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2)


모두 다 가져갔다


“시위대(侍衛隊) 장관(長官)이 또 잔(盞)들과 화로(火爐)들과 주발(周鉢)들과 솥들과 촛대(燭臺)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물(金物)의 금(金)과 은물(銀物)의 은(銀)을 가져갔는데 솔로몬 왕(王)이 여호와의 전(殿)을 위(爲)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 있는 열 두 놋소 곧 이 모든 기구(器具)의 놋 중수(重數)를 헤아릴 수 없었더라”(예레미야 52:19~20)


피에르 신부가 쓴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첫 손에 꼽았던 사람이다. 책에는 피에르 신부가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경험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교회의 통치조직과 그 대표들 가운데 일부의 태도가 때때로 복음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새로운 교황대사의 관저가 건축되고 있던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건축이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타르로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어놓곤 했다. 그러자 건축을 맡은 성직자가 경찰을 불렀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 문장 부호가 느낌표다. 일부러 그렇게 선택했지 싶은 느낌표는 깊고 긴 탄식처럼 다가온다. 밤에 몰래 와서 건축 중인 교황대사의 관저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을 부르는 성직자, 그런 아이러니가 어디 흔할까 싶다. 같은 책에서 만난 다음 구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성소의 아름다움은 그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거주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세상의 어떤 건물도 부럽지 않을 만큼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규모,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장식물, 값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성구, 성소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들은 적지가 않다. 거기에 다른 교회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 또한 은근하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노사제(老司祭) 피에르는 성소의 아름다움을 그런 류에서 찾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소 주변에 집 없는 자가 없다는 것, 헐벗은 자가 없다는 것, 굶는 자가 없다는 것, 혼자 우는 자가 없다는 것, 단순하고 단호한 지적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바벨론에 함락당한 예루살렘의 모습은 처연하다. 주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52:13) 처참하게 허물어지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그것이 아무리 성전이라 할지라도 무너질 수 있고, 불태워질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건물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바벨론의 군대는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약탈해갔다. 그 목록이 다양하다. 놋기둥, 받침, 놋대야, 가마, 부삽, 부집게, 주발, 숟가락, 모든 놋그릇, 잔, 화로, 솥, 촛대, 향 접시, 놋바다, 열두 놋소…, 종류를 다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들이 가져간 것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하던 제구(祭具)였다. 열왕기상 7:48~50에 들어있는, 솔로몬이 금으로 만든 성전 기구들이 거반 포함 되어 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사용하던 거룩한 도구들이 전리품과 노략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놋기둥과 받침들과 놋바다는 크기가 커서 있는 그대로를 옮길 수가 없자 바벨론 군인들은 그것을 산산조각 내어 가져간다. 놋기둥도 빠지지 않았다. 놋기둥은 솔로몬 성전 입구에 서 있던 두 개의 기둥이다. 높이 9미터 정도의 크고 화려하게 꾸민 기둥으로 주님께서 그곳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주님의 위엄과 임재를 느끼게 해주는 거룩한 상징이었다.

두 개의 기둥과 관련하여 역대하 3장 15~1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 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주님의 위엄과 임재를 나타내던 성전 기둥은 결국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서 쓰러졌고, 운반이 가능하도록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바벨론 군인들은 성전의 온갖 기물들을 ‘금으로 만든 것은 금이라고 하여 가져갔고, 은으로 만든 것은 은이라 하여 가져갔다.(19절) <새번역> 그들이 가져간 것을 두고 성경은 ‘모든’ ‘모두’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바벨론 근위대장이 가져간 놋쇠만 해도 ‘그 무게를 달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사라져간 영화를 새기듯 놋기둥 위에는 놋쇠로 된 기둥머리가 있고, 기둥머리 위 사방에는 그물과 석류모양의 장식이 얹혀 있었다고, 그물에 사방으로 매달린 석류는 모두 백 개인데 밖에서 보이는 것은 아흔여섯 개였다고, 더는 아무 소용없을 것을 그래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성전은 불에 타 허물어지고 성전 안 온갖 기물은 모두 탈 탈 털린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겹쳐 떠오르는 것은 혼자만의 기우일까? 예배당 건물은 여전히 화려하고 웅장할지 몰라도 더는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오늘 이 땅의 교회 모습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면, 성전 안 모든 기물을 바벨론에게 빼앗긴 당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고, 성전 안 거룩함을 모두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더는 할 말이 없겠지만.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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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



말씀 기근의 시절에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은 어떠할까? 글을 읽는 내내 마치 같은 이의 모습을 보듯 예레미야와 저자가 겹쳐 다가왔다.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알게 된 지 수년, 김기석 목사님은 자꾸 여위어만 간다. 혹 어디 아프신 건 아닌가, 염려하여 여쭈려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알 것도 같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시도 있을 수가 없구나!” 하나님을 잊은 시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시각으로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자니 어찌 고통이 없을까.


그의 언어들은 예레미야의 저 처절한 표현만큼 직설적이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너무나 아름답고 따듯하고 부드러워 읽는 이가 얼른 그 고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은 모두가 다 신음 소리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처럼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가 예언자라면, 목사요 신앙인으로 하늘의 눈을 가진 그가 이 시절을 지내며 끙끙 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모든 신앙인은 예언자여야 하리라.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 것을 듣지 못한 채, 하나님 없는 반생명의 질서를 지어놓고 ‘문명’이라 자족하는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어찌 앓지 않으랴. 실존적인 위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의 사람들, 그러나 예수는 예언자적 삶을 선택하는 이들을 복되다 했다. makarios! 존재로 복된 이들, 이들의 존재함은 오늘 이 땅에서 “뿌리 뽑힌 이들에게 샬롬의 매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복되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복되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넘나듦’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천 년 전 예레미야의 삶의 자리와 21세기 우리가 사는 공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듯 순식간에 넘나들며 하나가 된다. 성서 텍스트와 문학, 사회학, 인문학 텍스트 사이에서도 스스럼없이 흐르는 듯 연결된 넘나듦이 있다.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문헌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고 적절하게 길어 올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김 목사님만의 풍부하고 생생한 묘사로 살아난 글귀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예레미야와 함께 환상을 보고, 끌려가고, 묶이고, 갇히고,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를 거다. 태어난 날을 저주할 만큼의 깊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비전을 전할 힘을 함께 얻을 거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한 북풍이 아니라 따듯한 해님이었듯이, 김기석 목사님의 언어들은 포근하지만 우리의 비양심과 욕망의 껍질을 스르륵 벗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예레미야’를 읽으며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이드거니’(시간이 좀 걸리면서 분량이 좀 많게), ‘지며리’(차분하게, 꾸준히) 하는 법을 배우리라.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우화처럼, 그리스도인은 생존을 위해 당나귀 울음을 울다 건초더미를 받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나.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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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5)


