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날의 호랑이

- 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중에서 -


호랑이 한 마리가 숲에서 잡혀와 우리에 갇혔습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길들이려고 했지만 호랑이는 끈질기게 으르렁대며 우리의 쇠창살을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숲의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굶김으로써 대응했습니다. 그는 여유롭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척 사나운 호랑이로군. 하지만 당나귀처럼 굴게 될 거야. 내가 먹이를 갖고 있는데 주지 않을 테니까.”


호랑이는 배가 고파졌고, 조련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조련사는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면 고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호랑이지 고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 굶주림에 굴복한 호랑이는 조련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양이처럼 야옹거렸습니다. 하지만 조련사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먹이를 달라고 하자 조련사는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백수의 왕으로서의 체신 때문에 호랑이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며칠을 먹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결국 호랑이는 당나귀처럼 히힝댔습니다. 그날이 호랑이가 우리에 갇힌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호랑이가 히힝대는 소리를 들은 조련사는 고기가 아닌 한 더미의 건초를 던져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숲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에 나오는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 중에서, 165-166쪽).




이 슬프고 참담한 이야기는 시리아 작가인 자카리아 타메르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 작가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투옥, 검문소, 모독, 고문, 폭격과 학살, 굶주림을 동원해 사람들을 굴복시키려는 조련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싸우고 저항하면서 자기 영혼을 불모지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나는 내 영혼이 증오와 어둠의 바다에서 헤엄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즉각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욕망 충족’이라는 건초더미를 들고 우리에게 히힝거리라고 말합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열 번째 날의 호랑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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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들에게, 혹은 이 세상할 때 우리들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며 사십시오. 물질도 나누고, 지식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정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자랍니다. 그렇게 가운데서 악의 영토는 줄어들고, 선의 영토는 늘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더러 들려 바다에 빠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 배만 불리려는 비뚤어진 사랑 때문에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는 기쁨,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려 할 때 돌연 삶은 축제가 됩니다. 성도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 자부심으로 일어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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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5)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2)

호세아 11:8-9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는 96%가 같다고 하고 다른 연구는 98.5%가 같다고 하는데 이 차이가 과학자들에게는 의미가 클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유전자는 어느 정도나 같을까요? 뜬금없는 생각이지요? 단순히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화낼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 아닙니까? 물론 하느님에게 유전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어떤’ 성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인간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표현해왔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외모까지 인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오른팔을 높이 들거나 휘둘러서 구해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오른팔을 갖고 계실까요? 그럼 왼팔은 어떨까요?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왼팔 얘기는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인간적 사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도 꿈을 꾸는지, 자의식이 있는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죽으리란 사실을 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 반가워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강아지를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지만 고양이에게는 그게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지요. 서로의 감정을 오해해서 으르렁거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개가 반가워서 꼬리를 흔든다는 것도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따름이지 정말 그런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느님이 정의롭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분노한다거나 용서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사고하고 인간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늘에서 땅이 먼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는 생각이고 표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는 생각도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사고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고하고 표현할 때 인간적인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와 비유, 상징을 하느님에게 적용하면 빛이 바래고 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결혼한 부부관계


지난번에 구약성서에서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저지른 잘못을 왜곡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또 할 수 있으면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이므로 용서받기 위해 ‘회개’가 강조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는 이와는 성격이 다른 용서가 있습니다. 이런 용서를 잘 보여주는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왕이나 재판관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거나 재판관으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하는 피고의 자리에 놓입니다. 대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한 부부관계로 표현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설화자는 그녀를 ‘음란한 여자’라고 표현했는데 호세아가 그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그녀가 음란했는지 아닌지, 호세아는 그런 여자인지 알고 결혼했는지 아닌지, 설화자가 그녀의 행실을 보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규정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좌우간 그녀는 호세아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음란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여자답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그런 고멜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람이 나서 집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오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치 않은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행위는 하느님이 내린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바람을 피워서 집을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호세아에게 그렇게 명령했으니 하느님은 당신의 계명을 스스로 어긴 셈입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비유했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관계는 나이 많은 남자가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린 소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돌보다가 때가 되어 결혼한 부부관계와 비슷합니다. 남자는 성숙한 어른인데 여자는 어린 소녀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9:10; 11:1-4).


사랑을 배신당한 하느님


이렇듯 하느님은 미래의 배우자 이스라엘을 애지중지 돌보고 키웠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내(하느님)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2:8)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신 바알의 축제일만 되면 그에게 향을 피우고 야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내쳤습니까?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주 너희의 하느님 아니냐? 그 때에 너희가 아는 하느님은 나밖에 없고 나 말고는 다른 구원자가 없었다.”(13:4-5)라면서 이스라엘을 설득합니다. 아니, 이것은 ‘설득’이 아니라 ‘애걸’에 가깝습니다. 바람나서 가출한 아내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애결복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왜,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그랬습니다. 이 점은 조건부 용서를 뛰어넘습니다. 조건적 용서에서는 용서하는 편이 용서를 구하는 편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이 경우에는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고 이제는 표범처럼 되어서 길목을 지키겠다. 새끼 빼앗긴 암곰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그들을 뜯어먹을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찢어 먹을 것이다(13:6-8).


살벌하고 폭력적이며 끔찍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이처럼 분노에 찬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정말 하느님은 굶주린 사자나 표범이 되고 새끼 잃은 암곰이 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당신 백성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작정인 걸까요?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당신 백성을 뜯어먹고 들짐승더러 나머지를 남김없이 찢어먹게 하려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배신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하느님이 하신 다음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느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11:8-9).


우리는 여기서 자기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 그래서 애간장 끊어지는 아픔을 겪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의 결혼생황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입니다. 특히 부부 간의 사랑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고결합니다. 따라서 이 고귀한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환멸스럽고 사무치게 가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과 호세아는 똑같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듯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의 심정을 하느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그는 이제 나의 아내가 아니며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색욕을 없애고 그의 젖가슴에서 음행의 자취를 지우라고 하여라(2:2)!


