의 삶이 도리어 죽을 길을 달려가고 있다는 경고’, 이것은 실로 특권에 대한 역습이다.

 

아모스는 이를 불평등이라든가 아니면 부정의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문제로 우리들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특권은 죽음이고, 특권의 폐지는 생명이다’라는 결론이다. 쥐뿔도 없는 자가 도리어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특권을 화려하게 누리고 있는 자가 이미 죽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밥이나 우선 먹고 보자’와 ‘정의를 먼저 세우자’의 싸움이기도 했다. 배가 고플 때 정의는 사실상 생각하기 어렵다. 반면에, 배가 부르면 정의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부정의하게 유지해온 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느라고 더 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체질이 이미 그렇게 먹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정의가 없는 배부름은 모두를 결국 타락하게 하고 죽음의 길로 이끌지만, 정의가 있는 배고픔은 순결한 훈련과 감사의 과정이 되며 정작 배가 찼을 때 정의로운 능력을 지니게 된다.

 

정의를 잃어버린 풍요의 비극

 

오늘날, 이 나라의 되어가는 형편은 정의를 잃어버린 풍요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풍요조차도 지금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여 있다. 세월호 사건은 그 단적인 예이다.  정의를 떠난 풍요를 향해 온 사회가 질주하는 것은 잠시의 배부름을 가져다주고 명문가의 세도를 누리게 해주는 듯하지만 결국 죽을 길을 재촉하는 일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일깨우신다.

 

가난한 자에게 인정을 베풀고, 힘없는 자를 짓밟지 않고, 부정의한 길로 가문의 세도를 부리는 이들을 결코 존경하지 않으며, 술수와 권력과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을 단호히 거부하고 가진 것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일을 게을리한 사회는 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여,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논리로는 그의 지위나 달성한 목표가 기준이 되지만, 진정한 기준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존재 내면에 타자에게 나누어줄 만한 인격적, 영적, 정신적 힘이 얼마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내용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그 마음이 교만하고 편협하면 그 지위는 오욕의 현장이 된다. 아무리 성취가 대단해도 그 영적 내용물이 천박하면 그는 헛살았다고 할 수 있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그가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한없이 겸허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만드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열정이 다 식어버린 곳에 다시금 재기의 열망을 불어넣는 영적 강렬함이 있는가, 재빠른 계산과 이익에 눈이 어두운 현실에서 굳건한 양심과 순결한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나타나면 갈라졌던 이들의 사이가 하나가 되고, 그가 나타나면 침울했던 자리에 활기가 돌고 그가 나타나면 답답했던 심정이 뻥하고 뚫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멋진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무한경쟁 시대에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며 풍요와 가난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에 실패한다면, 열매가 별로 많지 않거나 또는 그 맛이 별 볼일 없어 힘만 들고 망쳐 버린 포도농사를 한 셈이다. 포도열매를 내놓아야 할 계절이 왔음에도 내놓을 것이 없어 막막해지는 자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시인 도종환은 <나리소>라는 제목의 시에서 어떤 깊고 잔잔한 못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뜻을 묻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나릿재 밑에 있는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영혼의 선함이 같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존재에게서 나오는 힘이야말로 세상을 진실로 감동시키고 또한 새롭게 할 수 있음을 그는 믿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곳에서 요란해진다. 그곳에서 자신의 선함을 버린다. 자신의 반짝거림을 내세운다. 사랑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가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잘난 여로보암과 그 대단한 아마샤가 보기에, 아니 스스로 보기에도 내세울 것 없는 아모스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에 자신을 다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대단한 명문가처럼 여겨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음을 깨우쳐야 한다. 세상이 우습게 여겨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서 ‘이름 있다’하시면 그 이름이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류의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명문가는 특권을 누리는 가문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이들의 집안이다. 한마디로 ‘이름 없는 명문가’이다.

 

우리 민족도 그런 비전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없는 명문가! 그것은 네모난 삼각형, 각이 진 동그라미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이다. 또다시 새롭게 주어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이름없이 빛도 없이, 바벨탑을 향한 특권을 소멸시킬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우리들이 그런 일에 의미있게 쓰이기를 기도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힘써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이름없는 자 같으나 이름있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모두를 풍요하게 하는 자요”라고.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특권의 위계질서, 이름없는 명문가(1)  http://fzari.com/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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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호의 너른마당(54)

 

특권의 위계질서, 이름없는 명문가(1)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겨울사랑>, 고정희

 

추운 시절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모닥불 하나 쬐게 해주지 않으려는 기세로 우리 앞에 있다. ‘무한경쟁’이라는 슬로건에 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은 높게만 쌓여가고 있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는 문이 잠겨 있다. 그 어디에도 치자꽃 향기 풍기지 않고, 혈관 속에 별이 운행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소백산은커녕 우리의 마음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짓만이 널려 있는 오늘이다. 그윽한 기쁨이 아니라 경박한 쾌락이 범람하며 이윽한 진실이 아니라 포장된 위선이 득세를 하고 있다. 한 번의 겨울도 제대로 버텨내기 어려운 세상인가.

 

그 여파인가. 요사이 젊은이들은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의 풍조가 만연하다고 한다. 실리우선주의가 가정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런 모습이야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슨 대단하게 생경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과거의 경우 인생사를 살면서 지쳐버린 기성세대의 대체적인 사고방식이었는데 사랑과 패기로 살아가야 할 세대조차 그렇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회의 병든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사람보다 그 사람을 이루는 집안배경과 능력 위주로 상대를 고르는 것이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결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결혼하는 셈이니 그 조건이 변해버리면 그런 때에는 어떻게 사태를 감당하려는지 걱정이 든다.

 

사람이 좋아서 함께 만나 가정을 이루어도 어려운 고비가 무수히 있게 마련인데, 조건으로 결합한 가정이라면 헤어지는 일도 아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람이 좋아도 조건이 불편하면 사랑이 깨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깨질 사랑이면 애초에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장애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자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실리주의라는 우상숭배

 

서로 처지가 사회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면 부모들이 들고 일어나서 기를 쓰고 말리는 경우도 우리는 적지 않게 본다. 그렇게 해서 갈라놓고 손해 보지 않을 결혼, 이익이 남는 결혼을 골라서 시키느라고 혈안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괜찮아도 집안이 볼 것 없으면 일단 합격선에서 밀려나지만, 집안의 명성이 드높으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덤으로 올라간다. 이런 시각은 신앙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가치관과는 전혀 반대이다. ‘그 사람의 환경과 주변이 좋든 나쁘든 문제는 그 사람 자체이다’라는 하나님의 시선과는 딴판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과거가 혹 문제가 있다 해도 그걸 약점으로 잡아 걸고넘어지지 않으신다고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비교해보면, 그 사람이 선택한 것도 아닌 환경을 가지고 시비로 삼는 것은 실로 잔인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현실이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경쟁시대에 실리주의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의 증상이다.

 

무엇이든 그 집안의 명예와 위신을 높이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가 그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뻑적지근한 가문과 연을 맺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사회적 위상에 변화가 오는 것을 기뻐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이를 수치로 받아들여 한사코 반대하는데,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명문가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들은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내는 집안이 되면 남들이 존경해주고 알아주고 떠받들어주고, 그런 집안과 알고 지내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상 이것은 열등감의 발로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단지 혈통의 확인과 그 계보의 기록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그런 콤플렉스의 깊고 깊은 흔적이기조차 하다. 따지고 보면 허무한 치장인데도 사람들은 그런 치장으로 자신을 높일 수 있다고 여기기에 족보의 명은 길다.

 

한 가문이 권세를 잡으면 권문세가가 되어서 어이없게도, 성씨가 같다는 이유 하나로 한 시대를 호령했다. 그리고 그런 호령으로 한번 특권층이 되면 마르고 닳도록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별별 수단을 다 쓴다.

 

예전에 이완용의 후손이 땅을 찾았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말할 수 없는 수치이자, 특권구조의 강고한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여 이 특권구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후손은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그런 당당함을 용납해주고 있는 우리나라의 법이란 것, 우리 민족의 의식수준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막막해질 지경이다.

 

따지고 보면, 이완용의 집안은 당시 실로 명문가였다. 그는 당대의 천재라고 사람들이 부러워했고, 나라가 망해도 그 집안은 귀족이 되어서 권문세가의 위엄을 부릴 수가 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무수한 명문세도가들이 나라의 패망과는 상관없이 몇십 간짜리 대궐 같은 집을 그대로 움켜쥐고 자신들의 일신의 영달을 누렸고, 그 자손들은 일본, 미국, 영국 등으로 유학을 다녀와 고스란히 다음 시대의 지배자들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민중은 수탈당하고, 독립이요 뭐요 하면서 가정이 파산 나고 육신이 일그러지는 동안에 이들 명문가들은 ‘세월이 이렇게 좋을 수야’하면서 민족의 현실은 아랑곳없이 끼리끼리 연을 맺고, 특권의 바벨탑이 무너질세라 판검사를 배출하고,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박사들을 배출했다. 그 판검사들과 국회의원들과 박사들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보면, 기도 차지 않는다. 힘 좀 있다고 죄 없는 사람 가둬, 돈 없는 사람 중형을 때려, 기회만 있으면 부패와 부정을 저질러, 교묘한 말로 권세가들을 옹호해, 그렇게 살면서 밤낮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서 정력 보강하느라고 기를 쓰다가 곱게 못 늙고 날이 갈수록 추해지는 것이다.