BWV 244 Matthäus-Passion/

마태 수난곡 No.6 거룩한 낭비


장면이 바뀌고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열립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이를 보고 분개합니다.


폴 틸리히는 이 여인의 행동을 일컬어 ‘거룩한 낭비(a holy waste)’라 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계산에 있어서는 합리적이었고 상황에 있어서는 분석적이었습니다. 좀 멀찍이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제자들의 모습은 현대인들이 표준으로 삼고 있는 상식적이고 균형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교회가 과도하게 기적을 구한다고 비판 받지만 솔직히 기적 없는 종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적,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희생입니다. 십자가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기적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희생의 기적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몰상식이 믿음으로 포장되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의 노력 없는 획득이 기적으로 취급받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은 미덕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의 타락에 열을 올리고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을 내세우는 가운데 어쩌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가장 아름다운 기적, 가장 위대한 기적인 ‘거룩한 낭비’ 즉 ‘희생’을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균형 있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기 좋아하는 신앙인들의 실루엣을 봅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8번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 Da nun Jesus war zu Bethanien, im Hause Simonis, des Aussätzigen, 7. trat zu ihm ein Weib, das hatte ein Glas mit köstlichem Wasser, und goß es auf sein Haupt, da er zu Tische saß. 8. Da das seine Jünger sahen, wurden sie unwillig und sprachen: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7

대 사

제자들

8. Wozu dient dieser Unrat! 9. Dieses Wasser hätte mögen teuer verkauft und den Armen gegeben werden.

8.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8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0. Da das Jesus merkete, sprach er zu ihnen: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8

대사

예수

10. Was bekümmert ihr das Weib! Sie hat ein gut Werk an mir getan. 11. Ihr habet allezeit Armen bei euch, mich aber habt ihr nicht allezeit. 12. Daß sie dies Wasser hat auf meinen Leib gegossen, hat sie getan, daß man mich begraben wird..13. Wahrlich ,ich sage euch: Wo dies Evangelium geprediget wird in der ganzen Welt, da wird man auch sagen zu ihrem Gedächtnis, was sie getan hat.

10.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들어보실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제자들의 대사를 담고 있는 합창곡인 7번곡입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가사인데 마태 수난곡에 쓰인 1545년 루터 성경은 제자들의 대사를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루터가 이 부분에 감정이입을 과하게 한 것 같습니다.

‘Wozu dient dieser Unrat!’은 번역하면 ‘이 쓰레기를 이제 어디다 쓴단 말인가?’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귀한 향유는 소비된 순간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하는 말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돈으로 환산하는 그들의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향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향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이 이야기가 기억되는 곳에서 여전히 그 향기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볼 때 바흐는 매우 기발한 방법으로 이 부분을 표현합니다. 먼저 앞서 언급한 Wozu dient dieser Unrat!’라는 가사의 합창은 에반겔리스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한꺼번에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이는 제자들의 흥분되고 분개하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대사 ‘Dieses Wasser hätte mögen teuer verkauft und den Armen gegeben werden /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는 한 파트씩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는데 마치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의 1막에서 사람들이 주인공을 조롱하는 장면처럼 ‘이것(향유)’을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부드럽게 넘기지만 칼 리히터는 그의 음반에서 바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이 부분을 한 음 한 음 끊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의 대사가 나옵니다. 26장 10절부터 13절입니다. 두 번째 등장이긴 하지만 첫 번째 대사(2절)가 너무 짧았기에 예수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마태수난곡 음반을 선택할 때 지휘자와 에반겔리스트 그리고 예수역할을 누가 부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칼 리히터의 첫 음반의 아쉬움을 굳이 꼽으라면 예수역할을 들 수 있겠습니다. 성악가의 역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만으로 따지면 칼 리히터 음반에서 예수를 노래한 키스 엥겐(Kieth Engen)이 가장 뛰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에는 키스 엥겐의 노래는 너무 무겁게 들리고 고난 받는 어린 양 예수가 아니라 완벽한 예수를 그려 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녹음 당시의 보편적인 예수상이 반영되었고 원전연주로 녹음한 다른 음반과 달리 반음 더 높게 불러야 했기에 더 부담스럽게 들린 면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입니다. 청년 예수는 저음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일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뜻 앞에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가 감당해야할 십자가의 잔 앞에서 흔들리는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레온하르트 1989년 음반에서 막스 반 에그몬트(Max Van Egmond)는 가장 이상적인 예수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도 키스 엥겐의 예수는 덩치가 크고 남성다운 완벽한 모습의 예수께서 제자들을 혼내는 목소리로 들립니다. 반면 반 에그몬트의 노래는 여인의 정성과 희생에 감동하는 마음과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떨림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뒤섞인 청년 예수의 목소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zhzNL7LBkQc