호세아는 고멜과의 결혼과 그녀의 배신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참담함을, 그 환멸과 아픔을 호세아도 경험함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배신당한 하느님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정(compassion)하게 된 겁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이 하느님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혼돈과 분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릴 수 없는 애정을 비춰주는 거울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멜은 회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이 조건부 용서입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고멜은 어땠습니까? 고멜은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까?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잘못을 회개했을 리 없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용서의 조건들 중에서 한 가지도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호세아는 이런 고멜을 두고 그녀를 용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론을박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다가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 해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당사자 고멜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런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 곧 가해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역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만 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해결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음을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합니다. 성서에서 죄의 용서를 말할 때 대개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곧 ‘내가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가 아니라 ‘네가 용서를 받았다.’(You are forgiven) 또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Your sin is forgiven)라는 식으로 씁니다. 또한 주어가 하느님인 경우에는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수동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하느님에 의해서’(by God)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용서의 주체가 하느님이란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역시 수동형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수동형의 경우는 하느님이 생략된 일반적 수동형의 경우와 의미가 좀 다릅니다. 다음번엔 둘이 어떻게 다른지, 왜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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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8)


왜 여자 예언자 훌다인가?


    한 사람의 의인이 패역한 나라에 내려질 재앙을 막을 수 있는가? 올바른 지도자 한 사람이 국가의 위기를 모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일시적이지만, 악행에 대한 심판의 연기는 가능하다. 국가적 재앙위기를 타개할 기회의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주전 7세기 남 유다 땅의 요시야 왕이 그 본보기다. 요시야 왕은 할아버지 므낫세 왕의 악행을 종결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 잘 알려졌다(주전640-609년). 그가 어떻게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을까. 왕의 과감한 개혁의지만으로 가능한가? 요시야 왕 통치시간 동안, 개혁 실행에 결정적 추진력을 제공했던 여자 예언자 훌다가 있었다. 훌다의 기록은 이스라엘 왕국 역사 한 귀퉁이 작은 일화로 존재할 뿐이지만(열왕기하22:14-20; 역대기하34:22-28), 새봄을 알리는 전령처럼 낮은 땅의 풀꽃으로 왔다갔다. 훌다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몇 안 되는 여자 예언자들(미리암, 드보라, 이사야의 아내, 노야다)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왕실의 기득권층 틈바구니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요시야 왕은 겨우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았다(열왕기하22:1). 우상숭배를 걷어내지 못한 그의 아버지 아몬 왕이 신복들의 반역으로 암살당한 이후 왕위에 올랐으니 그 길이 쉬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 눈에 정직하고, 다윗의 길로 행하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는 행보를 보여준 왕으로 평가받는다(2절). 그의 출생이 남달라서였을까? 실제로 그가 태어나기 약 3세기 전(주전10세기)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이 벧엘에 신당을 짓고 제사할 때, 그의 출생은 유다 출신 익명의 예언자에 의해 예고되었다(열왕기상13:1-2).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은 요시야가 통치한 시기, 주변 국가들의 상황은 때마침 북이스라엘을 파멸로 이끈 앗시리아가 제국의 자리에서 바벨론에 의해 퇴출당하는 위기 상황이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가나안 지역의 작은 나라인 남 유다는 일시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 통치의 모범이어야 할 이전 이스라엘 왕권의 타락은 국가적 파멸을 향해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었다. 때문에 왕실 권력과 종교권력의 타락을 꾸짖고 고발한 예언자들의 활동은 각종 권력의 중심부와 복잡하게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언자의 출생 예고에 따라 어긋남 없이 태어난 요시야 왕이 20세 갓 넘은 때였다. 그가 서기관 사반을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성전 보수공사를 시작했다(3절).  요시야 왕의 지시에 따라 성전 보수공사를 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한 귀퉁이에서 “율법책”을 발견한다(8절). 이 책을 서기관 사반이 읽고 충격을 받아, 왕에게 가져가 왕 앞에서 낭독했다(10절). 왕은 사반이 읽어주는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으며 애통해 했다(11절). 요시야 왕은 대체 율법책의 어떤 내용 때문에 이토록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을까? 

   학자들은 이 책의 정체를 놓고 여전히 논쟁 중에 있지만, 이른바 율법서 오경을 일컫는 “그 율법 책”(히브리말, “쎄페르 핫토라”)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여호수아서, 느헤미야서에서 발견된다(신명기28:61; 29:21; 30:10; 31:26; 여호수아1:8; 느헤미야8:3). 책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지 않지만, 모세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성문화된 언약의 가르침이 오랜 동안 준수되지 않고 성전 구석에 방치된 채로 긴 세월 지나온 것만은 확실하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힐기야 대제사장과 서기관 사반, 사반의 아들 아히감,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왕의 수행원 아사야에게 명령하기를(12절), 그 책 내용에 대해 여호와께 물어보라는 것이다(13절). 그러니까 요시야는 “이 율법책”에 대한 신성한 승인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왕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여자 예언자 훌다를 찾아간다. 이 일행들 중 아히감은 이후 심판과 회개를 외치는 예레미야 체포와 기소, 살해의 위협에서 구해준다. 이때 악볼의 아들도 이 일에 관여한다(예레미야26:22, 24). 왕의 명령을 받고 훌다를 찾아간 사람들의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거짓 예언자들과 싸우며 회개를 외치는 참 예언자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지식의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찾아간 훌다는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했던 살룸의 아내였다(14절). 훌다의 남편 살룸의 직업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역대기하34:22).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의복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책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왜 그들은 훌다를 찾아 갔을까. 당시 예레미야(예레미야1:2), 스바냐 예언자가 활동하고 있었다(스바냐1:1). 이들이 여자 예언자 훌다를 찾아온 이유가 생략되었지만, 대제사장을 비롯해 왕실의 사람들이 그녀의 학자적이며 예언자적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일 테다. 남성중심의 권력 엘리트 집단에 속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이 예복 관리인의 아내였던 예언자 훌다를 찾아간 장면을 상상해 보라. 어떻든 자초지정을 들었을 훌다는 자기를 찾아온 대제사장과 왕이 보낸 사람들 앞에서 왕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다. 훌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말씀, 곧 “예언”을 정확하게 전한다. 