 

 

경쟁시대, 귀족 가문의 커넥션

 

그런데 이런 으리뻑적지근한 위세를 지닌 사람들이 그 집안을 채울 때 사람들은 그런 집안을 가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집안과 연을 맺으면 덩달아 명문가가 되는 길이 열린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특권층들이 귀족가문의 커넥션으로 되어가고 있다. 깊이 들여다보면, 얼키설키 엮어져 있는 그 혼맥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중추에 누가 버티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자기들 정도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간으로 생각도 않는 그런 현실이 한쪽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변화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종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로써 한국사회가 특권의 배분을 통해서 위계질서화하도록 만들어간다. 그래서 세상이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명문가라는 것이, 알고 보면 특권을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철벽을 쳐놓고 으스대는 이들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나라를 망하게 한 자들, 나라를 부패하게 하고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자기들 세상처럼 굴다가 민족 전체를 곤경에 몰아넣은 부류들은 대체로 이런 자들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까? 힘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예가 없다. 아니 나라를 망하게 할 힘조차 없는 이들이 어떻게 그리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이들은 나라의 패망 앞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섰으면 나섰지 특권층들처럼 나라의 주인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어도 내내 1등석에 앉을 궁리나 하면서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다.

 

현대 한국사회의 특권층은 결국 중세봉건체제가 근대적 과정을 거쳐서 해체되기보다는 일제 식민지체제로 이어지면서 낡은 토지소유관계가 상당 부분 잔존하면서, 이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 한국사회의 근대사를 장악해버렸다는 점에 그 역사적 출생을 찾아볼 수가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3-4퍼센트의 인구가 전국 토지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러한 토지소유의 집중화는 특권의 질서를 견고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해방 당시, 중세봉건적 잔재와 일제 식민지시대의 토지소유관계를 일제히 정리하여 새로운 민주적 토지소유관계로 전환하는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했으나, 권력과 결탁하여 토지소유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주도하면서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심화가 확대재생산되는 사회에서 특권을 폐지하고 누구나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경제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공평무사한 경쟁의 무대를 만들어주는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정치가 그런 개혁적 방향으로 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토지귀족이 길러낸 정치가와 산업자본가들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현대판 귀족체제를 형성하여 자신들의 배타적인 세력을 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적 활력에 상처와 절망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돈 없는 이들은 계속해서 고생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봐야 잘 살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되어 있다’는 좌절감이 깊어지면, 특권의 위계질서 자체가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는 한 사회의 건강한 결속력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부자들에 대한 무작위적인 증오를 기반으로 하여 폭력을 행사했던 사례들은 이러한 사회의 극단적인 병세라고 하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해방 반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보면 명문가의 허무함을 볼 수 있다. 인도의 네루 집안, 파키스탄의 부토 집안은 그 출발의 역사성과는 달리 그 자손들이 부패의 늪에 빠져 나라와 가문을 망신살 뻗치게 했다. 특권에 안주하면서 그것이 보장해주는 안전망에서 범죄적 행동을 자신의 삶의 스타일로 삼은 자들의 비극이다. 애초에는 훌륭하게 시작했던 가문이, 한마디로 집구석이 엉망이 된 것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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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3)

 

삼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돌아가신 법정 스님을 생각하면 “무소유”의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이 분 앞에서 한국교회는 “과소유”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불교와 가톨릭계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어른들이 계신 반면에 개신교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다른 종교와의 관계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사셨던 나사렛 예수의 길을 우리가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꾸 “거탑(巨塔)”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로 그 목회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무소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종교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상숭배가 있다. 말로는, 교리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배척하면서 돈이라는 맘몬 우상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한국교회는 돈, 금력이라는 우상 앞에서 매일 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축복을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그 축복의 정체가 부자 되기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이 사회의 정의를 이루는 것보다 높게 평가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불행하다. 힘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 사회의 고통을 껴안고 아파하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를 질타하고 스스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이 부하게 되는 길을 찾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짠 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다.

 

신도들이 애써 번 돈을 쉽게 가져가는 곳이 교회라면, 그래서 그 교회가 자기를 살찌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이미 큰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교회를 매일 생존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이 땅의 가난한 서민들이 어떤 눈으로 보게 될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다. 으리으리한 성전과 화려한 장식이 믿음을 길러주는 것일까? 거대한 성전의 위용이 신도들을 모으면 그곳에 예수님께서 들어서실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돈의 종교가 되고 있다하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돈을 벌게 해주기만 하면 모두 용서되는 것인가? 권력도 기업도 그리고 인물도 모두 이 돈을 위한 성공이라는 척도로 평가하면 다 끝나는 것일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로 간 것인가.

 

돈을 번다면 강도 다 파헤치고 산도 허물어버린다. 그 단적인 예가 4대강 사업이었다. 다 돈 때문이다. 이렇게 파괴된 자연을 누가 어떤 수로,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되살려 놓을 수 있겠는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동영상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보수언론은 묵묵부답이다. 한 때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비리와 불법을 폭로한 적이 있었다. 그가 펴낸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이건희 회장 일가가 얼마나 많은 비리와 불법을 자행하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는지가 다 드러난다.

 

삼성은 어떤 기업인가? 한국 최고의 세계적 기업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최악이다. 회사 돈을 자기 돈처럼 물 쓰듯 쓰고, 탈세와 탈법을 쉽게 저지른다. 삼성이 이 사회 곳곳에 처 놓은 그물망과 같은 동맹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성 장학생이 줄지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회는 부패해지고 온갖 비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벌어진다. 삼성이 한국사회의 권력이 되고 있고 그 삼성을 향한 이 사회의 신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삼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런 식의 복음이 퍼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건희 회장 일가의 전유물처럼 전락해버린 삼성은 그 안에 있는 무수히 정직한 이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삼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민들을 모독하고 있다. 그러면서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부정의한 생각을 유포하고 있다. 2009년 이명박 정권은 이건희 회장을 특별 단독사면했다. 법은 차별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실과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만 봐도 이는 입증된다.

 

하기사 ‘깨끗한 부자’를 설파한 어느 목사는 한 때 남강 이승훈 선생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동격의 차원에서 언급하면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님에게”라는 구구절절한 편지를 띄웠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화려한 거탑을 꿈꾸는 마음으로는 진정한 신앙은 없다. 예수님은 그 웅장한 성전이 민중들의 피를 빨고 돈으로 가득 찬 것을 알아보시고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그런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서민들의 마음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삼성의 금력이 신앙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는 예수의 삶을 다시 자신의 신앙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무소유가 어렵다면, 소박하고 간결하게 살아가는 훈련을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목회자부터 그리고 지위가 높을수록 비싼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교회가 진정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깨달아질 것이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돈의 권력이 숭상되는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는다. 십자가도 없다. 삼성과 십자가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니, 도리어 십자가는 삼성의 권력과 맞서는 이들이 지고 가는 표징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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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2)


하나님의 마음, 그 여성의 힘


여러 가지 복잡한 정세 속에 놓여 있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역사적 진전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젊은이들 가운데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절망할 일만 잔뜩 있다고 여긴 세상에서 아름다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지금은 그동안 남성들이 대체적으로 주력해온 강압과 폭력, 그리고 지배의 시대에 맞서서 여성들의 섬세한 시선과 아픔을 다사롭게 품어내는 마음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그 어려운 연수과정을 끝낸 뒤 판검사로 임용이 된 젊은이들 가운데 절반이 여성이라는 현실도 오늘날 이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합니다. 에전에 의정부 지검의 임은정 검사는 과거사 재심사건인 박형규 목사 민청학련 사건에 ‘백지구형’ 지시를 거부하고 구형을 내리기 전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몸을 불살라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며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달 자살한  김 모 검사 건에 대해서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부지검에서 연판장 돌려야 하는거 아니냐. 평검사회의 해야하는거 아니냐" 며 "내부에서 더 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리지 못한 죄로 동료들 역시 죄인이라 누구탓을 할 염치도 없었다'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덧붙인다면 판검사가 된 이 여성들이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자신을 바칠 줄 아는 아름다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자신의 죄와 모순을 밝히 깨닫고 무엇이 가장 옳은 일인지, 가장 가치 있는 작업인지 깊이 알아가게 될 것이며 그로써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줄어가게 될 것입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드러나는 여성들의 역할 역시 그 의미가 깊습니다. 우선 그의 어머니가 되는 마리아를 보아도 우리는 그녀가 단지 수동적으로 성령 잉태한 한 시골의 처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당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껴안고 있었고, 당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실현되기를 매우 적극적이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패배주의와 운명론적 사슬에 묶여 자신의 삶과 시대의 불행을 탓하고 있기만 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그녀의 찬가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새로운 생명의 시대를 열어나가게 되는 기쁨을 확고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분명한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노래를 통해서 권력과 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오만한 자세로 살고 있는 이들이 언제까지나 떵떵거리며 시대를 호령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과 행동 앞에서 졸지에 무력해질 것을 내다봅니다. 그리고는 가난과 고통과 힘겨운 삶에 짓눌려 있던 이 세상의 작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체세력으로 우뚝 일어설 것을 예견합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는 그리하여 그저 한 여인의 기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시대를 넘어서 모든 가난하고 약하며 현실을 감당하기에 힘이 없는 작은 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압축된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삶 속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후 세상의 약한 자들을 가리키면서 “이 작은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은 하나님의 시선이 누구에게 머물러 있는지, 그래서 인간사의 새로운 활로를 어떻게 뚫어내시려는 것인지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크고 강한 것을 숭상하는 시대에 작은 존재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배우고 깨닫지 못하면 어느새 인간은 크고 강한 것에 복종하고 그에 기회주의적으로 들러붙어 선과 의를 내버린 채 사는 타락과 죄악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와는 달리, 작은 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이들에게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을 힘을 주시려는 하늘의 응답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하여 그녀의 몸은 그저 몸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생명의 능력이 충만해질 대로 충만해진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곧 예수 탄생의 현장이 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몸으로 태어나는 모든 자리에는 바로 그렇게 이웃의 아픔과 시대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고 살려는 존재가 가진 영혼의 아름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는 바로 이 영혼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얼마나 충만하게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자칫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종교적 포장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직시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에는 절절하나 이웃의 필요에는 무관심하거나 또는 냉정한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과 함께 이기적인 신앙인도 더욱 증가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래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몸으로 짊어지고 살려는 간절한 기도와 자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아픔은 보이지 않은 채, 언제나 자신의 필요만을 먼저 앞세우는 신앙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이 아름답지 못하면 그곳에 하늘의 능력을 품은 생명의 진정한 탄생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이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깊이 품어내는 여성의 힘을 가지시고 계십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하면서 이스라엘의 현실을 아파했던 예수님의 탄식은 바로 그 대목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경쟁과 지배와 폭력과 기만으로 얼룩진 이 시대를 새롭게 살릴 힘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품어 되살리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얻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태어나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진정 부요해지는 길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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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43)