저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가끔 마태 수난곡 녹음의 드림팀을 구성해보곤 합니다. 칼 리히터가 원전 연주로 지휘를 하고 에반겔리스트는 프레가르디엔과 헤플리거 사이에서 잠시 고민한 후에 헤플리거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예수 역할은 당연히 막스 반 에그몬트이며 소프라노는 바바라라는 이름의 두 명의 성악가를 다 부르고 싶습니다. 바바라 슐릭과 바바라 보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rbarme dich mein Gott’은 캐슬린 페리어의 목소리여만 합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마태 수난곡과 함께 복된 사순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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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5)


리스바, 주검을 지키며

가슴이 미어졌을 그대


진실은 왜 희생자들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일까? 왜 가난한 자들, 박탈당한 자들, 경계에 선 자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인가?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할까? 성경은 이따금씩 이상하거나 불편하거나 쓰리거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리스바의 이야기를(사무엘하 21:1-14) 읽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리스바 이야기는 ‘사무엘서 부록’이라고 일컫는 사무엘하21-24장에 포함된 일화다. 다윗이 죽은 사울의 후손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 희생물 삼은 사건의 절정과 결말에서 리스바가 등장한다. 다윗은 왜 선왕 사울의 아들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이 사건은 다윗 시대 3년 동안의 기근에서 시작된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근의 이유를 묻자 하나님은 사울과 피 흘린 그의 집, 그리고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것 때문이라고 알리셨다(21:1). 그러니까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의 이유가 사울의 살인죄와 연결되었다는 계시였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왜 사울이 범한 죄 때문에 다윗 시대에 응징을 받고 고통당해야 하는가? 더욱이 사울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왕으로서 비극적인 죽음까지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사울은 생존 당시 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는가? 문제는 사울의 일생을 다룬 기록에서 기브온과의 사건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든 다윗 혼자만 아는 이 일 때문에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호출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아모리 족속의 생존자들이다(2절a). 일찍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기브온 주민들과 협정을 맺고 그들을 살려주기로 약속했었다(여호수아 9:3-15).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사울의 열정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이 보고된다(2절b).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너희를 위해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절) 물었다. 기브온 사람들은 신중하게 대답한다. 그들은 사울과 그 집안과의 관계에서 돈의 배상이나 죽음으로 보복할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윗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는 적극적인 응대를 한다(4절). 다윗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왕권으로 일을 바로잡겠다는 뜻이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자기들을 학살하고 이스라엘 영토에서 쫓아낸 사람의 후손 일곱 사람을 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이 일곱 명의 후손들을 “목메어 달겠나이다”라고 하자, 다윗은 내주겠다는 즉답을 준다(5-7절). “목메어 달겠다”(개역개정)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구약에서 단 한 번 사용된 표현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사지를 절단하여 벌여놓는다” 또는 불확실하지만 “태양 아래 십자가형”을 뜻하는 매우 끔찍한 표현이다. 이때 다윗은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았다. 다윗은 정적의 후손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일까? 하나님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다윗이지만(22:1-23:7; 24:11-25), 왕권안정을 위한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폭력적인 보복을 묵인한 것처럼 보인다.



이때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살려두었다(7절). 다윗은 사울의 첩으로 알려진(11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낳은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다섯 사람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에게 넘긴다(8절). 다윗의 허락으로 7명의 사울 자손을 넘겨받은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있는 산에서 끔찍한 형벌로 그들을 죽였다. 때는 첫 보리를 베는 날이었다(9절). 이 끔찍한 일이 여호와 앞에서 시행되었으니, 이들 모두 죽임을 마치 제의적인 경건의 표시나 애국심의 발현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거기다 이 일이 시행된 때가 절묘하다. 마치 사울의 핏 값에 대한 속죄가 기근의 끝을 가져올 것 같은 기대를 암시하지 않는가.


그런데 기브아 사람에 의해 죽은 7명의 사울의 후손들은 장례절차도 없이 매장되지도 않은 채 방치되었던가 보다. 리스바가 두 아들과 사울의 다섯 명의 외손자들 주검이 있는 곳에 와서 굵은 베를 바위에 펴놓고 낮에는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도록 주검을 지켰다. 이 일은 곡식을 베기 시작한 때부터 비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10절). 이 비가 늦은 봄이나 여름비인지 가을비 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다면, 리스바의 고된 일은 한 달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6개월을 밤낮으로 주검을 지키며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리스바는 이 고행의 시간을 홀로 어떻게 견뎠을까.


폭력적인 행위와 죽음, 혼돈과 파괴의 중심에 섰던 리스바, 그녀 이름의 뜻은 “빨갛게 타오르는 돌”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한때 사울 왕실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살았을 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디에도 왕실의 안락함을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주검이 훼손되지 않도록 밤낮으로 고행을 하고 있다. 그녀는 낮의 새들을 쫓고 밤에는 홀로 타오르는 횃불이 되어 밤의 짐승들과 외롭게 싸우고 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외로운 침묵과 기브온 사람만을 만족시킨 다윗의 결정이 대조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희생자들을 위한 리스바의 고행이 다윗에게 알려졌다(11절). 복수의 희생자요, 죽은 자들의 보호자였던 리스바의 행위가 다윗의 귀에 닿은 것이다. 비로소 다윗은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요나단의 뼈와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어 벧산 거리에 매달린 사울의 뼈를 비밀리에 수습하여 가져왔다(12절). 그리고서 다윗은 죽은 7명의 사울 후손들과 함께 베냐민 땅 셀라 지역에 있는 사울 아버지의 묘지에 매장한다. 이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13-14절)라는 해설로 사건은 종결된다.


리스바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녀의 버려진 두 아들과 사울의 외손자들의 주검을 보호하려는 투쟁은 다윗을 향한 정치적 행위였던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을까. 모호하다.