   훌다는 유다의 왕이 읽은 책의 내용대로 예루살렘과 그곳의 거주민들에게 재앙과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한다. 그녀는 이곳을 향해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않을 것과 그 이유를 밝힌다.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는 신탁의 말씀이다(15-17절). 그리고서 유다 왕 요시야에게 줄 신탁의 말씀은 조금 달랐다.

내가....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19-20절)


훌다 예언자는 앞으로 일어날 바벨론에 의한 멸망을 기정사실화했지만, 요시야 왕만큼은 비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러니까 심판의 때가 닥칠 것이지만, 적어도 요시야 통치기간 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로였다. 훌다가 국가적인 심판이 내려질 것을 전했지만,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신실함이 심판을 연기시킬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때 훌다는 하나님 말씀의 대행자요, 성전에서 발견된 책을 판독한 해석자 곧 율법학자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열왕기와 역대기 저자에 의해 훌다는 요시야 왕이 읽은 책이 거룩한 문서라는 것을 승인한 처음 사람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제 훌다 예언자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은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의 개혁을 서두른다. 요시야 왕은 제사장들, 선지자들, 유다 모든 사람들, 곧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전으로 불러 모아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낭독한다. 거기 모인 온 회중은 여호와 말씀 앞에서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하고 언약의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한다(23:1-3). 요시야는 마치 그 먼 옛날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을 향해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6:5) 권고한 것처럼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새롭게 했다. 

    물론 반 가나안적인 개혁을 시도한 왕이 요시야만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 요아스(열왕기하12장), 예후(9-10장), 히스기야(18장)가 있지만, 성전 재정비와 함께 거룩한 문서의 발견과 승인과정은 남달랐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과 정경의 확실성을 보증한 훌다 예언자의 말을 듣고 백성들과 언약갱신의식을 행하고, 곧바로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훌다는 이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시대 개혁의 물꼬를 열어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이다. 동시대 예언자였던 예레미야와 스바냐처럼 책을 남겼거나 더 이상의 활동기록이 없지만, 요시야의 개혁에 불을 지피고 가담했을 것은 자명하다. 

    왕실권력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 역시 남성중심으로 조직화된 사회의 한복판에서 훌다는 낮은 땅에 피는 새봄의 꽃처럼 왔다가 사라졌지만 훌다의 후예들은 멈추지 않고 어두운 시대의 봄꽃을 피울 것이다. 지금도 훌다의 후예들은 남성 중심의 위계적이거나 폐쇄적인 신학의 영토에서 이름도 없고 빛난 영광도 없지만, 조용히 시대의 어둠을 뚫고 작은 촛불로 타오를 것이다. 언젠가 훌다의 후예들을 통해 조국 교회의 치우친 지도력의 불균형이 조정되는 때를 기대해본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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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


예레미야에게는 말이 찾아오곤 한다. 언어도 문법도 확인할 수 없는데, 곱씹을수록 메시지가 들린다. 신탁이란 것이 늘 이렇다. 혼자서만 듣고 말 그런 말이 아니다. 그 때마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며, 자기에게 들린 말을 바룩에게 다시 들려준다. 들려 온 말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히브리어 어법에 맞게, 히브리어 문법을 입혀서, 히브리어 언중이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받은 바 그 메시지를 바룩에게 먼저 전달한다. 예언자에게 수납된 계시는 대필자代筆者 amanuensis에게서 “기록”으로 바뀐다. 예언자의 계시수납 과정에서 이미 한 번 형태가 치환置換된 신탁이 대필자에게서 문학적으로 완성된다.


예레미야는 계시의 수납과 선포 과정에서 왜 기록을 대필자에게 맡길까? 예언자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나? 말로 외친 신탁과 글로 적은 신탁의 발생 순서를 묻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를 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그것이 예레미야의 작품인가 바룩의 작품인가?




우리 앞에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예레미야서를 가지고 우리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끙끙 앓는 하나님》의 저자 김기석이다. 그런데 그도 혼자가 아니다. 낯선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독자 앞에 나타난다. 이 세상 어느 예레미야 해설서를 보아도 예레미야를 설명하면서, 예레미야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 곧 신영복, 에드워드 사이즈, 우석영, 정경옥, 빅터 프랭클, 루미, 노자, 임철규, 플라톤, 헤로도토스, 에릭 메택시스, 이승우, 김상환, 모레스 마이모니데스, 앙드레 말로,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레이첼 카슨, 아베 피에르 등을 데리고 다니는 저자는 김기석 말고는 없을 것이다.


김기석은 목사요 설교자다. 현학적이지 않고, 실존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혼자서 끙끙대지 않고, 삶의 체험이 다양하고 삶에 대한 관찰이 심오한 시인과 소설가와 철학자와 신학자와 인문학자들과 옛 성현들을 친구삼아 함께 다니며, 그들에게서 언어를 배우고, 지혜를 터득하고, 지식을 전수 받아, 예레미야가 말하고 바룩이 쓰고 교회가 전수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말씀을 받는 사람과, 말씀에 뼈와 살을 입히는 사람과, 말씀을 번역하는 사람과, 말씀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는 사람, 이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독서 체험일 것 같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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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1)


이 땅에 남은 자


때때마다 전쟁의 기운을 부추기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지인은 이 나라를 떠나 안전한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몇 년을 갖은 노력을 기울이더니 기어이 얼마 전 짤막한 인사말을 남기고 우리나라를 떠났다. 한결 편안해진 그는 괜히 거기 있는 이유 없다며 얼른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전자메일을 보냈다.