 

‘성역(聖域)으로 둘러싸인 불법’과 침묵

 

1970년 이후 한국교회의 모토는 ‘성장’이었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 성장정책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면서, 전도의 열정과 함께 결합하여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져왔다. 경제계의 재벌과 종교계의 대형교회는 성장주의 시대의 일란성 쌍생아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형교회는 다른 무수한 교회의 선교적 모델이 되어 성장 자체가 곧 절대가치로 군림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성장하지 못하면 발언권이 없고, 성장하지 못하면 그것은 존재 이유가 없는 목회가 되고 말았다. 양적 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었고, 양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목회자가 곧 지도자가 되었다. 성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성장의 신앙적, 윤리적 기초는 성찰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회성장론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현실과 맥을 같이하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에 따른 경영방식과 지도력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성장 모델을 선택했고, 목회자는 정신적 지도력이 아니라 경영수완이 좋은 CEO와 구별이 되지 않게 되어갔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보다 많은 교인들을 교회에 들어앉게 해서 그들의 돈으로 교회를 살찌우는가에 있었다. 결국 교회는 날로 융성해져 갔지만 한국사회는 그에 비례하여 정신적 감화를 받아 순결해진 것은 아니었다. 성장은 곧 성공이었고, 성공 스트레스는 모든 교회를 압박했고 이로써 교회는 세상의 성공사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니 자연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품어 안은 선교적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시장논리가 교회를 점령한 양식이었다. 시장논리란 무엇인가? 그 논리의 핵심은 수용자의 요구에 맞추고 그 대가를 현금화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교회는 무수한 문제의 덫에 걸리기 시작한다.

 

이기적 탐욕을 종교적으로 승인해 주는 기복주의는 공식이 되었고, 교권주의는 당연하게 통했다. 권위주의적 CEO의 지휘 아래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통용되었던 것이다. 돈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적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소멸되어 갔다. 이미 자신의 개인적 자산처럼 되어 버린 교회를 세습하려는 욕구는 그리하여 당연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사적 영역과 통하게 되었다. 재벌기업의 2세 상속과 다를 바가 없는 논리가 수용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돈의 힘과 교권적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된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은 성(性)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개인적 차이가 있다 해도, 이렇게 한국교회의 속살은 깊이깊이 썩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인들의 세속적 탐욕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면죄부를 받아 양심의 가책을 제거해 버리고, 기복의 대상이 되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들 수용자들의 요구가 충족되는 대가로 헌납한 돈을 가지고 ‘성역(聖域)으로 둘러싸인 밀실에서 무한대의 윤리적 타락’을 자행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윤리적 타락은 목사가 불법으로 임대사업을 해서 벌어들인 수천만원의 돈을 '특별헌금'이라는 항목으로 보고해도 교인들은 묵인하고 받아들이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불법을 알면서도 그 건물에 세들어 있는 교계 언론(교회개혁을 표방하는)의 묵인이다(이 부분은 후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다뤄보기로 한다).

 

이렇듯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일종의 특권이 되어 버린 것인가. 이 특권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도전하는 것은 종교적 불경이 되어 버렸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성장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본질적인 질문들은 억압되어 갔다. 목회자 후보생들은 이러한 굴레에 굴종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배워 가면서 영적으로 탈진해 갔고 이들이 교회를 맡을 때쯤이면 윗 세대와 그리 달라질 것이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이 이어지게 될 때, 한국교회의 장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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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칼을 맞으려는가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하는 말은 그가 매우 선량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사람은 법이 없다면 어디 보호받을 데가 없어 곤경에 처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뭔가 석연치 않다. 왜인가? 그건, 법이 선량한 사람들, 약자들을 보호한다는 전제가 서 있을 때 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법이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놓고 그 권리를 박탈해버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본다. 법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법도(法道)가 아니 법도(法刀)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법의 탄생은 언제나 권력자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법은 그 권력자의 이익을 지켜내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을 족쇄에 걸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들먹인다. 그가 죽으면서 악법도 법이라고 했으니 그만한 철학자가 인정한 국가의 법은 그 내용이 악하더라도 공공의 질서를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왜곡되었다. 악법도 법이라는 것은, 법이 다 모두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법에는 악법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법이라고 다 존중하고 선하며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악한 법에 의해 그 고명한 철학자가 타살당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철학자를 죽이는 법, 문제를 제기한 지식인을 죽이는 법, 그건 악법이라는 것이며 그걸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들으니 목숨을 걸었던 것 아닌가?


악법을 정당화시킬 때 소크라테스의 권위는 이용하면서, 그가 치른 희생의 의미는 슬며시 지나친다. 이래가지고서는 법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악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며 인류의 스승에게 칼을 겨눈 법은 더더욱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악법은 왜 악법인가? 그것은 그 법이 그 사회의 기득권자, 권력자, 강한 자의 이익만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법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논리는 무너진다. 법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벌 회장들에 대한 사면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법은 차별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실과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만 봐도 이는 입증된다.


근대사회는 과거 봉건시대처럼 권력자의 자의대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법치(法治)사회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권리가 법으로 보호되고 자의적 정치행위가 이로써 제동이 걸린다고들 믿는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법치는 인치를 위한 법체계일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이 인류의 역사다. 약자의 권리를 지켜내는 법이 애초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기득권 질서를 강화하는 법으로 인한 억압과 희생에 반발하고 저항해서 일어난 운동과 사건들이 그 법의 성격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이 근대의 역사를 열어간 과정이었다. 하지만 근대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법을 성숙시켜온 것은 아니다. 권력자들은 일단 권력을 잡으면 법에 의한 약자의 보호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더 크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법을 만드는 권한마저 가지고 있으니 이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프랑스 혁명 이후 가장 민주주의적인 법이라고 나온 미국의 헌법도 그 제정자들이 노예소유주들이었고,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갖는 것을 최대한 제약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법의 역사와 법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른바 실정법이라는 것은 일단 어떤 것이든 현실의 기존질서로 되어 있는 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만들어 낸다. 양심상 잘못된 것을 알아도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바로 그거다.


이런 와중에도 사법부가 양심적 판결을 내리면 이에 대한 공세가 시작된다. 양심과 현실적 법체계 사이의 싸움도 전개된다. 이른바 법 감정이라는 이상한 용어도 동원된다. 철저하게 법관의 양심, 양식, 법에 의한 판결을 대중들의 법 감정으로 평가하고 난도질 하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다. 권력자의 마음에 드는 판결은 언제나 옳고 그래서 법을 지켜야 한다, 법질서가 중요하다, 하면서 그렇지 못한 것은 국민 법 감정 운운하면서 꺾으려 드는 것이다.





법(法), [물(水)이 흐르듯(去 ) = 法] 가게 하라


법은 어떤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봉건 시대의 법이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지 못하며, 새로운 기술 환경의 발전이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적 변화는 구시대의 법을 옳다고 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이 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새로운 소통 기구가 나오면서 민주주의의 보다 폭 넓은 소통 공간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마저도 한국 정치에서는 선거법 운운으로 검찰의 단속 대상이 된다. 법이 얼마나 현실에 못 따라가는 구닥다리인지 입증 해주는 예이다.


법(法)이라는 한자를 봐도 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물(水)이 흐르듯(去 ) = 法] 가라는 것이다. 그건 인간의 양식과 시대의 요구를 담아내라는 뜻이 그 안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요구하는 현실에 있다. 이걸 거스르면 그건 법이 아니라 거꾸로 그걸 배반하는 역(逆)일 뿐이다. 참으로 요상하게도 사법부의 판결에는 칭찬할 만한 것 말고도 일반 상식을 깨는 논리가 횡행하는 느낌이다. 절차는 문제가 있으나 결정사항은 위법은 아니다, 라든가 하는 식의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다.


한 때, 컨닝은 문제가 있으나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든지, 사법고시 대리시험은 문제가 있으나 그렇게 해서 합격한 것은 불합격 취소할 수 없다,는 등 이런 식의 해괴한 논리에 대한 풍자가 잇따르기도 했다. 법조계 스스로 자신의 얼굴에 먹칠한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정의 문제는 결과에 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며, 문제가 있으면 원상복구가 원칙이다. 부당한 해임에 의해 직책이 복구되자 이에 대해 직위는 인정하나 권한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궤변이 해당기구에 의해 나온 경우도 있다. 권한 없는 직위라는 것이 있었는가?


한국 사회가 마주하는 법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이러다가는 과정의 가치를 우습게 아는 사회가 될 뿐이다. 법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능멸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누가 법을 지키려 들겠는가? 법을 지키는 자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다. 법은 가급적 피하고 볼 일이 된다. 그러다가 문제가 되면 권력에 의탁해서 법망을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최근 일판만파로 번지고 있는 ‘정운호 게이트’가 그 단적인 예가 아닌가. 이게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마주하는 법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유능한 자는 누구이겠는가?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최대한 강화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법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건 강자들이다. 그러니 약자들은 날로 이 법에 의해 희생제물이 된다. 법은 원성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면서 대화로 풀어나갈 일도 죄다 법으로 풀려고 한다. 그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려주니까.


