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4)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신문을 보아도 뉴스를 들어도 어제의 세상과 오늘의 세상이 별반 다르지 않다. 메르스 여파로 인한 파장으로 온 나라가 흔들려도 정부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정치인들은 서로 깎아내리고 흠집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는 다반사가 되었다. 남북한의 긴장과 대립은 해소될 줄 모르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억지 부리는 강대국들의 횡포도 변함이 없다. 남을 모욕하고 부정함을 통해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평화를 거스르는 일이며, 반생명적인 폭거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 주한미군의 탄저균 실험에 대한 이 나라 정부의 대처는 또한 어떠한가. 이런 일들을 하도 많이 겪다 보니 무슨 소식을 들어도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어떤 허구도 현실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우렁잇속 같은 현실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가? 기막힌 소식을 들어도 우리 가슴은 반응하지 않는다. 차를 멈추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백색 실명 상태에 빠지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주인공처럼, 갑자기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둠이 손짓하는 날이다. 나라는 존재도 낯설고, 바깥세상도 낯설기 이를 데 없다. 나만 빼놓고 온 세상이 공모하여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더라는 부정적 경험이 축적되면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세상의 불의함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이들은 번번이 좌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선으로 들이대는 선에 비해 악은 집요하고 교활하고 미끌미끌하다. 아,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아뜩함과 무력감은 어느 순간 우리를 성찰의 자리로 데려가 지금까지 열중하고 있던 일들, 소중히 여기던 것들에 대해 재평가 할 것을 요구한다. 원점에서 사고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풀꽃 하나 속에 담긴 우주를 보고, 벗들과의 살가운 만남에서 영원의 손길을 느낀다. 바야흐로 세상이 만들어놓은 매트릭스에 틈이 생기는 순간이다. 먼빛의 눈길로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욕망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내적 자유가 유입된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연한 말을 기억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허황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을 망각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이들과 더불어 새 세상이 도래한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과부와 같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희망의 나무는 커지지 않겠는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 편집자 주/이 글은 필자가 예전에 쓴 글로, 지금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여 저자의 허락을 받아 편집하여 게재한다.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톺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에 핀 꽃  (0) 2015.06.25
지금은 고수의 얼굴을 살필 때  (0) 2015.06.19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0) 2015.06.05
착한 노래가 듣고 싶다  (0) 2015.05.22
쉼, 평화의 시작  (0) 2015.05.13
참으로 인간이고자  (0) 2015.02.21
posted by

김기석의 톺아보기(3)

 

착한 노래가 듣고 싶다

 

 

“꽃은 참 예쁘다

풀꽃도 예쁘다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재미솔솔 이야기나라’ 수업이 진행되는 방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낭랑한 노랫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풀꽃에까지 눈길을 주고, 기어이 예쁘다고 칭찬까지 하는 그 마음이 다사롭다. 반복되는 노래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들은 ‘이꽃 저꽃 저꽃 이꽃’ 하는 대목에 이를 때마다 곁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으리라. 참 좋다.

 

 

 

 

착한 노래가 착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 이 시대의 가객 홍순관이 불렀던 노래도 귀에 쟁쟁하게 울려왔다.

 

“왜 국에다 밥 말았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이제부터 나한테 물어보고 국에 말아줘

꼭 그래야 돼.”

 

7살짜리 꼬마의 항변이 참 어여쁘다. 수용자의 의사를 묻지 않고 부과되는 좋음은 폭력일 수 있음을 아이는 깨우치고 있다. 그 엄마가 열려 마음의 사람이라면 다음부터는 아이의 의사를 묻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리라. 노래를 들으며 착한 노래가 착한 세상을 만든다는 말을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 마음도 흙 가슴이 된 듯 넉넉하게 열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교회 가을 운동회 때의 일이다. 운동장 뙤약볕 밑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유치부 개구쟁이 녀석이 지나가고 있었다. 장난삼아 냉큼 들어올렸더니 아이는 싫지 않은 내색이면서도 귀염성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너무 힘쓰지 마세요.”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맹랑한 말에 놀라 “왜?” 하고 물었더니 녀석이 대답했다. “힘을 많이 쓰면 빨리 늙잖아요.” 애정이 담긴 아이의 말은 큰 위안이었다. 꼭 안아주고 땅에 내려놓으니 아이는 환한 미소를 풀어놓고 쪼르르 친구들 속으로 달려갔다.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의 속뜻을 조금쯤 엿본 느낌이었다.

 

어느 날 밤 프란체스코가 아시시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온 세상이 공중에 떠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문밖으로 나와서 그 위대한 기적을 즐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교회로 달려가 종탑으로 올라가서는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사람들은 불이라도 난 줄 알고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교회당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프란체스코를 보고 물었다. “도대체 왜 종을 치는 거요? 무슨 일이라도 났소?” 종탑 꼭대기에서 프란체스코가 대답했다. “여러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하늘에 떠 있는 저 달 좀 보시라고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풀꽃에 눈길을 주고, 보름달을 마치 기적인양 바라보는 이들이 살기에 세상은 너무 살벌하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풀꽃들은 짓밟히고, 권력추구에 발밭은 이들의 충혈된 눈에는 보름달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확장의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남들과 소통하는 일에 미숙하다. 소통하지 않는 것은 다른 이들을 인정하기 싫거나, 자기 확신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계몽된 영혼이란 자기가 그릇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이다. 어리석다(absurd)는 단어에는 ‘귀머거리’라는 뜻의 사르두스(sardus)라는 말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도자들은 잘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할 말만 있고 들을 말이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야단치고 윽박질러 주눅들게 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생지옥이다.