언뜻 보면 사울 집안을 향한 기브온 족의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다윗의 허락아래 사울 자손을 죽인 후 비가 내린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울의 상속자들을 제거한 다윗의 직접적인 책임을 면책하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사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보복의 희생물로 죽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아들과 가족을 위한 어미 리스바의 고독한 싸움은 하늘과 땅을 향한 부르짖음이었으리라. 먼 옛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세기 4:11) 말씀하셨다. 리스바의 싸움은 참 인간을 대변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고독한 투쟁에 응답하듯 하늘로부터 비가 내렸다.


하나님은 보복과 증오 섞인 사람들의 행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자식의 희생을 지키며 밤낮으로 고행을 자처했던 힘없고 약한 어머니 리스바에게 응답하셨다. 끝내 희생자 편에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었다.


리스바의 고독한 투쟁에서, 차갑고 얼어붙은 겨울들판을 지나 봄의 사순절을 통과하는 지금, 십자가의 희생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몸이 무덤에 안치되는 순간까지 마음 조리며 지켜봤을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겹쳐진다. 지나친 확대일까. 아니, 역사의 고비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결정을 허용하시고 지켜보시며 당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개입하셨다. 그리고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아들들의 주검을 지켰을 리스바에게서 세월호 희생자들 중 미수습된 9명의 시신을 3년째 기다리며, 침몰된 배 인양을 지켜보았던 가족들의 고행까지 겹쳐진다. 기꺼이 희생자의 편이 되신 주님,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이 봄을 물들이기 전에 속히 수습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김순영/구약학/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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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3)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

아모스 2:4-16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신

서구 사상의 양대 뿌리는 그리스 사상인 헬레니즘과 구약성서 사상인 헤브라이즘이라고 말들 합니다. 오랫동안 믿어져왔던 이 주장이 요즘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거나 철 지난 주장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두 사상에서 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다릅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를 신으로 여깁니다.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나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헬레니즘의 신입니다. 이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조화를 유지하면 됩니다.


반면 헤브라이즘, 곧 구약성서의 신은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는 자연 및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사에 개입하기도 하지요. 이 신은 기뻐할 때는 기뻐하고 섭섭할 때는 섭섭해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냅니다. 헬레니즘의 신과는 달리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위협하고 칭찬하며 위로하고 뭔가를 엄중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걸 구약성서의 하느님이 한다고 믿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명색이 신인데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다 갖고 있고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런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냐는 겁니다. 사람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볼 수 없다는 헬레니즘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편이든 입증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종류의 얘기는 아닙니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가 지금 여기 와서 저를 설득한다고 해도 저는 설득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견해와 신념을 존중하지만 그에게 설득되어 신에 대한 제 생각과 믿음을 바꾸지는 않을 거란 얘기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제 얘기를 듣고 도킨스가 설득되지도 않을 겁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게 아니라 모르면서도 믿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느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저런 일은 안 하신다 등등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실제로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의미이지 정말 하느님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은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 역시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느님은 백성들의 삶에 동행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삶의 고백인 성서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입증할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성서가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지금 우리네 삶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과 더 가깝게 살았거나 더 밀접하게 소통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때 그들이 봤던 것을 지금 우리가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들이 들었던 걸 지금 우리는 못 듣는 것도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때와 지금 다른 게 있다면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심장’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는 이를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약간은 추상적인 말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레브’는 잠시도 뛰지 않고 멈추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심장’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 ‘심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곧 하느님은 절대불변의 원리나 원칙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고 소통이 가능하며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인격으로 인식됐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제목이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인데 이는 예언자의 분노가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분노’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하느님의 분노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정념과 열정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왜 분노하실까?

예언자의 선포에서 하느님의 분노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언자 나훔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내린다. 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나훔 1:5-6).


하느님이 분노하면 산들이 진동하고 언덕은 녹아내리고 땅은 뒤집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곤두박질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진노할 때 그 앞에 버틸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은유적으로 읽으면 될까요? ‘정말 실제로 산들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겠어?’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포를 한 나훔은 현실을 과장했을까요? 그랬다면 그는 왜 과장했을까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영문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변덕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하느님의 확고한 믿음 때문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불의가 행해질 때 아파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낙심하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이런 것이며 이것들이 고스란히 예언자의 분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때론 매우 위험합니다.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악의 경계선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분노는 좋은 것이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악에 굴복할 수 있는 반면 분노를 치솟는 대로 내버려두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언 16:32)고 말합니다.


분노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일까요? 분노는 근원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분노의 반대는 자비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처럼 분노의 반대도 자비가 아니라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분노할 이유도 없습니다. 분노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습니다. 최근에 특검이 요청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첫 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적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분노할까요? 저는 만일 이재용 씨가 먼 우주 어딘가에서 값비싼 물건을 발견해서 돈을 벌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富)는 그렇게 쌓인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겁니다.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착취하고 억압해서 이룩했다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임금을 착취했고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 몰아넣어서 얻어진 재산이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분노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느님도, 예언자도 이런 불의한 일이 벌어졌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분노 속에서 자비하신 분

예언자 하박국은 하느님은 ‘진노 속에서 자비를 기억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3:2). 시편도 분노와 자비가 서로 무관한 게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시편 77:7-9)


왜 하느님은 분노하실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분노하십니다. 정의는 하느님의 분노를 헤아리는 척도입니다. 불의한 사람에 의한 잔혹한 폭력 때문에 희생당하고 상처 입은 피해자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동정이 분노를 촉발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모스 본문 외에도 예레미야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선언합니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5:26-29)?


하느님의 진노가 가져올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여전히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느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1-6)


다음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곧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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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4)


다말, 당신의 위험천만하고 대담한 행동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불편한 이야기들이 종종 눈에 띤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입에 올리기 거북한 가정사 중 하나다. 38장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근친상간의 스캔들로 끝내는가하면, 누군가는 “가족관계증명서”로 읽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증명서 발급자가 다말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시아버지 유다가 주인공이 아니라 다말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세기 38장은 유다,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말, 그녀의 이야기다. 물론 이 말에 불편할 독자도 있겠다. 