정치도 법, 경제도 법, 사회문제도 법, 하면서 법 만능주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법은 성찰의 능력이 없다. 법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법은 이미 그 법 탄생의 과정적 요구에 의해 그 법 해석의 권한이 약자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기에 법정에 들어서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이미 상당히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 내용은 둘째 치고 정당한 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법의 이름을 내걸고 윽박지르고 그러면서도 ‘법대로’ 집행하겠다는 소리가 쨍쨍한 오늘의 법 현실이 ‘법이 무어냐’고 몰아 세운다. 왕과 양반들의 봉건왕조시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해방 이후 거듭된 군사독재정권의 통치가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은 법과 멀어지게 되었다. 현 정부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가까이 하면 다치는 법은 여전히 칼이었고 칼자루는 권력이나 돈,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들이 쥐고 있다고 믿게끔 되었다.


법이 표방하는 이상과 현실이 이렇게 다를 때, 우리는 법의 근본 가치인 정의와 평등을 곰곰이 색각하게 된다. 흔히 사회에서는 ‘법대로’ 죽이고 처벌하면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죽으면 언짢아” 하시고(에스겔 18:32),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같이 아무런 힘이 없어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을 들어올려(누가복음 1:52 참조) 실질적인 평등을 이루어주신다.


하나님의 칼을 맞을지 모른다


이제는 참으로 이 나라에 ‘법을 세워야’(아모스 5:15) 할 때이다. ‘덫’이나 ‘함정’처럼(호세아 5:2), 칼처럼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분열시키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는 법들은 모두 없애야 한다. 아울러 그 아래에서 누려 온 기득권과 특권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한다(이사야 59:3-15). 앞서 언급했듯이 물이 흐르듯 사회 곳곳에 흘러가 약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고 강한 자들의 힘을 억제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는 ‘생명의 법’(에스겔 33:15)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법의 으뜸을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때(마가복음 12:29-31) 정의가 서고 평화가 그 뒤를 따를 것이다(시편 85:13).


만약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예레미야 2:8)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림 없이 법을 칼처럼 휘두른다면, 우리는 또다시 ‘질서유지’란 명목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씻기지 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그러다 하나님의 칼을 맞을지 모른다(에스겔 22:14-21).


그렇다면 성서는 이에 덧붙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한다. 거할 곳이 없는 나그네를 돌보라고 한다. 이게 법 정신이다. 하나님의 법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권리를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이 법의 출발점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 있다고 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이걸 알지 못하고 자기들 위주로 법의 정신을 해석한 자들이다. 그래서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멸시했고 죄인으로 몰았다.


나사렛 예수는 이러한 법 현실에 대해 분노했고 저항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만들어 놓고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기회도 봉쇄해 버리고 만 것에 대해, 이건 아니라고 일갈하셨고, 이걸 바로 세우지 못하는 한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가슴 아파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법은 약자들의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고도 멀쩡하다. 그 피눈물을 보고 애통하는 법조인들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공격 대상이 되고 만다. 법은 그렇게 해서 권력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사회에서 법은 최소한 원칙이다. 서로 상생하면서 잘 살아보려면 상대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차별적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게 법의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걸 거꾸로 뒤집어야 법 정신이 된다. 그로 말미암아 현실은 법조문의 위압적 지배 아래 숨죽인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하는 말이 있다. 법이라면 적어도 인간의 존엄성과 그 본래적 권리를 짓밟아서는 안 된다는 절규다. 그런데 법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이미 법이 아니라 불법이다. 합법적 불법이다.


권력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불법화시킨다. 그 반대는 합법화 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봐야 할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권력과 재물,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사안 사안에 대해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는가에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이미 법이 아니라 법을 가장한 기득권 전략에 불과하다. 이걸 깨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켜내고 그 사회가 약자들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노력을 체계화하는 법이 있을 때 우리는 그걸 제대로 된 사회라고 부른다.


예수시대에 왜 그리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 강했는가? 그건 법을 내세워 인간을 능멸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법을 자신의 기득권 도구로 보는 자와, 법을 약자들의 권리로 보는 이 시각의 대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서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이들은 그 답이 자명하지 않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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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 모음(4)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에 대해

 

 

편집자 주/예전에 옥한흠 목사의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는 성서의 ‘비판하지 말라’는 대목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설교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옥한흠 목사는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각도에서 자신의 설교를 구성하고 전개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대목은 교회 내에서 교권적 권위 방어를 위해 비판적 발언을 봉쇄시키려는 자의적 목적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수가 많다는 점에서, 본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긴요하다.

 

옥한흠 목사가 이 설교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바가, 비판이라는 명목 아래 날이 선 말로 형제들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일 터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의 강조가 분명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비판이라도 그 비판의 봉쇄를 통해서 기득권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기가 저간의 중심에 깔려 있다면 이것은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메시지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비판의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게 하고 모두 뭉뚱그려 비난의 계열에 분류해 버리는 오류를 낳음으로써 ‘교권적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유도하거나 강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비판하지 말라’는 율법주의적 정죄에 대한 비판

 

마태복음 본문의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적 정죄 내지는 상대의 속 깊은 사정에 대하여 사려 깊이 헤아리지 않은 일방적, 단정적 심판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적 정죄를 앞세워 교권적 지배를 꾀하였던 당대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공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논리에 뭇 백성들이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거나 따라가지 말라고 일깨우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율법주의적 정죄론에 사회가 휘말리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논리에 희생당하고 서로에 대한 정죄주의적 추궁과 일방적 심판이 횡행하여 살벌해지는 것을 꿰뚫어 보신 것이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변호 과정도 바로 이러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죄 없음에 대한 자신이 있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못한 처지에서 자신의 의를 절대화하는 율법주의적 단죄 또는 심판은 택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불의에 대한 청산 작업은 전혀 하지 않고 타자의 사소한 잘못을 과장하여 정죄의 자리에 세우려는 율법주의적 자세를 겨냥하신 말씀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 현대적 의미에서의 이성적 비판 작업의 중단 내지 금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아픔이나 사연을 도외시한 채 자기 의를 절대적인 우위에 놓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 이 율법주의적 정죄관을 극복하는 자리에서 가능해지는 비판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이 분명해져야 우리는 율법주의적 심판과, 건강한 비판 의식의 육성을 가려낼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성서의 대목이 교권적 방어를 위해 본의에 맞지 않게 동원되는 오류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함부로 타인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특히 신앙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병에 걸리게 하며 신앙으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파괴하고 만다는 점에서도 강력하고 분명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열매로 충만한 사람이 그 입으로 타인의 마음과 영혼의 살을 도려내고 아프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판을 통해 상대를 죽이는 것은 음해

 

옥한흠 목사의 비판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인 우리를 보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이게 비판이에요. 자기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비판이요, 자기의 자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길다 짧다 늘어놓는 것이 비판이지요. 물론 여러분, 비판 중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아예 비판 의식을 모두 정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가 잘못되어 가면 건전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교회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한국 교회가 조금이라도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간다면 우리는 이런 교회를 가슴에 안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비판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뭐냐?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을 가지고 형제들을 상처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옥한흠 목사는 비판의 바리새적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리해내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의가 뭡니까? 다른 사람 죽이고 자기가 사는 의요. 그렇지요. 다른 사람 까뭉개고 자기가 의로워지는 것이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거요. 우리에겐 더 나은 의가 필요해요. 더 나은 의가 뭡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입니다.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 안의 형제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가 영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요.”

 

비판을 통해서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를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비판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음해이자 악의적 공격이며 분열주의적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옥한흠 목사가 경계하고 있는 비판은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이 영적 기준에 의해 비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영적 판단의 여지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시 말해서 영적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에게는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앙공동체 내부로 비판의 화살을 돌리지는 말 것이나, 그것이 신앙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향해 쏘아질 때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비판의 정의를 매우 이중적으로 또는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세상 사람에 대한 비판은 그가 내린 비판의 정의대로 상대가 세상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 상처 내는 일은 괜찮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신앙인의 세상 사람에 대한 비판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과 약점을 고쳐서 바로 잡아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상처인 것 같지만 상처 내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만일 비판이라는 것이 옥 목사의 정의대로,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폭력이라면, 그것은 신앙공동체 내부에서나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생명을 바로 세우는 비판, 언어폭력으로서의 비난

 

그런데 그는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의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때의 비판은 이러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이 아니라 건전한 영적 비판 행위를 의미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언어폭력의 성격을 지닌 비판을 세상 사람을 겨냥해서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면 그의 설교는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말하자면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어도 되는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독선과 오만이요 자기의 영적 기준을 절대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옥 목사의 의도를 선하게 받아들여 세상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신앙적 기준에 맞추어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비판은 형제에 대한 언어 폭력적 공격이라고 구별해서 이해한다면 문제는 없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적 기준에 맞춘 비판은 인정되고 있음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옥 목사가 언급한 건전한 비판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바는 그가 말하듯이 누구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 그를 괴롭게 하는 일을 즐기거나 그래서 자기는 살고 상대는 죽이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언어를 통한 폭력적 공세는 비난이지, 건강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도 비판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이니 교회 안에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여 “내가 비판받지 않기를 원하거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 안 하면 자기도 비판 안 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의 이런 것 저런 것 가지고 손가락을 헤아리면서 입으로 쪼아대면 쪼아대는 것만큼 너도 다른 사람의 입에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판받기를 원치 않으면 먼저 내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돼요”라고 말하고 있다.

 

옥 목사의 말대로 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문제 삼고 추궁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판이 언어폭력으로서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악의적 동기를 가진 것이라면 그러한 비판은 마땅히 배격해야 옳다. 그러나 비판이 영적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상대를 살리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영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짓밟는 것들이다. 그것마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그것은 그의 말대로 ‘생명이 떠난 교회’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그가 말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은 신앙적 삶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의 범주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지향하는 비판까지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교회의 생명에 대한 도전이요 그 생명에 대한 폭력이 된다. 성도끼리 아귀다툼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음해와 비난과 험담을 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당연히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고 그것이 특히 교권적 지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을 때에도 침묵하고 그대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영적 비판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그래서 예언의 능력이 죽은 교회가 된다. 개신교의 출발이 중세 교회의 불의에 대한 영적 비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망각하지 않는다면 교권적 불의마저 침묵의 대상으로 삼고 그로써 진정 교회를 바로 살릴 비판의 목소리마저 묵살하거나 봉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요, 병들도록 내버려두는 일이자 성도들의 영적 안목을 가리고 그 영혼을 신음하게 하는 일이다.