 

희망조차 없이 휘뚝거리며 살기엔 세상이 너무 척박하다. 그들에게 착한 노래를 불러줄 사람은 누구인가?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욱 그리운 시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톺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에 핀 꽃  (0) 2015.06.25
지금은 고수의 얼굴을 살필 때  (0) 2015.06.19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0) 2015.06.05
착한 노래가 듣고 싶다  (0) 2015.05.22
쉼, 평화의 시작  (0) 2015.05.13
참으로 인간이고자  (0) 2015.02.21
posted by

김기석의 톺아보기(2)

 

쉼, 평화의 시작

 

 

활동보다는 존재가 먼저

 

“편안해 보이시네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니까 잘 적응이 안 되는데요. 늘 뭔가에 쫓기듯 살아왔는데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손에서 할 일을 내려놓으니까 불안하지요?”

 

“불안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낯설어요. 마룻바닥에 엎드려 책도 보고, 멍하니 천장도 올려다보고, 졸리면 낮잠도 자고….”

 

“수양회를 준비하는 분들이 ‘주제를 뭘로 할까요?’하고 묻길래, ‘쉼, 평화의 시작’이라고 말하니까 좀 당황스러워하더군요. 수양회를 잘 하려면 뭔가 이벤트를 만들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하는데, 담임목사라는 이가 이번 수양회는 교인들을 좀 심심하게 내버려두라고 하니까 고개를 갸웃거려요. 하지만 사람은 심심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창조적이 돼요. 정히 할 일이 없으면 풀잎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든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든지, 뒹굴거리는 친구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이야기를 걸든지, 부엌에 가서 고구마줄기라도 다듬든지 하겠지요. 그러다가 모처럼 성서를 읽어볼 생각이라도 하면 고마운 거고.”

 

“저는 이번에 정말 쉬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요?”

 

“그동안 우리는 자기가 행하는 일(deeds)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고 살아온 것 같아요. 분주함 속에 있어야만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한다고 할까요? 너무 바쁘면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하지만, 분주함보다 더욱 견디지 못하는 것은 한가함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몇 해 전에 아주 분주한 자리에서 일하다가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는데요, 그는 겉으로는 잘됐다고 말하면서도 영 불안해 보였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상한 상실감이 그를 놓아주질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없이도 한 조직이 별 탈없이 굴러간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루에도 몇 가지씩 일을 만들면서 시간을 견뎌나갔는데, 결국 그에게 찾아온 것은 더 큰 허탈감이었대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수첩 속표지에 ‘Do less, Be more’라는 구절을 써놓았어요. 자꾸 일을 만들지 말고, 존재에 집중하자는 거지요. 숯 검댕이 묻은 손으로 남의 옷을 털어줄 수는 없잖아요. 내가 평화롭지 못하고, 내 속에 기쁨이 없다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름다울 리가 없지요. 활동보다는 존재가 먼저인 것 같아요.”

 

 

 

                              사진 김승범

 

 

한가한 사람이 곧 등한한 사람은 아니다

 

“제가 보기엔 목사님은 너무 바삐 사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그렇게 보여요? 참 문제네. 목사가 여유로워야 교인들을 닦달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나? 한가로움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래요. 허균이 《한정록》에 옮겨놓은 글 가운데 ‘조물주가 사람에게 공명과 부귀를 아끼지는 않으나 한가한 것만은 아낀다’는 구절이 나와요. 그 글은 과도한 욕심이 우리 삶을 분망하게 하고, 그 분망한 삶이 정신의 피폐를 낳게 되는 과정을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다행히도 집에서 먹고 지낼 수만 있다면 정말 한가한 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돈지갑만은 꼭 간수하려고 손을 벌벌 떨고, 금전출납부만을 챙기면서 마음을 불안하게 먹고 있으니 어찌 낮에만 부산하여 바쁘겠는가. 밤 꿈에도 뒤숭숭할 것이다.’ 꼭 우리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뒤에 그는 이런 시구를 덧붙였어요.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不是閑人閑不得

閑人不是等閑人

 

“한가함은 한가한 사람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치지 않아요?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 주는 계발적 깨달음도 있고요.”

 

“공감이 가네요. 똑같은 상황에 직면해도 사람마다 반응하는 방법은 제각각인 것 같아요. 어떤 이는 죽도록 괴로워하지만, 어떤 이는 현실을 가볍게 박차고 솟아오르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한가하게 지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온 것 같아요. 굴곡 많은 역사의 변전 과정에서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역사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거든요. 그게 제 의식을 옥죄었고 분주한 삶을 택하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한가한 사람이 곧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은 제게 상당히 도전이 되네요.”

 

“몇 해 전인가요. 진보적인 젊은 언론인 한 사람이 신문 컬럼을 통해 이현주 목사를 ‘얼치기 도사’라고 칭한 적이 있었어요. 현실은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는 언어 놀음이나 하면서 젊은이들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난 그 칼럼니스트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어요. 현실 참여라는 것이 꼭 선동적인 언어와 구호로 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오히려 현실이 난마처럼 얽혀든 시대일수록 경전을 깊이 파고드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실이 중심을 바로 잡아야 씨실로 천을 짤 수 있잖아요? 물론 그 언론인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그를 화나게 한 것은 이현주 목사의 치열한 구도정신과 사유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어설픈 흉내내기였을 거예요. 유사품(?)에 주의해야지요. 가짜일수록 진짜처럼 보이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그의 언어 폭력은 경솔했어요. 이현주 목사는 결코 등한한 분은 아니에요. 그만큼 철저한 분을 저는 별로 보지 못했어요.”