문득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자기 가족은 아무 문제없다며 하얀 이를 온통 드러내며 웃던 오래전 알던 이가 생각났다. 미국에 잠시 공부하러 갔을 때, 작은 아이가 태어나 그 나라 국적을 획득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 국적을 가진 이들과 그의 부모는 서울의 모 집결지로 모여 안전한 나라로 후송이 된다는 걸 엄청 자랑했다.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 ≪열왕기하≫ 24장 14절


전쟁은 땅을 황폐화 시킨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파괴하여 무기력하게 만든다. 전쟁은 훌륭한 인재들을 소멸시킨다. 쓸 만한 사람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모조리 끌려가거나, 뜨거운 마음으로 적에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거나 한다. 결국 전쟁이 지나간 뒤에는 소위 별 볼일 없는 사람들만 그 땅에 겨우 남아있게 된다.


‘장자’는 불쑥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기존 생각을 뒤엎어버린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정작 쓸 수가 없고, 쓸모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쓸 수 있다는 역설을 내놓는다. 근본적으로 과연 쓸모가 ‘있다 없다’의 핵심인 ‘쓸모’라는 게 과연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갖는다. 나아가 우리가 정작 사용하는 것이 있음[有]인가 없음[無]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는 까닭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쓸모’는 알지만 ‘쓸모없는 쓸모’는 알지를 못한다.(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 ≪장자≫, <인간세> 9장


장자는 그릇을 예로 들면서 과연 쓸모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철학적이며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그릇은 그 재질이 나무이든 금속이든 어떤 그릇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릇의 한 가운데인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 빈 공간에 음식을 담거나 물건을 담아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장자는 대나무나 금속으로 된 피리가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 대궁 자체가 아니라 피리에 뚫어놓은 빈 구멍을 통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있음[有]을 통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없음[無]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간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있음[有]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없음[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고대국가의 시스템의 하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전 분야를 떠받치고 있는 기층민에 대해 큰 관심을 두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의 눈에 이들은 그야말로 쓸모없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들 하부계층민이 없으면 곧장 국가시스템이 무너져버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부계층민이야말로 쓸모없는 쓸모였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장차 국가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리 알았고, 삶을 통해 국가의 꼴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간파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로 국가가 유지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알고 있었기에 예언자였고, 사람들의 눈치 안보고 정확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했기 때문에 참선지자였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내버리고 타국으로 가버리는 이들을 만류하기 위해 뒤따라가던 예레미야의 간곡한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아이라서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예레미야의 두려운 눈빛이 눈앞에 어른댄다. 무엇보다 이제 모두가 떠나고 짐승도 살지 않을 버림받은 땅이 될까 걱정하는 예언자의 근심어린 기도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린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 ≪예레미야≫ 31장 7-8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신다. 북방으로부터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겠다고 하신다. 그들 중에는 장애인과 여성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강하고 훌륭한 이들을 불러 모아 땅을 회복시키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약한 자 부족한 자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 1:27-28)”라는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어딜 가도 자신의 마음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날 수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 나라를 등지는 것이 더 힘든지 모른다. 이 땅에서 남은 자로 지내는 건 어떤지.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며 사는 것은 어떤지’라고 말이다. 그들은 아무 대답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땅을 떠났다.


결국 이 땅에 남은 자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가진 것 없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함을 맛보기로 했다. 동물조차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되어도 괜찮다. 비루한 존재들만이 듬성듬성 겨우 생존하는 곳이어도 괜찮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지낼 것을 다짐했다.


간혹 전자메일이 이 땅을 떠난 이들로부터 온다. 이 땅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쓸모없는 인생들이 득실대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투덜대던 이가 이제 다시 쓸모가 있음직 하니까 다시 오고 싶다고 한다. 이제 돌아와도 더 이상 쓸모 있는 자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도 굳이 이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예수께서 사람 낚는 귀재인 전문정치인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조직 또는 기획능력이 탁월한 이들을 선발하여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평생을 지낸 우직한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그의 약속대로 예수의 제자들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믿음이란 나의 쓸모없음을 들어 쓸모 있음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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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역사의식

만일 유대교에서 이들의 해방절인 유월절을 과거 회고적이라고 지우자고 하면 어찌 될까? 당연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일이 민주당과 통합하는 안철수의 새정치연합 쪽에서 일어났다. 4·19와, 5·18을 비롯해서 6·15와 10·4선언을 과거 회고적인데다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정강정책에서 삭제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당장 민주당 쪽은 강하게 반발했고,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역사에는 중대한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전환점은 민족 구성원 모두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 정신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토대로 앞으로 나갈 방향을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와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과거사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과거사로 멈추지 않고 지금의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우리에게 1910년의 일본에 의한 합병과 1919년의 3·1운동에 대해 과거 회고적인 일이니 자꾸 되새기지 말고, 외교적 껄끄러움이 있으니 대충 잊고 미래를 지향하며 나가자고 한다면, 그 후안무치에 우리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특별히 민주당한테 6·15와 10·4는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향점을 일깨우는 기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정신을 가진 당과 통합한다면서 그 기둥을 송두리째 뽑자고 요구했으니 그것은 기본적인 역사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식을 접한 이들 상당수는 경악하고 있다. 여당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통합 야당의 출현에 기대를 걸고 있던 이들은,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일은 안철수와 그의 세력에게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통합 야당의 위력을 스스로 위축시키는 자충수가 되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의식과 역사적 책임과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쪽은 6·15와 10·4를 정강정책에서 삭제하자고 했다가 반발을 사자, 기껏 한다는 말이 7·4와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게 그렇게 둘러댄다고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있는가?