 

교권적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

 

옥 목사는 “1-2년 전에 서울에 있는 큰 교회 유명한 목사님이 여러 가지 스캔들에 말려서 굉장히 고역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라면서, 특정한 목사를 변호하는 발언을 그의 설교에 담는다.

 

“신문에 가끔 보도가 되고 텔레비전에까지 야단법석을 치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의 평신도 단체들이 비난의 성명을 발표하고, 심지어는 그 목사님이 법정에까지 서고, 그야말로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나오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 대부분은 그 내용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그 목사님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심지어 목회자 가운데는 그 목사님의 목회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즈음에 목사님 몇 분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할 일이 있었어요. 제 옆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 앉아 계셨는데 식사를 하다가 저보고 이런 말을 해요. ‘아, 요사이 자주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목사님 정말 안타까운데 참 야단이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우연히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떠봤대요. ‘아니, 그런 말들을 듣고 있는 목사님인데 교회를 계속 나가느냐’고 물었대요. 나간대요. 설교가 귀에 들어오느냐고 물었대요. 들어온대요. 그러더니 그분이 목사님을 향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는요, 우리 교회 목사님 신뢰해요. 소문대로 나쁜 짓을 할 분이 아니란 걸 잘 알아요. 설혹 한두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꼭 교회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흠이 없는 목사가 있어요? 목사님은 흠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감동을 받았대요. 아! 이런 교인이 있기에 그 교회가 살아 있구나.”

 

이어지는 설교에서 옥 목사는 목회자의 비리를 비판하지 않고 감싸 안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지금 부흥하고 있다’며 얼마 전에는 ‘한 주에 세례를 1천명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한다.

 

옥 목사의 설교 전체의 흐름으로 비추어보면, 그 목사에 대한 비판은 성서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 속한 형제를 아프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런가?

 

그 목사의 잘못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바로 서지 않아 교회의 위신은 추락했고 교회의 영적 권위는 손상 받았으며 그로 인해 무수한 신앙인들의 마음과 영혼이 상처 입은 것을 옥한흠 목사는 어떻게 정리해낼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이 세상은 너무 잔인합니다. 날마다 혀에서 나오는 말 몇 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형제를 서로 감싸고 함께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서로 위해주는 것이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를 비판하고 헐뜯는 거친 돌이 되지 않도록,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항상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바로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가 불의를 그대로 용납하고 그것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묵인하도록 하라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비판과 비난이 혼동되고 있는 이 시대에, 위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언어는 그야말로 갈급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교권적 지위를 앞세워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병들게 하는 일에 대한 의의 육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을 향한 진정한 영적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영적 각성의 뜨거운 육성이 들리지 않는 교회는 옥 목사의 말대로 이미 생명이 떠난 교회가 되지 않겠는가? 부디 영적 비판의 육성마저 언어폭력으로서의 비판의 개념에 집어넣어 하나님의 의가 침묵 당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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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 모음(3)

김진홍 목사의 숭미 사대주의

 

편집자 주/지난 4월 27일 서울신학대학교 춘계신앙수련회 강사로 온 김진홍 목사는 설교 중 제주 ‘4·3 사건’을 ‘4·3 폭동’이라 표현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산 모양이다. 김 목사의 역사관은 사실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예전 그의 왜곡된 역사관이 짙게 드리운 설교를 살펴본다.

 

그의 역사관이 도달한 한계를 안타까워하며

 

김진홍 목사의 역사관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굴절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살길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그 앞에 줄서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미국 등 강대국 앞에 줄 잘 서야 산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강자의 규칙을 배격해야 하는 목사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반 테러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 세계를 향해 미국 앞에 줄 설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본 따 신학화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때,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을 소리 높이 외쳐온 김진홍 목사가 민족의 생존이 절박한 지경에 몰려 있을 때 <전쟁의 논리>를 들고 세계를 다니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발언과 사고를 정당화하는 설교를 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늬만 개혁인 개혁적 종교 지도자”

 

여기서 우리는 그의 역사관이 도달한 한계를 목격하면서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 넘어서야 할 경계선이 무엇인지 절감하게 된다. 그의 개혁운동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가 빠져 있고 작은 나라들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서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 힘의 논리에 이미 그가 매몰되어 있음을 보는 것은 김진홍 목사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에 비추어 보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는 이제 극언하자면, “무늬만 개혁인 개혁적 종교 지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 개입 당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있고 난 다음 주인 김진홍 목사가 <미국, 북한, 남한>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설교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 배경과 의도를 보다 이해하고 이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훈계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으니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고 북한의 생화학 무기 테러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각 가정이 방독면을 갖추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본계 미국인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북한에 대한 철저한 폄하로 일관하고 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생화학 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는 것은 괜찮지만 미국이 불량국가라고 지목하고 있는 나라들은 가질 수 없다는 식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하는 자이다. 미국의 전쟁주의자들이 그를 앞세워 미국의 영광을 칭송하게 하고 미국의 논리에 반기를 드는 나라는 <반문명적>이라고 깔아뭉개려고 하는 현실을 김진홍 목사가 아는지 모르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우리나라는 줄서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설교에서 경악스러웠던 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줄 서기’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이다. 명분은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동맹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도대체가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을 주축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누구 앞에 줄 잘 서야 산다고 하니 이런 비주체적이고 타율적 사고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우리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나라 국민, 여러 지도자들이 마음이 하나가 돼서 다섯 가지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나라는 줄서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고 완화되었습니다만 역시 세계는 두 가지 세력이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적으로 열린 체제인 자유 민주 진영하고, 사회주의 전체주의 진영이 지금도 서로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쪽에 어느 편인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 유럽을 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 열린 체제와 동맹관계를 확실히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중간에 떠 있다가는 나라에 큰 문제가 생기면 백성들이 큰 재난을 받게 됩니다…”

 

미국과 일본, 유럽과 친하게 지내자는 이야기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중국과 러시아와도 국교를 맺어 친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계 여러 나라와 우호적 선린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김진홍 목사의 논리 속에 강하게 담겨 있는 냉전식 이분법이다. 세계 전체를 두 개의 진영 대립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현실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가 누구 앞에 줄 서기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식의 발상을 하는 것은 민족적, 국가적 주체성을 저버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국가적, 민족적 운명이 언제나 이렇게 강자 앞에 줄서기를 해야 했던 것이 그간의 민족사적 비극이거늘, 그는 친러, 친일, 친중 하지 말고 친미 하자는 식으로 한말 비운의 역사에 등장했던 논리의 하나를 그대로 베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힘도 없는데 무슨 수로 이들 강국을 이겨내는가, 그 가운데 가장 강한 놈 앞에 줄 서면 그나마 살 길이 있다, 이런 식이 아닌가? 성서가 어디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예수께서 언제 그런 말씀을 하신 바가 있는가? 아무리 약자라 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일에 헌신하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깃발이 아닌가?

 

결국 미국이 줄서기를 요구하면 그에 응하라는 권고에 다를 바가 없는데, 오늘날 유럽에서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을 비판하고, 미국의 일방주의가 도마 위에 올라간 사실을 김진홍 목사는 어떻게 설명할까? 유럽은 미국이 줄서기를 강요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미국 부시정권의 전쟁논리가 가지고 있는 패권주의와 반 생명적 논리를 문제 삼고 있는데, 그렇다면 김진홍 목사의 이야기대로 하는 경우 우리는 미국과 유럽, 그 어느 쪽에 줄서야 할까? 독일의 피셔 외무장관은 미국이 동맹국들을 <위성국가>로 보느냐고 따졌고, 유럽 연합은 미국이 일방주의 외교로 세계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김진홍 목사가 말하는 이른바 ‘자유진영’ 내부의 논란이다. 미국은 그 자신의 오만한 일방주의와 패권주의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확전을 겨냥한 논리는 세계적 반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부시의 발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지탄의 대상

 

오늘날 미국은 자유와 평화를 말로는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폭력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키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화마 속에 몰아 놓고 있으며, 포로들을 짐승 다루듯 하면서 세계적 지탄 받고 있다. 이것이 과연 자유진영, 민주국가라고 하는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이러한 나라 앞에 줄서기를 해야 한다면, 그런 폭력과 그런 야만성을 그대로 용인하라는 것인데 이는 실로 기독교적 신앙양심에 비추어 본다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도리어 김진홍 목사는 자신의 강한 힘을 믿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이 강국의 오만과 야만성을 비판하고,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하나님의 의와 뜻을 믿고 당당히 살자, 그래야 옳은 일 아닌가?

 

김진홍 목사는 우리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항의를 하자 이를 “대단히 국가 이익에 맞지 않고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나마 이들 젊은 의원들이 있어서 국가적 자존심이 섰고, 민족적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국가이익 운운하면서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몰아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방한 과정에서 그나마 유화적 제스처를 썼던 것도 우리 내부의 강력한 항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을 그가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젊은 정치인들은 국가이익을 해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항의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 내부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꿀리지 않고 햇볕정책의 장기적 의의를 설득해나갈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김진홍 목사는 미국의 발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 쪽의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서 햇볕정책을 열심히 추진하고 남북평화를 이루려고 애를 쓰는 것을 인정하는데, 김정일이 한테 이용당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열심히 북한을 도와주고 있는 동안에 그 돈을 가지고 그 기간에 핵무기를 계속 발전시키고 미사일을 만들어서 세계에다가 수출을 하고, 중요한 것은 생화학 무기를 너무 대량으로 생산, 보유하고 있다, 중동에, 북 아프리카에, 여러 나라에 북한이 미사일을 수출하는데, 미사일을 수출하는 것까지는 봐주겠는데, 미사일을 만드는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걸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생화학 무기를 발전시켜 가지고 미사일을 쏘는 발사대 거기에다가 화학무기, 탄저균 같은 생물무기를 쏘면 서울이나 동경 같은 자유 우방 국가에 탄저균 폭탄이 하나 떨어지면 이거는 글자 그대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이해를 해야 되지요.”