 

“모두가 다 그분처럼 살 수는 없지 않겠어요?”

 

“물론이지요. 공평함이 없는 세상을 향해서 악을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돌멩이를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목사님이 돌멩이 드는 것을 긍정해도 되나요?”

 

“그러다가 쫓겨나겠지요?”

 

和而不同의 지혜

 

“길이 서로 다른 듯싶어도 결국은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목표가 같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모색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가 제일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나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이 아닐까 싶어요.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생각해 보는데, 어쩌면 독재정권 아래서 살아온 삶의 관성 때문이 아닐까요? 지난 시절 우리는 ‘다른 언어’로 말할 수가 없었지요. 독재자를 뜻하는 ‘dictator’는 ‘혼자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대요. 말이 곧 권력인데, 독재자는 말을 독점한 사람이지요. 그는 자기와 다른 언어나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불온시해요. 더 무서운 것은 우리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재자의 사고에 동화되어 다른 사고와 언어를 가진 이들을 불온시한다는 사실이지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 혹은 ‘국론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요. 그건 다양한 모임 속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모임의 주류 언어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 조직의 쓴맛(?)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독재자가 좋아하는 단어는 ‘일사불란’(一絲不亂)이라면서요?”

 

“1970년대를 돌아보면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아요. 장발 단속을 한다고 경찰들이 바리캉(이발기)을 들고 서 있질 않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잰다고 자를 들고 서 있질 않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기존체제에 대한 소시민들의 문화적 항거였는데, 독재자는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거지요.”


“새마을 노래 생각나세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 나라를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로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가꾸세.’ 이 ‘새 나라’에서 초가집은 가난의 상징이고, 게으른 사람은 설 자리가 없지요. 사회 전체 분위기가 가난과 게으름을 악으로 보는 생각을 우리 속에 주입한 것 같아요.”

 

“전체주의적 사고가 삶의 여백을 박탈하고 그 속에 획일적인 생각을 주입한 거지요. 그때부터 분주함은 한 사람의 유능함의 표지처럼 인식되었고, ‘돈’이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고, 이웃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돌변했지요. 물질이 늘어날수록 이웃간의 담은 높아지기 시작했고요. 고샅길을 느긋하게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또 차가 걷기를 대체하면서 진정한 만남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지요.”

 

“가이슬러라는 사람은 느림이 우정을 발견했다면서, 빠름에는 친구가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교통수단일 뿐이라는 거지요.”

 

“노자는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24장] 고 했어요. 까치발로 선다는 것은 결국 남보다 크게 보이려는 것이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걷는다는 것도 남보다 앞서 가려는 것인데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몸짓이지요. 지금 우리가 꼭 그런 형국인 것 같아요.”

 

“쉼을 갈구하면서도 쉴 줄 모르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안식일’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창세기에는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마치시니’(2:2)라는 구절이 나와요. 물론 개역성서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라고 번역함으로써 교묘하게 신학적 혼돈을 피해가고 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제칠일에도 창조행위가 있었다고 풀어요. 즉 제칠일에는 ‘메누하’(안식)가 창조되었다는 거지요. 여기서 메누하는 행복, 고요함, 평화, 휴식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래요.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쉼이라는 거지요. 이때의 쉼은 그러니까 빈둥거린다든지, 기분 전환을 위해 신나게 노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겠지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일상의 노동을 통해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데서 오는 열매일 거예요. 실제로 정신이 배제된 몸과 마음의 휴식이라는 게 일쑤 타락으로 귀결되는 것을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어요. 하나님은 피곤하셨기 때문에 쉬신 것이 아니라 쉼 자체가 창조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뒤집힘에서 비롯된 위기

 

“주5일제 근무가 정착되면 사람들이 제대로 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진정한 쉼을 연습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소비산업이 제공하는 휴가 문화에 종속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이 되거나,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휴가 문화에도 빈부귀천이 나타나면, 몸은 쉬면서도 마음은 쉬지 못하는 거지요.”

 

“결국 우리가 제대로 쉴 줄 알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생태학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결에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들 혹은 사물들 앞에 문득 멈춰서고, 말을 건네고,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감촉을 느껴보고, 경탄하고, 우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지금 경기가 좋지 않다고 다들 아우성인데, 물론 그건 절실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에요. 이렇게 얘기하면 한가한 소리한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에 가르쳐주신 관상기도를 드리면서 저는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늘 활동 속에서 존재의미를 찾다보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은 채 살아온 거지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지향만 간직한 채 침묵 속에 머물면서, 자신을 낯선 존재로 경험했어요. 제 속에 그렇게도 많은 생각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왜 진작 자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추하고, 비굴하고, 욕심스럽고, 이기적이고, 정욕에 찬 제 모습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래도 ‘나는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존재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닌가봐요.”

 

“너무 자책하면 안 되요. ‘이게 바로 나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니까요.”

 

“그런데 20분 동안을 그런 분심(分心) 상태 속에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이 끊어지고, 고요해지는 시간이 있더군요.”

 

“그 시간은 어쩌면 단 한 순간도,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나’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관습적인 방식,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또 반응하는 방식이 잠시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평화를 맛보게 되지요. 어느 분은 그것을 ‘주입된 평정’(infused recollection)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만들거나, 나의 의지가 조작한 것이 아니니까요.”

 

“참 좋다는 생각은 드는데, 집에 돌아가서도 이 기도를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상의 흐름을 끊고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기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고, 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공간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고요.”