    그동안 창세기 전체에서 38장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사건(37장)과 요셉이 이집트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된 사건(39장) 사이에 생뚱맞게 위치하여 해석자들의 관심거리였다. 더욱이 유다는 도덕적인 흠결이 있음에도 아버지 족장 야곱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49:8-12).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국가로 발돋움한 후 유다지파 공동체의 조상으로서 다윗왕국을 수립하는 유력한 인물의 조상 아닌가. 이 때문에 38장은 다말의 관점보다는 유다의 관점에서 읽혔다. 여성이 이야기의 주인공 되기 어려운 남성중심 사회의 한계 안에 다말이 살았지만, 다말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떨까.

    이야기는 “그 후에”로 시작한다(36:1). 야곱의 아들들이 유다의 제안대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고 난 후였을 테다(36:25-36). 유다가 어쩌다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게 되어 세 명의 아들을 얻었다. 아들들의 이름은 엘(Er), 오난, 셀라였다(1-6절). 유다의 할아버지 이삭과 리브가는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사람의 멸망을 미리 알리셨던 것에(15:13-16) 근거한 것일 테다. 그런데 유다가 가나안 여자와 결혼했으니 불길한 징조다. 아니나 다를까.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해 다말(Tamar)이라는 여인과 결혼시켰는데, 엘이 죽고 말았다. 이유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이었다(6-7절). 엘의 히브리 발음 “에르”를 뒤집으면 ‘악’이라는 뜻의 히브리말 “라”가 된다. 죽을 만큼의 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알려지진 않았다. 

    이때 유다는 당대의 풍습을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을 형수 다말에게 보내 죽은 형제의 의무를 이행하게 했다(8절). 형의 대를 잇는 ‘계대결혼’이다. 이것은 남편 없이, 아들 없이 살아가는 고대 여성의 생존의 위태로움과 안위를 고려한 일종의 사회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오난은 자신에게 별 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고, 죽은 형과 남겨진 형수를 위한 것이라 여겨 잠자리에서 정자를 흘려버렸다(9절). 이것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고, 여호와가 그도 죽이셨다(10절). ‘계대결혼이’ 가족의 의무로서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결혼했다면 책임수행이 뒤따른다. 오난은 무책임했다. 이때 유다의 행동 역시 돌출된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말한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이렇게 말한 유다의 속내는 곧 해설자의 목소리로 폭로된다. 유다는 막내 셀라도 그 형들처럼 죽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11절). 유다의 행동 역시 자신의 둘째 아들 오난만큼 이기적이고 무책임했다. 아들들의 죽음이 필시 며느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이즈음 이름도 없이 수아의 딸로만 소개된 유다의 아내이자 다말의 시어머니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채, 죽었다는 보고만 있을 뿐이다. 유다는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자기 양들의 털을 깎는 사람들이 있는 딤나로 내려갔다(12절). 삼손 이야기에도 언급되는(사사기14:1-2) 딤나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위치보다 중요한 것은 친정으로 돌아간 다말의 행동이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딤나에 올라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에나임 길에 앉았다(13-14절). 에나임의 위치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지만, 신체기관의 하나인 “눈들”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시아버지가 “눈들”이 있는 거리에서 자기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창녀’(히브리말, “조나”)로 여겼다니(14-15절), 장소적인 역설에 익살스러움이 더해졌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다가가 하룻밤 동침을 요청하자 다말은 그 대가로 무엇을 줄 것인지 묻는다. 유다는 염소 새끼 한 마리로 흥정했다. 유다에게 당장 현물이 없었던지 다말은 담보물로 도장과 도장을 묶는 끈, 지팡이를 요청하여 받았다. 이것으로 하룻밤의 잠자리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17-18절). 이야기는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다말은 이후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다시 입었다(19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가 유다로부터 받은 도장, 도장을 묶어 목에 메는 끈, 그리고 권위를 상징한다는 지팡이, 모두 값비싼 물건은 아니어도 누구의 것인지를 식별하는 사적인 물건들이다. 다말은 이 일을 위해 주도면밀했다. 

    그렇게 며느리와의 하룻밤을 보낸 유다는 친구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보내 담보물을 찾아오려고 했지만, 그 여인을 찾을 수 없었다(20절). 이 남자는 사람들에게 에나임 길에 있던 ‘신전창녀’(히브리말, “케데샤”)를 수소문하지만, 거기에는 신전창녀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21절). 유다는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라고 했는데, 왜 친구는 ‘신전창녀’를 수소문한 것일까. 신전창녀와의 성관계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가나안 문화의 종교적 관행이었다. 관행에 기대 수치와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면피하려는 의도였을까? 

    친구는 유다에게 그곳에 ‘신전창녀’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자 유다는 부끄러움 당할지 모르니 그냥 두라며,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짚어주며 사건을 종결하려고 했다(22절). 그러나 삼 개월 후 며느리가 “행음하였고(잔타), 그 행음함으로(리제누님)”(23절)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강조점은 유다의 친구가 사용했던 ‘신전창녀’와 관련된 어휘가 아니다. 유다가 사용한 ‘창녀’(조나)라는 말의 어근 동사의 반복 활용이 매우 의도적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유다는 그녀를 끌어내 불태우라고 한다. 유다의 분노는 며느리를 불태워 죽이고 싶을 만큼 컸을 테다. 하지만 이 말을 전한 익명의 어떤 사람은 유다가 말한 ‘창녀’와 관련된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니, 유다를 고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마치 며느리를 향한 분노가 부당하다고 증언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결국 다말이 끌려 나올 때,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말을 전한다. 

“이 물건의 주인 때문에 내가 임신하였습니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25절) 


공개적인 자리로 끌려나왔을 다말의 결정적 한 마디는 아마도 유다를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마음 상태를 알리는 묘사는 없다. 유다는 담담하게 담보물들을 알아보고 말했다. 