 

우선 미국은 우리 남과 북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미국이 간섭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을 반길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에 미국의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시의 발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발언의 내면에 깊이 숨겨진 저의를 온 세상에 밝혀내는 것이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이 교류 협력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평화시스템이 굳건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통찰자로 나서야 하는 김진홍 목사만한 수준의 목회자라면 미국의 이러한 숨겨진 야심과 우리 민족의 처지를 꿰뚫고 우리 민족의 단결과 민족 통일에 대한 꿈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러한 소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나는 미군이 한국에 있는 것은, 한국에도 절대로 있어야 하고 미국에게도 있어야 됩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서 미군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도 위하지만 미국 자신을 위해서라도 미군이 있습니다. 그걸 분명히 하고 미군이 한국에 있되, 장소는 용산에서 옮겨야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이 말이 맞다 치고, 미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어쩌는가? 이번처럼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주한미군을 움직이는 경우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할 지 모를 위험한 군대를 우리는 언제까지 용납해야 하는가? 그리고 미국을 위해 있는 군대를 우리가 왜 돈을 줘가면서 있도록 해야 하고 서울 시민들의 식수에 독극물을 버려도 좋다좋다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며, 살인죄를 저질러도 우리는 아무런 재판권도 없이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 이게 우리를 위해 있는 군대의 할 짓인가?

 

“가정마다 식구 숫자대로 방독면을 준비하세요”

 

더군다나 앞에서 인용한 김진홍 목사의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에 가깝고, 또한 논리적으로 옳을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생화학 무기와 핵무기를 생산, 보유하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만일 이러한 무기 보유량만으로 악의 축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악의 축 가운데 축은 미국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온 세계 무기시장의 제1 수출국이며, 미국이 오늘날 악의 축이라고 지탄하는 이란, 이라크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판매했던 나라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탄저균 문제도 미국에서 미국 내부의 연구소 유출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탄저균 위협의 진원지는 결국 미국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김진홍 목사는 이런 말까지 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러분 지난 번에 미군에 탄저균 났을 때 우리 나라 기업 중에 재미 본 기업이 있었습니다. 방독면 만들어 가지고 수출한 회사가 밤낮으로 공장 돌렸습니다. 한국제가 세계 제일입니다. 이걸요 만들어 가지고 가정마다 식구 숫자대로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대책을 세워야 됩니다.”

 

이에 이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김진홍 목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유치한 ‘전술가’가 되고 만다. 온 세상이 미국에게 생화학 무기 금지조처를 위한 협정에 서명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까닥도 하지 않고 있다. 생화학 무기를 독점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고, 생화학 무기 금지 조처에 자신은 해당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생화학 무기 금지조처를 취하고 이에 따라서 다른 나라의 생화학 무기를 통제하겠다면 말이 되지만 자신은 더더욱 많은 생화학 무기를 생산, 보유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북한의 경우를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은 모두 시비를 걸기 위함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함락시켜야 할 이 시대의 여리고성은 무엇인가”

 

그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장면을 보기로 들면서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여리고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데, 그 함락시켜야 할 여리고성이 이 시대에 무엇일까? 그것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남북 분단의 대립을 해결하겠다는 부시 대통령과 같은 반 평화적이고, 반생명적 사고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바로 강대국의 생각이자 우리 민족의 앞날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오는 것이라면 더더욱이 이를 우리 민족 전부가 한 목소리로 부르짖어 우리 민족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미국의 이번 악의 축 발언과 전쟁 불사론에 놀라, 민족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서는 현실에서 김진홍 목사와 같은 위치의 인물이 이렇게 미국의 강대국 논리를 추종하고 민족의 생존을 염려하는 사람들을 철없는 사람처럼 몰아대고, 미국 앞에 줄서야 된다는 사대주의적 사고를 설교에 담아 설파하고 있는 것은 실로 실망스럽다. 부디, 김진홍 목사는 자신의 그러한 발언에 대해 깊이 되돌아보고 오늘 민족과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진정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통찰하여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선포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란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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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 모음(2)

김홍도 목사의 '저주'로 끝난 설교

 

 

편집자 주/이 글은 ‘세습논쟁’이 한창일 때 쓴 글이다.

 

 

교회의 ‘세습문제’와 기독교 내부의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들이 사회적으로 불거지면서, 안팎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데 대한 김홍도 목사의 신학적 방어 내지는 반격이 설교의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일곱 금 촛대와 일곱 별>이라는 제목으로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김홍도 목사는 이들은 바로 자유주의 신학의 신봉자들과 좌경세력,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습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들의 진의는 교회 파괴에 있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려는 ‘적 그리스도 마귀’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나아가 김 목사는 이례적으로 이 설교 테이프를 전국교회에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저주로 끝맺고 있습니다.

 

“요사이 제가 읽은 책이 있는데 컬크 커크라는 사람이 쓴 the devils alphabet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악령의 역사와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냉소주의자들의 자손들이 나중에 두고 보면 불구자가 되고 정신질환자가 되어서 고통 당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부모가 사탄 마귀에 사로잡혀서 냉소주의자가 되고 교회를 핍박해서 그런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세습 논쟁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탄 마귀에 사로잡힌 냉소주의자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그 결과로 자손이 마땅히 육신적인 질고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매우 악랄한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신학적 논리는 우선, 어떤 눈먼 이의 현실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묻고 ‘그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하자 ‘아니다’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육신의 고통과 그 정신의 방황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마음을 기울여 생명과 사랑의 손길을 펼치기보다는 사탄 마귀의 간계에 휘둘린 심판의 결과라고 보는 그의 마음속에는 세습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이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바로 되기를 절절히 바라는 이들을 냉소주의자로 몰아 부치면서 자신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여기는 것은 어찌해서 교회의 세습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지 그 까닭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또는 의식적으로 그 원인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그 뜻을 깊이 헤아리는데 필요한 성서의 말씀을 세습을 비판하는 세력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공격하는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신도들의 신학적 무지나 신학적 사고의 부족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성서적으로 포장하고, 교회의 순결함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이 된 이해관계를 방어하는데 힘을 쏟는다면 이것은 말씀에 대한 폭력이자 신도들의 신앙에 중대한 해악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설교가 어떤 문제와 모순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써 그의 신학적 관점이 오로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어떻게 주력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습에 대한 논쟁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세습에 대한 비판을 적 그리스도의 행위로 낙인찍고 그에 가담하는 이들은 모두 대를 이어 불구와 정신질환을 겪을 각오를 하라는 것은 다중에 대한 명백한 위협과 공갈 협박이며, 이러한 교설(狡說)이야말로 교회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왜곡

 

김홍도 목사는 일곱 촛대와 일곱별을 교회와 교회의 목자로 비유하면서, 이토록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조직과 그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은 그 배후에 사탄의 음모가 있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금 촛대 사이로 거니시는 모습은 세상 교회를 돌보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오른손의 일곱별은 주님의 교회들에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 혹은 목사들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예수님이 교회와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얼마나 귀중히 보시고 사랑하시고 계시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은 종들을 해치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 손상을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현실은 초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무수한 신앙의 배교자(背敎者)들이 생기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탄압으로 신앙의 확신을 잃고 흩어졌으며 선교운동의 중심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요한 조차 밧모섬에 갇혀 더 이상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믿음을 상실하고, 절망이 지배하는 세대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밧모섬에서 놀라운 계시를 받게 됩니다. 지금 거센 힘으로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마귀의 세력은 곧 멸망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이 지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을 예고하고, 이에 굴하지 말고 믿음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격려의 메시지를 신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별과 일곱 촛대는 바로 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들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하늘은 어둡고 바람은 거세어 별은 보이지 않으며 촛불은 꺼질 것만 같은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별과 촛대를 손에 쥐고 계시니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별은 교회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요, 촛대는 교회에 임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영입니다. 그러니 김홍도 목사는 별을 자신과 같은 목회자로, 촛대를 교회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맥락을 완전히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바로 이 수호천사들을 통해 교회에 보내는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이 일곱교회 가운데 오로지 핍박을 인내로 견뎌낸 빌라델비아 교회를 빼놓고는 모두 회개하라는 질타를 받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라’라고 일갈하고 계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요한계시록은 무섭게 일깨우시면서 이 핍박과 혼란,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는 바로 된 믿음을 회복하지 않을 때에는 그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권위와 자격과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재벌 기업 못지않게 ‘거부(巨富)가 된 교회의 기득권’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일곱 별과 일곱 촛대는 교회의 세습을 정당화해주는 성서적 상징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치열하게 되돌아보도록 만들어 주시는 근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김홍도 목사는 일곱 별을 교회의 목자로 정의하고 자신과 동일시했고 그로써 자신에 대한 도전은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이며 이들을 통해서 교회 전체에 질타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귀중한 것은 강조하고 있지만, 교회가 바로 서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질책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초장(初章)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지 못한 교회의 현실에 대한 뼈아픈 고발과 지적, 그리고 이로써 이루어져야 할 미래의 진로에 대하여 밝혀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홍도 목사가 요한계시록의 본문에서 취해야 할 바는 세습을 주장하는 교회의 현실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아닌가를 깊이 묵상하고 돌아보는 일에 있을 것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교회가 많이 세워진 나라는 문명하고 잘 사는 나라이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가난하고 문맹자가 많으며 얼마나 폭력이 난무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이들 나라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가난한 제3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착취하면서 부를 모은 역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교회가 이들 나라를 잘 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면 이들의 부정한 부에 대해서 교회는 도리어 크게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교회가 너무도 중요한 곳이기에 이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이들은 사탄 마귀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면서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사탄 마귀는 세상의 권세요, 이 권세에 아부하거나 빌붙어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만드는 세력이며 따라서 세상의 부와 권력의 크고 강함을 내세우는 것이야말로 실로 사탄에 투항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세상적 권세와 기득권을 대를 이어 쥐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1대 목사가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면서 개척하고 키운 교회의 기득권을 다른 누구에게 상속하기는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습의 절차를 완료하는 순간, 그 교회는 제1대 목사의 집안에 의해 사유화(私有化)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의 거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바로 이 사유화된 체제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써 교회의 진정한 기능은 날이 갈수록 왜곡되고 말 것입니다. 사유화된 체제의 기득권 세력의 이해가 앞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운명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겠다고 했던 교회가 세상의 욕망과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순간부터 중세 가톨릭 교회는 부패하고 무너져 내렸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중추를 이루는 대형교회의 현실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어느새 재벌 기업 못지 않게 '거부(巨富)가 된 교회의 기득권'을 놓고 주도권 쟁탈전에 빠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두고 일곱 별과 일곱 촛대를 손에 쥐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실런 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녀사냥식 논리