정강정책은 정당의 소신과 신념을 밝히는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그걸 형평성 논리를 대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겠다? 누가 이걸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며,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가? ‘새 정치’를 하겠다면서, 이처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등 부끄러운 역사의식의 부재를 날것으로 보여준다면 새 정치라는 말 자체는 우리 모두에게 재난이 될 뿐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를 썼고 희생된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삭제하자는 것은, 이들의 의식 속에는 역사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김한길, 안철수는 부랴부랴 심야회동을 통해 이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반영하기로 했다지만, 이미 드러난 의식의 공동(空洞)상태는 어찌할 것인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단지 먹고사는 문제로 격하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존감과 역사의식을 폐기하려는 자세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한다. 오래전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겠다는 믿음 하나로, 배고픔과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났다. 그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역사적 존엄성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우리를 배부른 돼지가 되려고 안달하는 존재로 취급하지 말라.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편집자 주/이 글은 2014년 3월 20일자 한겨레신문 [야! 한국사회]에 쓴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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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7)


최초의 여성 예언자 미리암을 잊지 마오


사람이든 사건이든 기억은 약속과 다짐을 동반하곤 한다. 지나간 역사의 인물을 기억하여 지금여기로 불러내는 것은 현실의 경험을 새롭게 하여 공공의 반성적 성찰을 위함이다. 주전 8세기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미가 예언자가 기억해낸 인물들이 있었다. 12 소예언서들 중 가장 중심에 위치한 미가는 ‘남왕국의 아모스’, 또는 ‘작은 이사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남 유다의 사회정의를 파탄으로 몰고 간 당대의 정권(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 미가 1:1)을 향해 거침없는 고발을 퍼부었던 예언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변론하겠다는 여호와의 뜻을 전하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묻혔던 첫 여성 예언자 미리암의 존재를 사람들의 잠자던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모세의 누이로서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후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미리암이 거명된다. 그것도 모세와 아론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가 6:4)


이 신탁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에서 미리암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의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한 예언자였음을 똑똑히 밝힌다. 그러나 대체로 신앙의 독자들은 미리암을 모세의 누이로만 기억할 뿐, 그녀가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활동한 것을 지나쳐버리곤 한다.


왜 우리는 미리암을 최초의 여성 예언자로 즉시 기억해내지 못할까? 미리암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로 기록되었지만(출애굽기 15:20), 사사시대의 예언자이며 사사였던 드보라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경 이야기에서 일곱 번 등장하지만, 모두 간결하게 언급되고 무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출애굽기 2:4, 7-9; 15:20-21; 민수기 12:1-16; 20:1; 26:59; 신명기 24:8-9). 그러나 비록 작은 분량의 기록일지라도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미가 예언자의 입을 통해 다시 전해진 것처럼, 미리암의 예언자적인 사명은 가볍지 않았다.





미리암의 이름은 그녀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듯 보이는 구원의 중요한 시점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미리암의 정확한 히브리말 발음은 “미르얌”이다. ‘쓰다’ 또는 ‘모질다’라는 뜻의 “마르”와 ‘바다’라는 뜻의 “얌”의 합성된 형태가 “미르얌”이다. 출애굽기 내러티브 흐름에서 ‘물’은 중심적인 은유다. 미리암은 어릴 적부터 물과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모질고 혹독한 바로의 폭압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성장했다. 이집트의 바로가 히브리 노예들의 폭발적인 인구성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인구 억제정책의 일환으로 태어나는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나일 강물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출애굽기 1:22). 바로의 영아대학살 정책이 실행되는 절체절명의 시점, 어떤 레위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2:2).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모세였다


레위인 부부는 바로의 명령에 불복종했지만,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아기의 어머니는 갈대 상자를 만들어 방수 처리하고, 거기에 아기를 눕혔다. 그리고 남자 아기의 누이는 상자를 나일 강에 띄우고 따라가며 지켜보았다(2:4). 아슬아슬한 상황, 마음 조리며 따라갔을 아기의 어린 누이는 결정적 순간을 만나게 된다.


때마침 바로의 공주가 강가에 나와 있었다. 공주가 갈대상자에서 울고 있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를 발견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소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주에게 가서 유모를 소개하겠다고 제안한다(2:6-8). 소녀는 대담했다. 한참 후에나 이름이 밝혀질 소녀 미리암이 대화의 주도권을 갖고 공주를 설득했고, 자신의 어머니를 공주에게 소개시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지만, 소녀 미리암의 민첩한 판단력과 지혜는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할 어린 생명을 구했다. 그뿐인가, 단절될 뻔한 가족관계를 묶어주는 도구였다.


이후 미리암은 이야기 중심에서 사라졌다가 ‘홍해’(히브리말, “얌-쑤프”, ‘갈대의 바다’, 13:18)를 건넌 후에 다시 등장한다. 이때 미리암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했고(15:19),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15:20)으로 소개된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여성 예언자들(사사기 4:4, 드보라; 열왕기하 22:14, 훌다; 이사야 8:3, 이사야의 아내; 느헤미야 6:14, 노아댜) 중에 첫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대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독특했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체로 결혼한 여성이며 남편과 자녀를 두었기에 이무개의 아내나 어머니로 소개지만, 미리암은 결혼한 여성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미리암은 이른바 ‘바다의 노래’(15:21)를 부르며 여성들을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예언자였고 음악가였다. 예언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탬버린)를 잡고 나서자 모든 여인들이 탬버린을 들고 동그란 원을 그리며 함께 춤췄다(15:20). 이때의 현장을 상상해 보았는가? 고단했을 두 발은 진흙으로 더러워졌지만, 구원과 자유를 얻은 최고의 순간에 미리암의 인도를 따라 모든 여성들은 춤추기로 작정했다. 이때 미리암이 회중을 향해 노래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양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1)