“그녀가 나 보다 더 옳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26절)


    불편한 이야기 끝에 이르러 다말의 행동이 단지 성적인 일탈행위가 아니었음을 유다의 입을 통해 발설되었다. 유다를 통해 다말은 신의성실을 다해 자신의 결혼의무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이후 유다는 다시는 더 이상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26절)라고 강조하는 해설과 함께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불편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이야기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면, 저자는 ‘창녀’와 ‘신전창기’라는 말을 교묘히 교차 사용하면서 유다의 잘못을 고발하고 강조한 셈이다. 그리고서 끝내 다말이 낳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27-30절)의 이름에서 밝혀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여운처럼 남긴 채 38장은 끝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베레스는 룻의 남편이 될 보아스의 조상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먼 조상이 된다(룻기 4:21-22).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12-50장)의 큰 주제는 후손을 통해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는 일이다. 이 약속의 성취 맥락에서,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는 연속적인 책임수행을 족장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니라 다말이 그 역할을 이행했음을 보여주었다. 

    유다와 다말의 시대로 돌아가 생략된 다말의 마음을 꼼꼼히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다윗 왕의 여자 조상으로서(룻기4:21-22) 예수님의 족보에(마태복음1:1-6) 올랐으니 그녀 없이는 보아스와 다윗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여기’ 거룩한 말씀의 행간을 오가는 신앙의 독자로서 다말에게 말하고 싶다. 


‘종려나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말, 당신의 위험천만하고 대담한 행동이 끝내 메시아 약속의 계보를 잇는 일이 되었군요. 그러나 그때 두렵지 않던가요? 당신은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손에 들려졌던 유다의 지팡이, 슬픈 얼굴의 여자 족장을 상상해봤어요. 결국 당신의 시아버지 유다와 당신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신비 안에서 숨은 뜻을 이해하고 깨닫기까지 더딘 걸음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고백하게 합니다. 


김순영(구약학/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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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9)


한 가운데 서라


처음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울 때, 넘어질까 조심하느라 페달을 세게 밟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조심하면 할수록 자전거가 자꾸 쓰러진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힘 있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갈 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자리에 멈추는 것은 곧 쓰러지는 일이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야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일을 맡았을 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게으르게 하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는 노련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일에 남보다 너무 앞서 나가도 안 되고 너무 뒤쳐져서도 안 된다고 한다. 신념과 이념에 대해서도 자신은 중도노선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이들을 본다. 중간의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충고한다.


이들이 말하는 중앙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언뜻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거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듯싶다.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중용(中庸)’이란 개념이 과연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또렷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대표적 사상 중의 하나인 ‘중용’을 언급하면서 주로 ‘중(中)’에다 방점을 두는 모습을 본다. 이는 사물의 가운데에 자신의 위치를 두는 공간적 의미로서 중(中)을 강조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중용의 개념에서 ‘용(庸)’을 배제시키면 안 된다. 여기서 용(庸)이란 어떤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시간적 단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군자는 어우르지만 휘둘리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 한 가운데 서서 기울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중용》 10장 5절


군자는 다양한 것을 아우르고 모든 사람들과 어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의견도 포용할 수 있고, 어떤 사람과도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중심이 확고하지 않아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한다.



올바른 지도자는 한가운데 서서 모든 이들의 핵심이 되고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소심하게 몸 사리는 행동을 하거나, 치우지지 않으려 가만히 아무 입장을 취하지 않고 기회만 탐색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중심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전거가 중심을 잡으려면 페달을 밟아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하듯, 중용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밟고 있는 삶의 발판을 힘차게 디뎌야 한다. 내 삶의 바탕을 면밀하게 살피고, 내가 처해있는 영역을 파악하여 자신의 입장(立場)을 공고하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내 발로 삶을 밟아나가는 실존적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위 구절 바로 앞부분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나온다.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북방의 강함인지 남방의 강함인지 되묻는다. 이어서 공자는 ‘남방의 강함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가르치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북방의 강함은 창칼과 갑옷 그리고 투구를 깔고 누워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싸우는 것만이 강함이 아님을 말했다. 상대를 포용하고 감싸 안으며 용서하는 것 역시 강함이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강함은 드러나는 외부로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아니라 내면에 세워져 있는 자기중심의 꼿꼿함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에게 유연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자기주체성 확립을 요청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려 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한 손 마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죄로 인해 병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회당의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앉아 예수의 강론을 듣고 있었다. 그의 눈이 예수와 마주쳤다. 예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아예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가운데 세웠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마가복음》 3장 3-4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총에 떠밀려 늘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병든 자를 세상의 중심에 세워놓으셨다. 당당히 모든 사람의 한 가운데 서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성서의 관심은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가 그를 주목했다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살았던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등이 굽어버렸다. 이집트인들에게 굽실거려야 겨우 생존할 수 있다는 걸 터득하고 살아왔다. 갑작스레 모세가 등장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였다. 자유를 얻으려면 쉽고 편하게 살아왔던 삶을 등지고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들은 불평으로 일관했다.


하나님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무기력한 걸음걸이를 바꾸어 올곧게 걷게 하셨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 (《레위기》 26장 13절)” 올바로 걷는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제 발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기 존재를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살아야 하는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자기의 생각을 세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기복적인 종교생활을 벗어버리고 주체적 자아로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실존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예수는 애굽의 종교생활로 복귀시키려는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항거하였다. 율법의 조항에 매여 사는 종속적인 신앙생활을 거부하였다. 신앙의 핵심은 종교적 규정에 의해 억압되고 피폐해져 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부여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선포하며 당당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였다.


좁은 골목을 지나치거나 가느다란 둑을 주저함 없이 내닫는 자전거를 본다. 불안함이 없어 보이는 자전거 탄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한다. 눈앞에 보이는 좁은 길을 두려움 없이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극복해가는 모습은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좌우의 흔들림 없이 곧바로 제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중용(中庸)의 신앙이다.