 

김홍도 목사는 교회의 세습 논리에 대한 비판을 하는 세력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을 모두 마귀로 몰아부치고 있습니다. 잘못된 교회와 목사의 비판세력은 모조리 ‘빨갱이’인 데다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러한 신학적 개념도 잘못된 것입니다) 신봉자’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개정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황에서 상대를 빨갱이니 공산주의자니 좌경분자니 하고 몰아부치는 것이 어떤 사회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의 분단 역사에서 마녀사냥의 비극을 낳은 냉전논리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바로 이 냉전논리를 자신을 방어하는데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를 비판해? 너 빨갱이지?’ 하는 식으로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대의 비판을 이해하는 자세는 실로 어처구니없을 지경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기득권을 대를 이어 상속시키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빨갱이들의 준동' 쯤으로 몰아붙이려 하는 것은 반대파를 빨갱이로 찍어 매장해 버린 과거 군부정권들의 독재논리와 동일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습을 통한 교권 독재를 실현하려는 판이니 다른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난데없이 공산주의 사상의 무신론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교회와 공산주의는 서로 상극인데다가 고생하는 작은 교회 목사들의 눈에는 대형교회가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좌경사상의 음모를 모르고 편승하여 대형교회를 파괴하는데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대형교회의 모순과 비리를 고발하고 지적하는 일체의 행위는 공산주의 사상의 음모에 자기도 모르게 휘말려 들어간 결과라는 논법입니다. 광림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반 평신도들조차도 이러한 논법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조종당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는 칼 마르크스가 ‘기독교가 시대의 아편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거론했는데,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교회가 현실의 모순은 은폐하면서 죽고 나면 천국에 간다고 세뇌시켜 현실의 부정의에 저항하는 능력을 박탈해버리고 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도리어 우리가 새겨들어 교회가 그러한 아편장사가 되는 우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할 부분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대체로 독재에 아부해왔고,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적 현실에 침묵해왔으며 역사의 변화에 눈을 감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온 신도들의 마음에 신앙이라는 이름의 아편을 놓아줌으로써 현실의 모순에 잠잠케 했고 이기적인 개인주의 신앙을 키워놓았습니다. 그래놓고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들의 소란’으로 몰아부 칠 수 있는 것입니까?

 

대형교회의 문제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좌경분자!

 

김홍도 목사는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을 친북세력으로까지 몰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논법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완수를 위해서는 ‘먼저 밥통을 잡으라’(경제 장악)하는 것과 ‘마이크를 잡으라’(언론 장악)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론기관에 좌경분자들이 많이 들어가 마이크를 잡고 있고 펜대를 잡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교회 특히 대형교회를 흠집내고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책상 위에는 한국의 대형교회와 목사의 이름이 있고, 교세까지 다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좌경분자들, 좌경 운동권 사람들의 타도의 목표물은 보수정당, 보수언론, 보수재벌, 보수교회입니다. 이들은 남한 공산화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대형교회의 문제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김정일을 추종하는 좌경분자가 되는 것이며, 남한 공산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교회부터 타도의 목표물로 정한 세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무슨 정신나간 논법입니까? '좌경언론과 운동권 사람들'의 책동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사고가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적화통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래서 홍경래라든지 전봉준 등을 역사의 주류세력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홍경래나 전봉준 등은 역사의 주류가 아니라, 주류의 기득권에 저항한 세력이었으며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 한 목숨 던졌던 이들입니다. 적화통일과 홍경래, 전봉준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들의 역사적 족적을 귀중히 여기면 그것이 바로 적화통일 분자가 되는 것입니까?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이 감당했던 시대의 모순은 봉건체제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이었습니다.

 

이것은 민족적 요구에 있어서나 역사의 진로를 바로 잡기 위해서나 모두 치열하게 대결해야 할 바였습니다. 그런데 전봉준을 거론하는 것이 곧 적화통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니 가공할 논리입니다. 게다가,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이 이들의 적화통일에 필요한 작업이라는 식으로 몰아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완전한 왜곡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교회적 기득권을 유지할 방법으로 선택한 세습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반대세력을 좌경 적화통일 분자로 몰기 위해 거의 광분(狂奔)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여집니다.

 

좌경분자들이 교회를 까부수려고 하는 음모

 

김홍도 목사는 또한, 교회에 대한 비판세력은 교회를 파괴하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 신봉자이자 이들은 마귀를 따르는 세력이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보태 가지고 교회를 비난하고 주의 종을 고소하면서 어떻게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세습에 진력하려는 이유는 은퇴 후에도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기득권이란 무엇보다도 거대한 돈입니다. 대형교회 가운데 자신의 예산과 수입지출 내력을 투명성 있게 공개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재정문제에 목사가 전권을 행사하면서 사유재산처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이것이 세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운영에 대한 주도권이 제3의 인물에게 이동하게 될 때, 기득권은 무너지고 말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습론자들은 바로 이 점을 염려하여 그토록 세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자신의 재정상태를 철저하게 공개하고, 재정문제에 대하여 목사의 권한이 배제되어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 사실 세습하지 않아도 여전히 그 기득권은 주도하는 세력만 바뀔 뿐이지 구조적 모순은 여전히 유지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세습 반대 이유들에 대한 논박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는 오로지 세습대상이 되고 있는 후임자인 아들이 자격이 있다고 하는 점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교육받고 후임자가 된 것이 세습입니까? 이것이 좌경분자들이 교회를 까부수려고 하는 음모인 것입니다.’ 김홍도 목사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까부수고"라는 식의 저열한 단어를 설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거니와, 세습 비판의 초점이 아들이 아버지의 후광, 또는 영향력을 업고 대형교회의 상속자가 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 그의 논리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세습논의를 비판하는 세력들은 사탄 마귀

 

그토록 자격있는 아들이라면, 그도 개척교회를 통해서 성장하도록 할 것이며 목사 가족의 사유재산처럼 대를 이어 넘기는 식으로 그 아들의 명예를 이토록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 목사로서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닌가 합니다. 그 아들 역시, 분연히 일어서서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는 용기를 낼 때 비로소 상황은 바로 잡혀 나갈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저주로 끝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교회의 세습논의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얼마나 미워하고 적대하고 있으며 사탄 마귀로 몰아 징계하고 싶어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사가 이래서야 안 되지요. 대형교회의 세습은 대형교회의 모순과 비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발상이라는 점에서 철저한 개혁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세습과 상속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의 사유물로 전락시키려는 세력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대적하는 세력입니다.

 

설교를 통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생명과 은혜를 주지 않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자기의 기득권을 방어하려는 종교 지도자들이 과연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앞세우는 욕심은 자기파멸적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부디, 세습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추악한 문제로 내흥을 앓고 있는 교회와 목사들은 늦기 전에 이 모든 사태를 바로 잡고 더 이상 교회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신도들을 시험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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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 모음(1)

 

전병욱 목사의 -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 -

 

 

편집자 주/설교비평 모음 꼭지는 예전의 글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코너이다. 전병욱 목사가 한창 잘 나갈 때 그의 목회적 관심은 오늘날 이 시대에 생존의 여러 가지 복잡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과 용기와 비전을 주는 데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전 목사의 설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강도와 그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자칫 나약해지기 쉽고 좌절에 빠지기 쉬운 청년들이 말씀과 예배, 교회 공동체 의식을 통해 저력 있고 쉽게 굴하지 않는 의지를 가진 인간형으로 자라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의 왜곡된 메시지와 목회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의 저서인 『영적 강자의 조건』이 나약해지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준다면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목회적 관심을 풀어나가는 데 사용하는 비유와 성서에 접근하는 신학적 기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에 대해서는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신학적으로 포장했을 뿐인 현세에서의 출세론을 사용함으로써 그 본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누구도 이러한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험악한 생존 경쟁의 직업 전선에서 성서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가치와 목표를 사명으로 품을 것인가의 도전일 것이다. 이런 당면한 과제 앞에서 전 목사는 도리어 시장의 논리 곧 현실이 요구하는 승패의 논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승리의 위상과 좌표를 그려주고 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주도하는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 승리자라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선과 의에 대한 본질적 충성보다는 남보다 더 빨리, 더 강하고, 더 높게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들 때문에 더 많은 소외와 빈곤과 착취와 모순과 부당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실현할 것인가, 정의롭고 선하고 평등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전 목사에게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뇌와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촉구와 격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는 패배자가 된다고 해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승리하는 자의 가장 소중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점이 최대한 강조되고 부각되어야 하는데 전 목사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워라?

 

『영적 강자의 조건』은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성서윤리적으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전 목사는 미국의 거부 워렌 버핏의 일화를 들면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이길 수밖에 없는 일에 자신을 건다고 주장한다.