 

“쉽진 않겠지요. 기도도 훈련이에요. 내 기분이나 형편에 따라서 하다 보면 영혼이 자랄 수가 없어요. 옛 사람들의 진리 공부는 ‘수신,’ ‘수양,’ ‘수행’을 기본으로 했지요. ‘성의,’ 즉 뜻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을 오로지 해서 노력하는 일은 기본이고요. 제가 속상해 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너무 건성으로 한다는 거예요. 요즘 ‘느림’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꼭 예로 드는 게 포도주인데, 포도주는 오랜 시간을 품고 있다는 것이지요. 수확, 저장, 숙성의 시간 말이에요. 그래서 포도주를 즐기는 것은 시간과 화해하고 살려는 시도이고 시간을 질로 채우려는 시도라고 말하지요. 포도주에 대한 대단한 예찬인 셈인데, 설익은 삶에서 존재의 향기를 기대하기란 어렵지 않겠어요. 신앙생활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지 않아요. 항상 더 바쁜 어떤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삶의 우선순위에서 진리공부는 항상 뒤로 밀리는 거지요. 문제는 그렇게 살다보면 진리공부의 기회는 영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부끄럽네요.”

 

“부끄러우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게 우리 현실이에요. 사람살이에서 ‘선’과 ‘후,’ 혹은 ‘본’과 ‘말’을 구별하는 게 지혜일 텐데, 우리는 그것을 뒤집어서 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우리 생의 위기는 알고 보면 그런 뒤집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라요. 많은 사람이 수도원적 삶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그건 어쩌면 전례를 중심으로 시간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시간 경험을 새롭게 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개회 예배 때 사티쉬 쿠마르를 인용하시면서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하셨지요? 겸손, 봉사, 공부, 잠자는 것이었나?”

 

“맞아요.”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잠을 잘 자야 덜 억압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평범한 듯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라 생각했어요.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회의 시스템, 국제관계도 매우 중요하지만, 평화의 못자리는 평범한 일상이잖아요. 밥 먹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놀고, 공부하고, 잠자고….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늘 어떤 강박관념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쉼이 곧 평화의 시작이라는 말씀은 자칫하면 배부른 자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쉼이 없는 평화란 없지요.”

 

“해야 할 일을 잠시 내려놓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유보하고, 푸른 나무, 푸른 잔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 것 같네요. 족구하러 가지 않을래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톺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에 핀 꽃  (0) 2015.06.25
지금은 고수의 얼굴을 살필 때  (0) 2015.06.19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0) 2015.06.05
착한 노래가 듣고 싶다  (0) 2015.05.22
쉼, 평화의 시작  (0) 2015.05.13
참으로 인간이고자  (0) 2015.02.21
posted by

김기석의 톺아보기(1)

참으로 인간이고자

- 지금 여기 정의로운 생명 평화 -

 

오늘의 세상

 참 고운 얼굴이 없어?/하나도 없단 말이냐?/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저 많은 얼굴들 저리 많은데,/왜 그리 다 미울까, 다 더럽기만 할까!”(함석헌, <얼굴> )

무정한 세월은 변함없건만 인간사는 어지럽기 이를 데 없다. 인간뿐인가. 인간이 지구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후 만물이 다 신음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초래할 다섯 번째 멸절을 내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씩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자각하는 듯하다. 지구촌의 한쪽에서는 폭우에 시달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극심한 가뭄에 타들어간다. 사막은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고, 바다 생태계도 황폐해지고 있다. 식물의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고, 꿀벌들은 집단 폐사되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빙하 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된다. 원시림은 속절없이 훼손되고, 지표수나 지하수가 고갈된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진실'은 개발론자들이 연주하는 모든 게 잘 될 것’(everythings be all right)이라는 노래 속에 파묻혀 경청되지 않는다.

발전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아 분주하다. 분주함이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가 된 이후 우리는 느림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르고아다지오는 외면당하고 빠른 비트의 음악이 선호된다. 한때 느리게 살기담론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재빨리 소비되고는 스러졌다. 공원에서도 사람들은 느릿느릿 걷기보다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빠른 속도로 걷는다. 뭔가에 쫓기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걷기는 사유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운동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성공의 사다리 윗 단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체력은 필수다. 피트니스 센터와 성형외과는 쇼핑센터와 더불어 현대인들의 새로운 신전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노출해야 하는 전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그 신전의 등록 신자가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것으로 환원시켜버린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포장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해졌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진부하다. 오로지 자기를 향해 정위된 삶, 총체성을 잃은 채 삶의 한 부분에만 집착하는 삶은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멀다.

많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체제에 확고하게 편입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를린 예술 대학교의 한병철 교수는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주입된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를 가리켜 피로사회라 했다. 항우울제 복용이 증가하고, 우울증과 자살이 늘어나고, 외부의 요구에 대한 몸의 불특정한 반응인 스트레스가 많아지는 것이 그 징후라 할 것이다.