백성이 바다를 건넌 후 모세가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찬양하는 노래를 공동체와 함께 불렀을 때, 모세가 불렀던 첫 마디는 미리암의 노래와 같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1) “내가 찬송하리니”로 시작된 모세의 찬양은 미리암의 인도에 따라 공동체가 함께 불러야할 구원의 벅찬 감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름에 ‘바다’(“얌”)를 품었던 “미르얌”, 그녀는 히브리 노예의 어린 생명들에게 죽음의 강이었던 나일 강에서 동생 모세를 구하려고 민첩한 지혜를 발휘했던 소녀였다. 이제 그녀는 예언자가 되어 위협적인 바다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자손들과 기뻐하며 회중을 인도하고 있다. 그녀는 확실히 모질던 옛 세월과 현재의 구원을 연결시키는 물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단한 광야 여정 때문에 이스라엘 후손들이 선물로 받은 자유와 구원의 감격은 시들해졌는가. 지금까지 조화로운 지도력을 보여준 모세, 아론, 미리암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이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구스(에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취한 모세의 결혼을 비방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민수기 12:1).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족장의 딸 십보라였기에 모호하다. 마치 모세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세의 두 번 결혼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해석자들은 십보라가 구스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여겨 구스 여자와 십보라를 동일인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뒤늦게 모세의 결혼을 문제 삼았을까. 문제는 모세의 결혼이 아니었다. 아론과 미리암의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롭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12:2)라고 말한다. 지도력 문제를 둘러 싼 가족 간의 갈등인 셈이다. 이 말을 여호와가 들으셨다. 이 때문에 여호와는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부르셔서 모세를 “나의 종 모세”라고 칭하시며 모세의 독보적인 지도력을 확인시키셨다(12:4-8).


아론과 미리암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피부병을 앓게 하셨다(12:9-10). 미리암은 모세의 중보로 회복되지만, 이스라엘의 캠프 밖에서 일주일 동안 격리되어야 했다. 이때 백성들은 그녀가 다시 캠프로 돌아올 때까지 행진하지 않고 기다렸다(12:15). 이후로 이스라엘이 신 광야의 가데스에 머물렀을 때 미리암이 죽고, 거기에 매장된다(민수기 20:1). 그때 거기서 마실 물이 없어 온 회중이 불평했고,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샘물이 솟아나 짐승들까지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로 아론과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통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 이른바 므리바 사건이다(20:5-13).


이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입성하기 직전 모세의 지위는 여호수아에게(신명기31:7), 아론은 엘르아살에게 계승된다(민수기 20:26). 구원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예언자였던 미리암을 누가 계승했는가? 드보라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없다. 미리암의 선지자적인 활동의 직접적인 기록이 없어 신앙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거나 기억되지 않지만, 그녀는 모세와 아론과 나란히 백성들을 인도하며 지도력을 발휘한 예언자였다. 다행히 이것을 기억한 미가 예언자의 기록이 남았기에 우리는 다시 결혼하지 않은 자매, 최초의 여성 예언자 미리암을 되짚어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미리암의 뒤를 이어 예언자적인 소명을 간직하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벗들과 구원의 감격을 구성지게 노래하고 싶다. 그때 혼돈의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구원을. 그 후 1,500년의 세월 지나 죽음과 어둠의 장막을 뚫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리고 또 다시 4월,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며 혼돈과 어둠의 시간을 견디는 모든 이들과 함께.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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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예레미야인가?


어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기에 가담하거나 또는 앞장서고 있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교회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서야 할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손을 잡고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명백히 죄악이다.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야할 이들이 권력과 재물의 옹호자가 되고 있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난폭한 자들의 편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우상숭배자들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리기 위한 장식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깊게 새기고 있는 김기석 목사가 욥(《아! 욥》)에 이어 예레미야에 대한 책을 냈다. 역시 기대 이상이다. 문학도이기도 한 그가 써내려가는 글들은 여기서 그 어떤 수식도 거부하고 있다. 명쾌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핵심으로 육박해 들어간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움직이게 한다. 예레미야의 심장 한 복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위대한 선지자의 육성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는 예레미야는 예를 들어 이러하다.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는 자’이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 혹은 ‘로에’는 ‘선견자’라는 뜻을 내포한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그들은 역사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꿰뚫어본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아니 차라리 보려 하지 않는 질서를 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스럽다.” 김기석 목사 또한 이 책을 고통스럽게 썼을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욕망으로 현실을 보려들고 있고, 선지자는 그로 인해 숨겨지고 있는 진실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려한다. 그건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과의 맹렬한 격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예레미야가 일깨운 전투지침에 대한 길잡이인 셈이다.


악을 이기려면 잘 싸워야한다. 말씀으로 바르게 훈련된 이들이 아니고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다. 자칫 유혹에 넘어가거나 혼란에 빠지거나 아니면 굴복하고 만다. 세상은 지금 어떠한가? 대다수가 주류에 속하고자 기를 쓴다. 그걸 위해 악과 손을 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악마는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어둠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대의 주변부적 존재였던 예레미야는 주류질서와 맞선다. 하나님을 버리고 생명의 근원을 외면한 채,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를 제 손으로 판 자들의 기만과 허위를 폭로한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을 예고한다.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내다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예레미야를 읽어야한다. 달콤한 말로 우리의 뇌와 가슴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들의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펄펄 끓는 물처럼 우리의 온 몸이 들끓어 오르게 하는 말씀과 만나야 한다. 악마와도 주저 없이 한 통속이 되면서까지 주류에 속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우쳐야 한다. 거짓을 격파하고 진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을 열어야 한다. 예언서로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예레미야를 우리에게 전하는 김기석 목사가 고맙다. 그의 책이 이 시대를 강타하기를 바란다. 가증스러운 자들이 모두 몰락하고, 비천하다고 업신여김을 받은 이들이 우뚝 서는 그런 세상을 기원한다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 빛의 근원을 보는 이는 복되다.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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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31)


가면과 맨 얼굴


●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


“난 점점 기독교가 싫어져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그래서 행복하세요?”


“뭐야? 내가 왜 행복해?”


“기독교인들의 뜻대로 되었으니 말이에요.”


“얘가 노골적으로 비꼬네. 트럼프를 당선시킨 그 세력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려니와, 기독교인들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과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승리주의와 편협한 도덕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참 유감스러워요.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타겟으로 삼아 동성간의 결혼과 낙태에 반대한다는 도덕주의적 캠페인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렇다더라. 문제는 그들의 도덕주의가 다른 인종, 다른 이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할 여백이 없다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보면 그들은 매우 선량한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진실에 충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를 꿰뚫어보는 비전이 없어. 그건 좀 잔인한 말일수도 있지만 죄야. 무지함이야말로 악이 기생하는 텃밭이기 때문이야. 바로 보지 못하면 언제나 악하고 영리한 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마련이야.”