 

워렌 버핏이 어떤 사장과 함께 골프를 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이 골프를 치던 사장이 그에게 내기 골프를 제안했다. “당신이 홀인원을 하면 내가 1만 달러를 주겠고, 만약 하지 못하면 당신은 내게 2달러만 내라.” 그런데 워렌 버핏은 일언지하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왜 그런가? 단돈 2달러이지만, 희박한 확률에 기대하지 않겠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부분 희박한 확률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운다. 이기는 자는 이기는 법을 안다(『영적 강자의 조건』, 4).

 

여기서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인생관과 자세를 거론하는데, 거부의 ‘골프 내기’ 자체가 신앙적으로 제대로 된 비유가 될 수 있는가? 나중에 지적하겠지만,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에서도 인재론과 관련해서 일제의 황군을 모델로 삼고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지위에 오른 사람을 선망의 대상으로 설정해놓고 그들의 인생관과 승리관을 옳은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출발하는 그의 방식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운다’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유리한 확률’이란 세속에서 이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기실 우리의 ‘십자가 신앙’이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던지는 것, 당장에는 실패처럼 보여도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 가는 믿음이 아닌가.

 

세상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처절하게 능욕당하는 것을 보았고, 모멸의 극단에 몰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은 죽음의 힘 앞에서 더 이상 기운을 쓰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십자가에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배신을 보았고, 세상의 악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절감했으며 자신들의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정지해버린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이 진정한 출발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하여 순진해 빠져서 무지(無知)했던 하나님의 실패를 증언한 사건이 아니라,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지치지 않으시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축복의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좌절과 실패의 증거로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부활과 승리의 길이다. ‘신앙의 위기’는 십자가 사건의 반쪽만 볼 때 온다. 그것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다 알아버렸다고 단정하고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직 알지 못한 자의 무지이다. 세상의 속성을 잘 안다고 여기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는 도리어 눈이 멀게 된다. 이러한 십자가 신앙에서 볼 때 유리한 확률을 기반으로 세속의 승리를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반하는 일이다.

 

 

 

승리는 무엇이고 패배는 무엇인가

 

전 목사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하는데 과연 승리는 무엇이고 패배는 무엇인가? 패배라는 것이 도전과 난관에 부딪치면 쉽게 물러나고 무너지는 패배주의를 말한다면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무엇을 향한 승리인지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서는 현세적 출세주의 논리에 빠지기 쉽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승리라는 것은 세상의 승패와는 전혀 다른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 불신(不信)의 위기에 처하고, 소망을 쌓으려 했던 일이 절망의 깊이를 보는 일로 결말짓게 되면 이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이 이루어질까? 아, 안 될 거야”하며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패배주의에 빠지는 일이다.

 

그는 교회 젊은이들에게 “집중하는 인생을 살라”고 하면서 ‘싱글 포커스’(single focus)라는 말을 사용한다. ‘집중하라’는 것은 나머지는 포기하고 자기의 에너지를 어떤 일에 최대한 하나로 모아서 성과를 거두라는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를 이리저리 분산하고 낭비하지 말고, 힘을 압축시키고 집중시켜야 진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학화를 거친다면 다른 차원의 얘기가 필요하다. “무엇을 위한 집중이고 무엇을 위한 포기인가.” 이것이 명확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현세적인 욕심과 목표를 좇는 세상 사람들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선과 의,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헌신, 세상의 악과 맞서는 용기, 평화 등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무망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최대한 영적 에너지를 쏟아 부을 때 집중하는 삶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지침 정도를 주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생명적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에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다.

 

결혼, 현세의 유불리를 따져라?

 

전 목사는 결혼조차도 철저한 현세적 논리로 접근한다. 이 이야기는 『영적 강자의 조건』과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에 반복해서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에는 자매들도 대개 네댓 명의 형제를 사귀다가 결혼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이렇게 여러 남자들과 교제하다가 그중 하나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A, B, C, D 네 명의 남자가 있는데 심사숙고 끝에 A를 골랐다고 합시다. 그러나 B도 B 나름으로 장점이 있고 C도 C 나름으로 감칠맛이 있을 것입니다. D도 남 주기는 아깝겠지요. 그러나 결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집중입니다. A에 집중한다는 것은 B, C, D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짜 사랑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례를 맡다 보니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울면 친정아버지도 따라 웁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신부가 왜 우는지 속사정을 압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식날 신부가 우는 것은 B, C, D가 아까워서 우는 것입니다. ‘그 아까운 놈들…’ 하면서 웁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우는 줄 알고 따라 울고, 주례자인 저는 기가 막혀서 웃습니다(『영적 강자의 조건』, 49-50. 『미래를 결정하라』, 52).

 

그는 딸을 보내면서 느끼는 아버지의 사랑과 슬픔을 끌어안기는커녕 비아냥조로 딸의 눈물을 해석한다. 안타까운 사연을 깊이 이해하기보다 현세에서 유불리의 조건을 따져 하나를 택한다는 식의 접근은 가당치 않다.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역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이해하는 일에 매우 근본 되는 작업이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바르지 못한 권세의 질서를 뒤바꾸고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예언자 전통은 모두 이 역사의 불의에 대한 질타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의한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병욱 목사는 말로는 “역사를 믿음으로 뒤집어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가 얕고, 편견과 왜곡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믿음의 걸림돌이 ‘피상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뒤집고자 하는 역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그가 바로 세우려는 것이 도리어 거꾸로 세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뭇 위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 목사의 역사관에 드러난 심각한 왜곡과 오도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선비 중 대표적으로 대원군이나 최익현처럼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 말아먹었습니다. 옳은 소리는 했지만 나라 지킬 힘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에게는 구호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옥쇄’(玉碎)라고 그러죠? 장렬히 죽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했다고 하면서 자폭해버리고 맙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영적 강자의 조건』, 263).

 

과연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이 대원군과 최익현 같은 사람들인가? 나라를 팔아먹고 말아먹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으나 당시의 역사와 현실 앞에서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경각에 몰린 나라를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서 고민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가슴 아파해야 하는데 “힘도 없는 게 떠들기만 했다, 선비에게는 구호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당시에 정작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식의 접근은 ‘실력이 없으니까 결국은 일제 식민지가 된 거지 어떻게 해, 별 수 없는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실력 있는 사람들인데 살려내야지 어떻게 해’ 따위의 해괴한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실력과 능력을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의와 선을 좇느냐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미약하게 보여도, 힘이 없고 약한 것 같아도 정작에는 큰 힘을 드러낸다.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대단한 역량을 갖추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앞세워 나가는 것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인간적 처세와 인간적 비전을 길러 엘리트주의식 사고를 종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잘 아는 겨자씨 비유는 세상의 욕망과는 근본적으로, 전격적으로 달리 살아가는 이들을 상징한다. 문제의 근원을 깨달은 이들의, 미미한 듯하나 마침내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그 놀라운 능력과 성취를 증언해준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믿음, 그리고 삶의 자세는 세상이 탐하는 영광이나 대세(大勢)와는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영 현실성 없고 우스우며 미력(微力)하게만 여겨진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존재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도모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주체세력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그들이 이루는 나라의 성품은 어떠한가를 밝혀주고 있다. 문제의 근원을 깨달은 이들답게, 이들은 높은 곳을 탐욕스럽게 열망하지 않고 자신을 나누기 위한 낮은 곳을 향해 간다. 교만한 권세에 머리 숙이지 않으며, 겸손의 힘을 믿는다. 크지만 허세를 부리는 강자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고, 작지만 열매가 있는 진실함을 귀히 여긴다.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소박함을 자랑한다.

이들은 부드럽고 따뜻한 온유함이 날카롭고 냉혹한 분노를 마침내 이긴다고 확신한다. 힘 있고 강한 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힘없고 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축복과 영광임을 받아들인다. 혼자 자신을 내세워 명예를 차지하기보다는, 함께 손잡고 나가기를 기뻐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러한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모든 악한 권세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작다고 하여 덤벼드는 새들의 공격 앞에서 지레 겁먹고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재의 문제와 관련한 그의 역사적 시각을 살펴보자. 전 목사는 역사를 통해 인재의 중요성을 되새겨보자면서 패망한 일본이 어떻게 급속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50-60년대부터 일본은 이미 세계 경영에 참여한 바 있는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미얀마,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로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 일본군은 대위쯤 되는 위관급 장교라든지, 소령쯤 되는 영관급 장교들에게 식민지 행정을 맡겼다. …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던 사람이 스물여덟 살이었고 싱가포르 사령관이 서른 살이었다. 스물여덟, 서른 된 청년이 한 나라를 통치한 것이다. 기간은 1년 혹은 2년, 길면 5년쯤 되었다. 패망한 일본은 잿더미에 올라앉았지만 인재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스케일이 크고 세계를 보고 나라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폭넓은 시각을 가진 그들은 군사적 침략전쟁 대신 무역전쟁, 수출전쟁의 일선에 나섰다. 영토가 아니라 무역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세계 경영권을 휘어잡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재가 성공의 관건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100-101).

 

한마디로 기가 막히다. 침략황군이 일본을 재건했다는 얘기이다. 사실, 미군이 일본에 대한 역사 청산을 하면서 과거에 식민지 제국주의 투쟁에 나섰던 세력들을 고스란히 보존했고 전후 일본의 중요한 주도세력을 만들었다. 결국 일본이 과거의 흔적과 유산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그 까닭에 일본은 아직도 진실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여전히 망언을 하고 있다.

 

하기야 당시 지만원(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이란 사람이 친일청산 문제를 얘기하면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병신들이 100년 전 일본에 점령됐을 때 ‘누가 머리 좋아 일본 육사 갔고, 누가 동경제대를 갔는지 조사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고 비난하면서 당시 관료를 지낸 사람들은 당대의 수재들이고 대단한 인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전 목사의 인재론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개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작업은 요원해질 뿐만 아니라, 전 목사가 인재라고 부른 그들이 아시아의 힘없는 무수한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억압한 죄과를 완전히 은폐하고 마는 것이다. 끝으로 설교자로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있어서 전병욱 목사의 경우 ‘진정성’의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전 목사는 성서 자체의 메시지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자신의 지식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려는 자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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