한 교수는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지면서 진실이나 정직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작동되지 않게 된 현실로 인해 세상은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곳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깊은 사유의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정치의 호흡도 짧아진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이런 사회를 가리켜 투명사회라 했는데, 투명사회는 곧 새로운 통제사회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감시자가 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자기를 노출한다. 나르시시즘이 강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문화사회학자인 엄기호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그런 사회 현실에 접근한다. 그는 우리사회를 단속사회라는 말로 요약한다. ‘단속이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는 뜻도 있지만, 낯선 타자들과 불필요하게 연루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단속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열려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폐쇄된 세계인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동일성에 대한 과잉 접속타자성에 대한 과잉단속으로 양극화 되어 있다. 낯선 것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나 존중은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를 나그네들을 위해 밥 한 그릇을 이불 속에 묻어두던 풍습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삶을 든든히 지탱해주던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고향 상실, 정처 없음, 뿌리 뽑힘, 지금 우리 삶을 요약하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갑각류를 닮아간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딱한 외피를 뒤집어쓴 채 낯선 타자와의 만남이 초래할지도 모를 불쾌함이나 흔들림을 회피한다. 근본주의적인 종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의 불안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모든 것이 착종된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없다면, 정서적 흔들림이 없다면, 삶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런 질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 서거나, 심연 앞에 설 때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게 마련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말한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하나의 문제다. 사람이 되는 것은 곧 문제가 되는 것이요, 그 문제는 사람이 불안하고 정신적 고통을 당할 때 밖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됨이 어떠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에 대하여 희미하게나마 나름대로 본이 될 만한 생각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의 실존과 그에 대한 기대 사이, 지금 있는 대로의 그와 그에게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 사이에 모순 또는 갈등이 있을 때 사람의 문제는 생겨난다”(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996, p.8-9)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문제인 동시에 과제이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은 언제나 자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현존재이지만,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선택해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존재는 인간-되어감이다.’

 

에덴의 동쪽

일찍이 있었던 에덴 동산/그 자리 땅 위에선 찾을 길 없어도/시든 가죽 밑에 덮인 내 가슴 안에는/잃어진 낙원의 터가 분명히 있다”(함석헌, <잃어진 낙원> 부분).

히브리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창세기의 기자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설명한다. ‘신의 형상이라는 말이 갖는 함의는 다양하다. 동물 세계와 구별되는 인간만의 독특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의 대리자로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을 창조한 신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었다. 위임은 권한인 동시에 책임이다. 그런가 하면 신의 형상이라는 말을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위계 사회의 정점에 있는 왕에게만 적용되던 신의 형상혹은 신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비틀어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켰다는 말이다. “너희만 귀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도 존귀하다는 하위주체들의 아우성이 이 용어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성경은 첫 대목부터 전복적인 텍스트라 하겠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형상답게 살지 못했다. 타락 이야기는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삼중적 소외라는 열매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첫째는 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상실한 것이고, 둘째는 동료 인간과의 친밀한 유대를 상실한 것이고, 셋째는 피조 세계와의 일치를 상실한 것이다. 함석헌은 <잃어진 낙원>에서 사르르 기어든 분별(分別)의 일념(一念)’이 빚어낸 비극을 이렇게 노래한다.

 올 때는 봄바람인듯 따뜻하더니/온 후엔 찬 기운 동산에 싸르르 돌아/생명의 잎새, 열매 시들어 떨어지고/차디찬 가을 달이 가지 끝에 걸렸다.//그 광명 어디 가고/그 천진 어디 가고/그 기쁨 찬송 다 어디로 가고/애타는 기억만이 사라지는 음악의 여운(餘韻) 같고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꿈꾸는 순진무구’(dreaming innocence)라는 말로 요약했다. 주객분열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라는 말이다. 그러나 에덴 이후의 상황은 달라졌다. 적대적인 타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실존의 기본 정조가 되었다. 경계심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폭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인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생명을 산출하던 땅은 무고한 존재의 피가 흐른 땅이 되고 말았다. 그 땅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가인은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신의 질문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반문한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人間)에 마땅히 있어야 할 관계를 파괴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동생을 죽인 가인은 오히려 두려움에 포획되고 만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말이다.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성경은 그 땅을 이라 한다. 히브리어로 유리, 방황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가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기본 정조인 ‘'정처 없음’, ‘뿌리 뽑힘’, ‘불안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홀로 주체로 표상되는 서양 주체의 가슴 깊은 곳에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이웃을 경쟁자로 혹은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무거운 일이 또 있을까? 그렇게 보면 가인이 에녹을 낳은 후 도시를 세웠다(창세기 4:17)는 진술도 매우 흥미롭다. 도시를 만들고 성을 쌓는 까닭은 적대적인 타자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세상은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자랑스레 떠벌린 말은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세기 4:23-24).

이러한 라멕의 노래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여백이 잠식된 사람들은 사소한 자극이나 피해에도 맹렬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큰 전쟁의 예방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잠재적 적국의 군사적 확장이나 우위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선제공격을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예방 전쟁론자들 뒤에는 라멕이 있다.

창세기는 온통 형제간의 경쟁(sibling rivalry)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가인은 질투심 끝에 동생 아벨을 죽였고, 아브라함의 배다른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도 서로 갈라져 살아야 했다.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전형적이다. 심약하지만 악지스러운 야곱은 호방한 형의 허술함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빼앗는가 하면, 형에게 주어질 아버지의 축복조차 가로챈다. 형제는 원수가 되었고 그 때문에 20년을 헤어져 살아야 했다. 열두 아들을 둔 야곱은 총애하던 요셉과 다른 형제들 간의 갈등으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형제가 형제를 종으로 팔아버리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갈등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화해를 지향한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만났고, 에서는 20년 동안의 별리 끝에 다리를 절며 귀향하는 야곱을 부둥켜안았다. 천신만고 끝에 애굽의 대신이 된 요셉은 기근에 떠밀려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측은히 여기고 받아들인다. 자기들의 갈등 뒤에 숨겨진 섭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론 이들 형제들의 화해 이야기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틈바구니에서 구명도생해야 했던 약소국의 신산스런 상황에서 나온 원망 사고(wishful thinking)를 반영한 것이리라.