“가장 눈을 크고 뜨고 있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안목이 협소해지고, 생각이 천박해졌지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일 거야.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뭔가를 지키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거든. 부자들이 보수적인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


“언젠가 교회가 단순한 평안을 받아들이자마자 이내 권력에 의해 부패된다고 하셨지요?”


“그건 내 말이 아니라 쟈크 엘룰의 말이야. 콘스탄틴 이후의 교회의 범죄는 정치권력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정당화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힘 있는 사람들 편을 들면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편드는 하나님을 배반하기 시작한 거지.”


“하나님이 편을 든다는 말씀이 좀 낯설게 들리는데요.”


“낯설 것 없어.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이 더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한 공동체 속에서 소외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야. 고아, 과부, 나그네…. 예수님은 심지어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 이야기를 하시잖아. 그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야.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기독교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보수적인 어느 신문의 논객이 일어나 ‘애국 기독교계’가 다 들고일어나 이 좌파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겠니. 나는 아주 모멸감을 느꼈어. ‘아, 우리가 여기까지 전락했나’ 하는 생각에 아득해지더라.”





●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에 한 말도 생각나네요. ‘미국 대통령이 하겠다고 일단 말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낫다.’ 저는 당시의 그 기사를 보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떠올랐어요. 바다에서 나오는데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 개나 된다는 짐승 말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 구절이지요?”


“13장일 거야. 한번 찾아서 읽어보렴.


“아, 여기 있네요.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치 아닌가요?”


“그래도 조심해라. 어떤 사람을 곧바로 묵시록에 나오는 이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단다.”


“미국이 반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오폭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무고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도 다 살고 싶은 생명인데 말이에요. 그 속에서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그들은 마음에 새겨진 지옥의 풍경을 평생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야 하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도 잔인한 일일 거예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게 아도르노이지요? 정말 세상에 희망은 있나요? 우리는 남산에서 만난 단풍의 고움을 마음껏 노래해도 되는 건가요? 테러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이 꼭 폭력이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묻는구나. 그게 질문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이야. 최근에 저 아픔의 땅 시리아에서 사린 가스로 보이는 화학무기가 살포돼 아이들 20명을 포함해 7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어. 특히 볼이 불그레한 예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어.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야.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했다더라.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대. ‘가서 노래를 계속하려므나.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맞아. 그런 거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아름다움의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


“……”


● 맨 얼굴을 보는 용기


“세상이 가장 어두운 것은 꿈이 사라지는 때일 거야. 정현종 선생의 <요격시 2>가 떠오르는구나. 내가 몇 차례 읽어준 적이 있는 데 기억날 거야.”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떨어지면서 새가 되어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크게 뉘우쳐 자폭했습니다.

재규어 미사일은 떨어지는 순간 꽃이 되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지이랄 미사일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도라이 미사일은 사막에 떨어지면서 선인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악마 미사일은 어떤 집 창앞에 떨어지면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디스페어 미사일은 어떤 집 부엌으로 굴러들어가 숟가락이 되었습니다.

플레이보이 미사일은 어떤 아가씨 방으로 숨어들어가 에로스가 되었습니다.

머어니 미사일은 어느 가난한 집 안방에 들어가 금이 되었습니다.

우라누스 미사일은 땅에 꽂히는 순간 호미가 되었습니다.

제구덩이 미사일은 저를 만든 공장으로 날아가 그 공장을 날려버렸습니다.

머커리 미사일은 아주 작아져 어떤 아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속삭였습니다: 이걸로 엿이나 바꿔 먹어.

……

우리는 저 시체들의 폐허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UN의 힘을 훨씬 더 강화하면서)

UN은 무기 개발을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중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


“정말 발사된 미사일을 새와 나비와 비둘기와 물고기로 변하게 하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겠네요.”


“허황한 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꿈을 끝끝내 버리지 않아야 그런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결국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이겠구. 문제는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거야.”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오작동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지 않나요? 미움과 불신과 멸시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 말이에요.”


“그 시스템이 붕괴된 까닭은 뭘까?”


“욕심 때문이겠지요.”


“욕심?”


“예, 더 가질 욕심, 더 지배하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렇겠구나. 한 번만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텐데. 굶주린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 공포에 질린 여인들의 퀭한 눈망울, 몸이 찢기고 잘린 사람들의 이지러진 눈망울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그리고 그 눈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의 인내력만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 난장판이 되지는 않을 텐데….”


“사실 우리는 그런 얼굴과 마주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분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저도 그 눈길을 피할 것만 같아요.”


“왜?


“그 눈은 뭔가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에 색칠을 하나봐. 그들을 비인간화시킴으로 자기들의 지배 욕망을 정당화하는 거지. 피에로는 슬픈 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웃거든. 누군가의 맨 얼굴을 대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화장기 없는 얼굴을 말하는 거 아니지요? 그래요,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도 무거운데 남의 고통과 슬픔과 대면한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인 것 같아요.”


“예수님은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기 눈에서 먼저 티끌을 빼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언제부터인가 우리 이웃들의 남모를 고통에 눈길을 주고 그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어.”


“그게 잘 안 돼요.”



● 가면 쓰기, 가면 씌우기


“자기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없애려는 이들은 그들에게 어떤 가면을 씌우는 것 같아.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원수이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다’, ‘그들은 사탄이다.’ 이렇게 가면을 씌움으로써 그들은 맨 얼굴을 대하는 고통 없이 그들을 파괴하는 거지. 그런데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을 철저히 타자화시키고 물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세상의 평화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야. 강자의 이익일 뿐이지.”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가면을 쓰는 것 아닌가요? '나는 의롭다'는 가면 말이에요?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도록 해주는 보호막으로서의 가면 말이에요.”