바람 불면 먼저 누웠다가 바람 그치면 먼저 일어나는 잡초들의 강한 생명력은 대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올곧은 뿌리에 있다. 보이는 줄기와 잎은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만, 결코 미동조차 않는 보이지 않는 땅속뿌리는 자기중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바람이 분다. 자전거 끌고 강변을 따라 에두르고 싶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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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파토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부서지고 상한 마음, 분노와 실망,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좌절감과 이스라엘의 회개에 강렬한 열망이 오케스트라처럼 조율되는 책이다.




김기석 목사의 ‘예레미야 산책’은 당신의 신부이자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배반과 변심에 당혹해하시는 하나님의 상처 입은 내면을 탐조하는 데 주력한다. 이 책은 전통적인 주석이나 강해서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장들이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로 독자들을 이끌어가며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도록 도와준다. 주제별 본문 강해는 본문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주력하고, 각 단원의 마지막에 배치된 17개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서 본문에 내장된 하나님의 신적 복합 감정인 파토스를 더욱 현실성 있게 공감하도록 도와준다. 메시지는 오늘 21세기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 반향을 일으키는 예레미야의 육성을 재생시키려고 한다.


저자는 예레미야서의 각장의 대지와 핵심을 잘 드러내면서도 인문학적 독서에 단련된 독자들에게는 한층 더 의미 깊은 강해를 시도했다. 시, 소설, 영화, 역사, 철학 등 저자가 독서와 삶의 경험을 통해 길어 올린 통찰들과 성찰의 편린들은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더욱 실감나게 복구하는 데 각주나 부록처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김기석 목사의 성경강해 만이 누리는 독서의 기쁨을 준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 아내, 그리고 백성에게 배반당하고 외면당하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신적 집요성과 견고성으로 육화된다는 점을 가슴 깊이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는지 하나님의 내적 논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김회권/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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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2)


그들은 안 보이는 걸 봤을까?

예레미야 23:25-32


교황에게 거짓 예언자는 누구?

오늘은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주제의 시리즈설교 두 번째입니다. 흔히 예언자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설교자에게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언자처럼 설교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런 이분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제들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두가 제사장이란 뜻으로 ‘만인제사장’을 내세웠습니다.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굳이 중재자인 사제를 찾아가지 않고 스스로 참회하고 회개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개신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만인제사장’ 시대가 아닙니까.


동시에 지금은 ‘만인 예언자’ 시대이기도 합니다. ‘만인예언자’란 말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므로 ‘만인제사장’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언자인 시대인 겁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뭘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은 우리 모두가 답을 찾아야 할 물음인 겁니다.


지난 1월 11일 프란시스코 교황은 우상에 대해 잘못된 희망을 갖지 말고 환상을 퍼트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세속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짓된 희망의 무용함과 그 모순의 민낯을 파헤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준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거짓 예언자들은 돈과 권력자를 추구하고 거짓 이념이나 허망한 말을 일삼는다고 말하고 그것들에 기대서 헛된 위로를 추구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을 바라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가 제 눈에 띤 이유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언급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희망을 갖게 하고 환상을 퍼뜨리며 돈이나 권력자를 추구하게 하고 거짓 이념과 허망한 말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헛된 위로를 구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이 주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을 바라보라고 교황은 말했는데 아쉽게도 ‘복음에 주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짧은 기사라서 그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교황이 말한 거짓 예언자는 구약성서, 그 중에서도 특히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거짓 예언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세 가지 부류의 예언자

지난 주일에 예언자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참 예언자는 ‘하느님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 요즘 말로 하면 ‘내각회의’ 또는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해서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논쟁했던 사람인 데 반해서 거짓 예언자는 그 회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참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할 수만 있으면 회피하려 했습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느님은 ‘말 잘 하는’ 아론을 그와 동행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 내려가서는 말 잘 하는 아론은 잠자코 있고 말을 못 해서 부름을 거부하려던 모세가 이집트의 권력자들을 상대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언자에게 ‘말’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와 다른 독특한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자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여부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걸 알면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의도적인 거짓 예언자’이고, 둘째는 실제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데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이며,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참 예언자’입니다. 그밖에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고 믿고 전하는 사람도 논리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합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 중에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던 대표적인 예언자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5장 30-31절에서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라는 하느님의 탄식을 전합니다. 유다는 망하는 길로 치닫고 있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라는 겁니다.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 예언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백성들은 그걸 좋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는 망하는 길로 치닫는다는 것이지요. 결국 유다 망조의 궁극적인 원인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지 알면서도 그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의도적인 거짓 예언자’는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대개 야훼가 아닌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자고 백성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므로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 아닌 다른 신을 따르거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는 대부분 둘째 부류에 속합니다.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지만 사실은 하느님 말씀이 아닌 말을 전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부류의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직성’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꾼 꿈이나 본 환상이나 들은 음성을 하느님의 메시지로 착각한 데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2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꿈에 계시는 받았다느니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예언을 한다느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며 제멋대로 혀를 놀린다느니 하는 행위는 거짓 예언자가 자신을 속여가면서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환상을 봤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그것들은 당신의 계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착각했다는 것이지요.


이번 시리즈설교를 준비하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요즘 터무니없는 얘기를 쏟아놓는 한국 대형교회 목사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정말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라고 부르는 단체의 주축인 대형교회 목사들이 기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최초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 모여서 가칭 ‘한국교회총연합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19대 대선에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연합기관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천만 성도는 이에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새 연합단체를 결성하려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온 기존단체 한기총이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자 새 옷으로 갈아입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연합기관 결성이 ‘하느님의 명령’이므로 천만 성도는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이 진정 하느님에게서 비롯됐다고 그들은 믿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저는 믿지 않는데 그들은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믿는가 말입니다. 혹 자기들도 안 믿으면서 자기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인 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저를 속였습니다!