 

반제국주의 담론으로서의 성경 이야기

언제나 당신은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 언젭니까?/왕들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백성입니다!/옥좌나 왕관이 아니라 사람입니다!/그들은 당신 가슴의 꽃, , 하나님/풀처럼 시들게 마소서 그들을/그 믿은 것이라곤 그늘진 날뿐/하나님 민중을 건지소서(함석헌, <당신은 언제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중에서).

문제는 제국이다. 성경은 바벨 탑 이야기를 통해 신이 제국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바벨탑은 바벨론의 신전인 지구라트가 그 모델이지만, 히브리인들은 그 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한 그들의 노력을 신의 의지를 거역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탑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건설 과정 가운데 많은 희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탑은 또한 일사불란을 요구한다.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은 배제되게 마련이다. 탑의 재료인 벽돌은 일정한 틀에 찍어낸 것이고, 역청은 빈틈없이 두 물체를 결합시킨다. 바람조차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바벨탑은 사실은 제국의 은유이다. 히브리인들은 신이 그 탑을 허물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져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은 문화의 다양성을 좋아한다.

피라미드는 애굽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씨족이나 부족을 이루어 살던 이들은 외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더 큰 단위로 결집했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경제력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경제력의 차이는 결국 위계사회를 낳았고, 사람들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갈리게 되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의 이해가 반영된 것이 관료제도이다. 지배자들이 관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보상이 필요했다. 보상을 해주려면 막대한 재화가 필요했고 그 재화는 피지배계급으로부터 거둬들이거나, 전쟁을 통해 충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지배계층의 불만이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배를 초월적으로 정당화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사제계급은 그렇게 발생했다. 사제계급은 지배계급에게 신성의 아우라를 덧입혀주는 역할을 하면서 지배자들의 호감을 사려 했다. 지배자의 통치가 신적 정당성을 갖는다고 인식하는 순간 피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으로 수납하고 만다. 종교와 권력이 불의의 연대를 이룰 때 피지배계층은 피눈물을 흘린다.

성경은 제국에 대한 반()담론으로 읽을 때 제대로 보인다. 출애굽기는 제국의 폭력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히브리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염려한 애굽 왕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이 낳는 아이들 가운데 사내 아이는 죽이라는 엄명을 내린다. 제국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죽음을 기획하는 일에 유능하다. 죄책감도 없다. ‘제국의 안전이라는 이데올로기면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 제국은 위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예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하층민들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할당량이 주어진다. 그들은 제국이라는 기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 목적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새로운 신이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냈다. 그 신은 강제 노역과 학대로 말미암아 끙끙 앓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었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이로 소개했다. 야훼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떨기나무는 목재로도 쓸 수 없고, 광야를 걷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는 나무였다. 신이 떨기나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런 보잘 것 없는 이들이야말로 그의 관심 대상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야훼는 억눌린 채 살던 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는 동시에,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제국을 심판했다. 마침내 제국의 피라미드 맨 아랫단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은 압제의 땅을 벗어나 홍해를 건넜다. 그들이 마른 땅을 걷듯 건넌 그 바다에 애굽이 자랑하던 병거와 기마병과 군인들은 수장되고 말았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어떠한 지상의 권력도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광야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배우는 공간이었다. 함께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어내면서 그들은 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을 배웠다. 시내산 앞에서 야훼는 히브리인들과 언약을 맺었다. 그들은 초월적인 신의 뜻을 이 땅에서 수행하는 이들로 부름 받았다. 그들의 정체성은 공통의 과거에 있다기다는, 함께 실현해야 할 목표 즉 제사장 나라‘'거룩한 백성이라는 미래적 가치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야훼가 그들에게 신신당부한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말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신은 지배자들의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해주는 신들이다.

사람은 생활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신까지도 바꾼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삶의 곤고함이 해소되는 순간, 사람은 어떤 욕망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욕망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경계를 넘기 일쑤이다. 그것이 쾌락의 욕망이거나 지배의 욕망이거나 간에 모든 욕망은 타자를 물화시키거나 타자를 부정하도록 이끈다. 타자를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이거나, 욕망 충족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운명공동체로 거듭난 히브리인들은 제국의 유혹에 저항해야 했다. 왕들이 제국의 길로 접어들려 할 때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 경고의 나팔을 울렸다.

신약의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기록된 책은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는 구절로 시작된다. 대개의 독자들은 이 구절에 내포된 혁명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허두처럼 읽어버린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을 획책하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복음은 조금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사실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적용되던 단어들이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지중해 세계는 오랜 전란에서 벗어났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 시대가 열린 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이룬 로마는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황제를 신화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아폴론 신의 아들이라고 선전했고(신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 ‘평화의 왕으로 불리웠다.

제국의 곳곳에 로마식의 신전이 세워졌고, 로마 문화를 선전하기 위한 극장이 세워졌다. 군대를 파견하고 피식민지에서 거둬들인 공물을 용이하게 수송하기 위해 길을 닦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속에는 피지배 민족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로마의 평화는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시민 계급만 누릴 수 있는 허구의 평화였다. 다른 이들은 압도적인 로마 군단의 폭압 아래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험을 감행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한 사나이에게 황제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던 호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들은 로마의 평화에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했다. 그것은 힘과 무력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삶, 사랑과 섬김과 나눔과 돌봄을 통해 열리는 평화였다. 그들은 예수에게 황제의 호칭을 적용했다. ‘’, ‘구원자', '평화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이다. 예수에게 부여된 이런 호칭들은 예수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질서에 대한 반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백향목처럼 도드라진 이들이 되기보다는 어깨를 겯고 바람을 이겨내는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우정을 나누는 새로운 세상, 경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유대인/이방인, 거룩함/속됨, 정결/부정, 남자/여자로 구획된 세상에서 그들은 과감히 경계를 가로지르며 빗금을 제거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 질서에 의문을 제기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 꿈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말로 요약했다.