“맞아. 그런데 가면 쓰기를 전략으로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략에 부화뇌동하면서 가면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 가운데 <예언자>라는 중편이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가면놀이를 여왕봉이라는 술집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해서 보여주고 있어. 이야기는 여왕봉이라는 살롱에 새로운 마담이 오면서부터 시작되는 데, 마담은 이상한 술집 규칙을 강요하지. 밤 10시가 되면 손님들과 여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거야.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단골손님들도 어느덧 그 규칙에 익숙해지지. 가면을 쓴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스스럼없이 해. 그건 손님들이나 여급들이나 마찬가지야. 가면은 인격이 없으니까. 손님들은 일단 가면을 벗으면 가면을 쓰고 했던 행동과 무관한 사람처럼 행동했지. 작가는 이렇게 말해. ‘가면이란 이를테면 우리들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발산을 규범화시켜 주는 풍속적 방편이지요. 그 서양의 가면 무도회라든가 우리 나라의 탈춤처럼…. 가면은 어떤 추악스런 본능적 욕구의 발산도 그것을 덮어씀으로 하여 하나의 당당한 풍속으로 용납받을 수 있습니다. 음흉스런 지혜지요.’ 기가 막힌 통찰 아니니? 가면은 결국 현실을 ‘허위’의 놀이로 바꾸는 기제인 셈이야. 손님들은 그 가면놀이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홍 마담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는 걸 짐작조차 못하고. 철저한 타자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마담은 손님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한 도붓장수 개 후리듯 그들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거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가면이 씌워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정치인들이 대표적이지.”


“그들은 가면을 씌우는 사람들 아닌가요?”


“씌우는 사람인 동시에 씌워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거야. 그들은 자기들이 쓴 가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면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필요에 따라 그 가면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그 가면을 자기 얼굴인 줄 알고 사는 거야. 철저한 자기 소외가 일어나는 거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하고 모멸감을 안겨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자기들의 위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말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진실을 드러내기는커녕 진실을 은폐 혹은 호도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많아.”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 다지면서 가야 할 길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 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폭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아주 많겠네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성스러움과 폭력은 이웃사촌이야. 예수님은 그런 인과 관계를 끊는 길을 보여주신 거고.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죽음은 철저히 무고한 자의 죽음이고, 가공할 폭력의 사슬을 사랑과 관용으로 녹여버림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일전에 내가 이야기했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을 보면서 내 내면에 들려왔던 소리 말이야.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누가복음 19:42). 용서와 사랑과 포용, 그리고 나눔이 아니고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 없어.”


“옳은 말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건 너무 더딘 길 아닌가요?”


“더디더라도 다지면서 가야 쉽게 깨지지 않지.”


“여하튼 미사일을 새와 나비, 비둘기와 물고기로 바꾸는 시스템이 빨리 가동되면 좋겠어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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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마음을 깊은 곳으로 이끄는 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여기서 ‘침묵’에 대한 해석은 이중적이다.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 (로마 가톨릭)기독교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다. 정권은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동판이나 목판에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겨 만든 후미에를 밟게 했다. 순교 당하는 이들 앞에서 침묵하는 하나님, 또는 후미에를 밟고 살아난 이들까지 비밀한 방식으로 용납하는 하나님을 엔도가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오늘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다. 2017년 부활절인 4월16일은 마침 세월호 참사 3주년 되는 날이다.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 앞에서 목사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선포할 수 있을까? 매주일 강단에서 하나님은 살아 있다고, 하나님은 정의롭다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진정성 있게 설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솔직한 게 아닐는지. 이럴 때마다 나는 『욥기』 와 『예레미야』에 손이 간다. 마침 작년 연말에 욥기를 주제로 한 《아! 욥》을 펴낸 김기석 목사가 이어서 예레미야를 고유한 시각으로 주석하고 설교한 책을 냈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는 예루살렘을 온몸으로 겪은 예레미야의 심정을 김기석 목사도 세월호 참사에서 그대로 느낀 것인지 모르겠다. 본인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든지. 그래서 제목을 ‘끙끙 앓는 하나님’이라 했을까.




김기석 목사의 책을 비교적 여러 번 접했던 터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 그 내용을 간추리거나 분석하지 않겠다. 좀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의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특히 설교자들이 왜 읽어야하는지만 간략하게 짚겠다. 속되게 표현해서 목사는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김기석 목사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오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기석 목사의 글은 술술 읽힌다. 마치 영적인 에세이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깊은 곳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이런 글을 쓰는 건 쉽지 않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자신에게 충분히 소화된 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전달할 수 있는 언어 구사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목사들이 성경의 세계를 알고 설교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그러다보니 짜깁기 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한다. 김기석 목사의 글은 마치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신들린 듯 노련하게 부르는 바리톤 가수의 노래처럼 잔잔하지만 울림이 강하다. 이런 글을 자주 읽다보면 우리도 글을 쓰고 싶어질 것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저절로 배우게 될 것이다.


독자들은 그의 글에서 번뜩이는 신학적 착상을 발견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메시지 11, 예언자’의 앞 대목에서 그는 예언자의 정체성을 이렇게 진단한다.


“예언자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입니다. 예언의 성공은 예고한 일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돌이켜 재앙을 면하는 것이 예언의 성공입니다. 예언의 말이 그대로 성취되면 실패한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 속에 살기에 그는 불행합니다.”


이 한 구절만 잘 이해해도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기 위해서 들인 노고를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다.


나는 김기석 목사의 영혼을 통과해서 이 땅에 모습을 보인 ‘끙끙거리는 하나님’이 비굴하고 처연하며, 하나님의 위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목회자요 설교자로 살아가는 목사들, 그리고 그런 심정으로 함께 길을 가고 있는 모든 깨어 있는 평신도 기독교인들 역시 이 현실에 저항하고 버텨내고 희망하는 데 힘이 되어 주리라 확신한다.


정용섭/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대구샘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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