예언자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가리려면 두 가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언자 자신이 자기가 들은 음성이나 본 비전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여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 입장에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그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착각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첫 번째 경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두 번째 경우가 절대적으로 쉽다는 얘기는 아니고 단지 첫 번째 경우와 비교해서 쉽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는 예언자의 행실을 잘 살피라고 말합니다. 그의 행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덕스럽지 않다면 그가 하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하느님 말씀처럼 들려도 그는 참 예언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예언자가 자기 말이 하느님 말씀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예레미야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예레미야 20:7-9).


예레미야의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이 그를 속였답니다. 하느님에게 속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부름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에게 설득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어떻게 설득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그가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주시겠다는 말로 설득하셨습니다(1:9-10). 그런데 그가 전할 말은 심판과 파괴, 멸망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야훼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예레미야를 위협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름 받았을 때 받았던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당신의 말씀을 넣어주시겠고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주님이 약속을 안 지키셨으니 말입니다. 그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해도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반복해도 그의 가슴은 다짐과는 무관하게 주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는 겁니다. 주님 말씀이 그의 심장을 불태우고 뼛속까지 타들어가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백성들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가슴을 불타게 했을까요? 어떤 점에서 주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을 불태웠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가슴속을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걸 그가 봤기 때문이란 얘기입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갔으므로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1) 왜 하필 저입니까?http://fzari.com/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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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8)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행사를 참여했을 때 간혹 만났던 진기한 장면들이 있다. 행사의 장(長)이 누구이며 좌우에 어떤 지위의 사람들로 위치가 정해지고 순서가 정해졌냐 하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대부분 미리 정해진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행사를 치르지만, 간혹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자신의 위치를 변경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발생하는 일이다.


따라서 행사를 준비하는 진행 팀이 정작 행사를 어떻게 의미 있게 진행할까 하는 것보다 자리를 잘못 지정하여 혹 지적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참석한 유력한 이들이 충분히 대접받는 위치에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으면 좋은 행사였다고 평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儒家)는 특히 형식에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가가 강조하는 ‘예의(禮儀)를 갖춘다’는 것은 적합한 형식을 잘 갖추어 행동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유가의 논리는 제도와 형식에 치중한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허례허식을 추방하기 위해 강력하게 반(反)-유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가에 대해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유가의 경전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단 한 번이라도 어떤 사람의 해설서가 아니라 직접 자기 스스로 유가 경전을 읽어보았다면 공자나 유가에 대해 그토록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편견이 직접 대해보지 않은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매우 강조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탕의 철학으로 인(仁)을 주장했고, 상호관계성을 위한 방법론으로 예(禮)를 주장했다. 이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관한 강조가 아니었다. 공자는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해 나갔다. 오히려 형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예식은 사치하기보다 검소해야하고, 장례는 형식 갖추기보다 슬퍼해야 한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논어》, 〈팔일〉 4장 3절


공자 당시에도 형식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시 관료들은 자신들의 집과 의복 그리고 마차 등을 화려하게 꾸며 일반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려 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관혼상제도 남들보다 능력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사치하게 행사를 치르곤 하였다. 위 문장은 행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외형에 치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근본적으로 관혼상제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공자가 말한다. 모든 행사에는 그 본래적 취지가 담겨있다. 좋은 일을 만났기에 축하하거나, 나쁜 일이 발생했기에 위로하려는 것이 기본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이러한 일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 실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다.


공자는 어떤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논어》, 〈이인〉 13장은 “예의 근본인 겸손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있겠는가(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라고 하였다. 예(禮)의 강조는 예의 틀인 예식(禮式)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예를 갖추게 만든 근본적인 정신인 겸손[禮讓]에 대한 집중이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특별한 절기가 되어 도로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걸하는 걸 목격한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이나 도움을 주는 이들이 모두 당당한 것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도움 주는 이들은 선행에 대한 자부심으로, 도움 받는 이들은 도움을 주는 자들에게 자부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또 다른 종교발생지에서는 큰 단위 액면의 지폐를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 바꿔 수십 명에게 나누어주면서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고 으쓱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구제한 사람의 수를 기억하여 나중 심판 때에 구제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죄를 감해준다는 교리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저 형식만 따라하는 한심스런 태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2절


한발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남을 돕는 일 자체를 인식하지 말라 하신다. 위 본문 다음에는“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오른손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인식 없는 구제를 하라고 한다. 은밀함을 유지 못하는 선행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 CIA 앞마당에는 ‘크립토스(Kryptos)’라 불리는 유명한 조각 작품이 있다. 미국의 CIA는 성서 구절에서 이름을 딴 조각을 앞마당에 세워놓아 자신들의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임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크립토스’라는 단어는 위 성서구절의 ‘은밀하게’의 그리스어이다.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등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단어이다.


크립토스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단어가 ‘신비동물학(Crypotozoology)’이다. 이는 미확인 동물종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과로서 각종 신화나 경전에 등장하는 신비한 생명체를 연구한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네피림(Giant)이라는 거인이나 요나를 삼켰던 거대한 물고기 등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를 연구하기도 한다.


‘은밀함’이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는 감추어져 알 수 없는 존재나 사건을 꾸며주는 말이다. 신앙적인 구제는 철저히 감추어지거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CIA 앞마당의 크립토스에 새겨진 암호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풀 수 없다고 단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신앙인의 구제는 영원한 미제(未濟)행위로 남아야 한다.


어딜 가나 끝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리에 앉으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끄는 게 싫기 때문이다. 실은 나의 존재나 흔적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나의 존재를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 속에서 취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 어떤 이는 바위에 이름을 새겨두기도 한다. 자신의 동상을 세워 길이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을 세우거나 구제기관이나 복지단체를 설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열심히 이름을 따서 지은 건물이나 구조물이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는 못한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기억보관장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의 기억에 입력이 되면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영원히 잊지 않으신다. 은밀함이란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인의 구제행위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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