물론 하나님 나라로마 제국의 대칭 개념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했다. 그들의 존재는 로마 제국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피라미드 세계의 맨 아랫단에 있던 이들이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제국이라는 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의 처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도들은 죽임을 당했던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다. 그 선포를 중심으로 모인 초대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지금 이전보다 훨씬 더 음험하고 위협적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편입된 이래, 우리는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 세상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도록 우리를 몰아댄다.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다만 소비자일 뿐이다. 소비의 굴레 속에 들어간 이들은 남들과 구별되는 기호로 치장하기 위해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린다. 이웃은 삶을 함께 경축해야 할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 혹은 잠재적 적이 된다. 불안과 경쟁의식이 내면화되면서, 내면은 점점 푸석푸석해진다. 문제는 종교조차 자본주의 질서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위험사회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새로운 세상의 향도

욕망에 바탕을 둔 삶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동안 인류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은 이제 전문가들만의 진단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 되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상 이변 소식은 지구라는 초록별이 중병에 걸렸음을 암시한다. 지구 온난화, 사막화, 열대림 훼손, 많은 생물종의 멸종, 토양 유실, 지하수 오염, 바다 생태계의 변화, 화석 연료 고갈. 우리가 선뜻 대면하기 싫은 이런 '불편한 진실'은 이제 외면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김용 세계은행총재는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이내에 물과 식량을 둘러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꿀벌의 대규모 폐사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리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 추구해온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싫은 것이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즉물적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성찰을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거대한 문제를 풀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 설사 아직 기회가 있다고 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종의 비관론이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인류는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위기를 돌파해왔음을 상기시키면서 과학이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구에 닥쳐오는 거대한 재앙을 극복해내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들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천박한 낙관주의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의 공통점은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물살에 떠밀려 가는 아이를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헨리 데이빗 소로는 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다른 북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주류사회로부터 튕겨져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표준화된 삶의 이정표에 의문부호를 붙인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터 나온다. 세상은 그들을 패배자로 분류하겠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선택을 가능케 한 내적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분절된 시간 속에서 안달하며 사는 삶에 대한 염증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로부터의 소환이라 할 수 있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영혼의 헛헛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불안의 대용물들을 구입하고 또 그것을 누려보기도 하지만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삶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플라톤은 동굴에 갇힌 수인이 그림자를 실체로 알고 살다가 동굴 밖의 진짜 세계와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체와 그림자가 착종되거나 뒤집힌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린다.

세상에 대한 염증 혹은 절망만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혹은 생태적 감수성도 영문 모를 불안의 해독제이다. 칼 야스퍼스는 세상은 온통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이다. 18세기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에서 이런 신비를 아름답게 그린 바 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찬 세상을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만 파악했다. 사물 본래의 가치는 사라지고 그 교환가치만 도드라지면서 희소성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남과 구별되기 위해 사람들은 희소한 것을 얻으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희소한 것을 얻는 순간 또 다른 목표가 제시되기에 이 경주에는 휴식이 없다. 안식 없음, 뿌리 뽑힘, 고향 상실 의식은 그렇게 내면화된다. 그러나 희소성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작고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한 신앙도 우리 삶을 든든히 세워주는 기둥이 된다. 신앙이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는 것은 자아의 한계 밖의 세계이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아 속에 유폐되어 있던 삶에서 벗어나 타자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 타자의 세계를 통해 우주심에 이르는 것이다. 영성에 대한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상처-힐링이라는 도식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다.

사적 안위와 소비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켜 파커 J. 파머는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p.21 역자 서문 가운데서)이라 말했다.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파머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부서져 흩어지는broken apart’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이라 했다. 상처를 오히려 소통을 위한 길로 삼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삶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길은 고통 받는 타자를 통해 열린다. 고통 받는 이들의 삶에 의미 있는 타자가 되기 위해 다가서는 순간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든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둘 다 순종의 챔피언이다. 노아는 신의 뜻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고, 아브라함은 신의 뜻에 따라 본토·친척·아버지 집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까지 신에게 바치려 했다. 하지만 신은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거대한 구원사를 시작했다. 무엇 때문일까? 노아는 죄지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신에게 간청하거나 맞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는 신의 뜻을 알았을 때 그 앞에 막아선 채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냐고 따져 물었다. 불경할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이웃에 대해 책임적 존재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신은 당신의 뜻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귀히 여긴다.

레위기의 성결법전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 대전제는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는 선언이다. 3절 이하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부모 공경, 안식일 준수, 우상 숭배 금지, 제물 규정 등 일반적으로 종교적 덕목이라 일컬을 수 있는 내용들이 언급된 후, 9절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 제시되고 있다.

추수할 때에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도둑질, 사기, 속임수, 거짓 맹세, 이웃에 대한 학대나 착취를 버려야 한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저주하거나 그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도 안 된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웃의 생명을 위험 속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말을 요약한 것이 18절에 나오는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라는 구절이다.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 거룩함은 위선일 뿐이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

크신 님 나를 안으소서!/나는 인제 당신이/나 안으러 오신 줄 압니다./이때껏 뵈온 일 없어도 어쩐지/나 안고서 당신은 오신 줄 나는 믿어집니다.//뜨거운 님 나를 품으로서!/삼키소서, 맘대로 하소서!/당신 가슴에 이 몸 바치오리라./나는 그것 즐겁습니다./한없이, 한없이, 그저 한없이(함석헌, <임이여 나는 작은 등불이외다> 중에서).

돈이 주인 노릇하는 전도된 세상을 유쾌하게 탈주하는 삶은 가능한가?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될수록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파시스트적 속도로 사람을 몰아대는 세상에서 성공을 재정의하고, 삶의 문법을 바꾸려는 이들이 있다. 주류 세계의 눈으로 보면 '패자'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전위이다.

 

 

.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가 있다. 그는 지인들의 권고에 따라 우리 교회로 옮겨왔다. 해외 투자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는 교회를 통해 위로와 평강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상처-위로-힐링이 아니라 책임-고난-용기를 촉구하는 교회의 선포에 적잖이 당황했다. 생명과 평화 세상을 열어가기 위한 교회의 실천은 좌파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 갈등을 숨기기도 하고 간혹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상한 끌림을 느꼈는지 튕겨져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얼마 전 이 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

 

.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사회복지사 K는 여러 해 동안 재직하던 기관을 사임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일을 시작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을 인간 그 자체로 사랑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일감으로 대하고 있음을 자각하자 그는 주저 없이 직장을 나왔다. 몇 달을 쉬면서 새로운 직장을 얻을까 고민을 하던 중, 다른 사회 복지사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제도권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내보일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는 그런 사회복지사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로 작정했다. ‘아픔에 직면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글도 쓰고 강연도 했다. 아주 적은 생활비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내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힘겨울 때마다 전대도, 두 벌 옷도, 지팡이도 없이 예수의 파송을 받았던 제자들을 떠올렸다. 어느 달에는 강연 수입이 기존의 수입보다 많아졌다. 그는 그것을 두렵게 받아들였다. 자기 실천을 적극 지지해주는 아내에게 주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물질이 아니라 임을 알았기에 그는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단위의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

대학시절부터 자기 삶을 봉사를 위한 삶으로 정위했던 Y는 아주 유명한 NGO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자기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에 보상까지 주어지니 참 좋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날 무렵 그는 문득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체가 더 많은 모금을 위해 실적을 부풀리고 홍보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모금을 많이 하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은 거짓 신화였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러한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려했다.

어느새 그들은 고통 받는 자리에 서기보다는 월급이나 승진등의 보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보상이 중심 가치가 되는 순간 성찰적 지성은 작동되지 않는 법이다. 국제 구호 활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늘 주민들의 삶의 자리까지 낮아지려 하지 않았다. 위험이 생기면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외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진정한 구호란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방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연대 활동을 통해 지지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연습했다. 최소생활을 해보는 것이었다. 꼭 필요한 것 이외의 지출은 대개 남과 구별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70만원이면 혼자 지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직장을 사임했다. 그리고 발 딛고 있는 땅이 현장이 아니면 다른 현장은 없다는 확신에 따라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청소년 계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유보한 채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런 입시에서 진즉에 배제된 이들 모두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청소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까페를 열었다. 그곳은 경계구획이 없는 공간이다. ‘하라하지 말라는 명령과 금지에 익숙한 이들과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그들이 자기 존재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는 동안 존재에 대한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스탠다드의 삶을 벗어날 용기를 심어주려고 애쓴다.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까페를 찾는 청소년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활동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 많이 받는 안정된 직장을 떠나 그는 우리 사회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 검은 그늘을 흰 그늘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

D는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세상을 종교/비종교, 진리/거짓, 옮음/그름으로 가르는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삶을 모색하다가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복지 기관에서 10여년 열정적으로 일했다. 지역의 노인들을 돌보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은 행복했다. 그러나 실적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듯한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무작정 직장을 벗어났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 즉 남과 어울리며 공동체를 이루는 일과 소박하나마 문화적 활동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했다. 어느 지자체에서 그에게 마을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는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함께 일할 수 있는 동료들도 청했다. 그러나 예산도 프로그램도 전혀 없었다. 그 자기를 믿고 모여든 이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새벽에는 우유배달을 하고 저녁에는 트럭 운전을 하면서 버텨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 그 일을 그만 두고 싶을 때, 잘 아는 사회복지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적잖은 돈을 모아왔다. 눈물겨웠다. 그는 그 순간 자기가 하는 일이 소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는 소비적 삶에 중독된 사람들이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해독제는 자기 속에 있는 창조적인 재능과 만나고, 그것을 표현해봄으로써 성취감을 얻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함께 연주를 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는 길을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던 마을 주민들은 이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마음을 쓴다. 자본주의 세상이 몰아낸 마을 공동체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핍이 주는 기쁨을 안다. 어느 정도만 채워져도 만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히 붙잡고 있는 성경말씀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로새서 3:23).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아픔의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잘 산다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성취와 발달이라는 이름의 이정표’(엄기호, 단속사회)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다.

 

인류의 대표로 살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

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 기회가 왔으니 그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

 

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그런 돌봄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됨으로써, 남들을 보살핌으로써, 성숙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허무와 패배가 예견된다 해도 부조리에 항거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13-4).

이제는 새로운 인류가 등장해야 할 때이다. 발전강박에서 벗어난 사람,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길을 찾은 사람, ‘홀로 주체로 서기보다는 서로 주체로 살아가려는 사람, 타자의 눈물을 렌즈 삼아 하늘을 볼 수 있는 참 사람 말이다. 우리는 이런 소명 앞에 서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톺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에 핀 꽃  (0) 2015.06.25
지금은 고수의 얼굴을 살필 때  (0) 2015.06.19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0) 2015.06.05
착한 노래가 듣고 싶다  (0) 2015.05.22
쉼, 평화의 시작  (0) 2015.05.13
참으로 인간이고자  (0) 2015.02.21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