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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신에게 낙심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시편 7편 8, 9절 야훼여, 바른 판결을 내려주소서. 사람의 마음속, 뱃속을 헤쳐보시는 공정하신 하느님(《공동번역》) 但願睿哲主 鑑察我忠義(단원예절추 감찰아충의) 按照爾公平 報答我純粹(안조이공평 보답아순수) 꿰뚫어보시는 주님 제 진실함을 보소서 당신 공평 비추시어 제 결백함 알아주소서(《시편사색》, 오경웅) 시인의 기도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바른 판결을 원할 만큼 제 속마음이 깨끗하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어리석고 제 깜냥을 헤아리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꿰뚫어보시는 분 앞에서 감히 진실함을 주장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합니다. 늘 그렇듯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럼에도 당신 앞에서 머무는 은총을 허락.. 2021. 6. 14.
언제 가르치셨을까, 여기 저기 바쁘실 하나님이 언제 만드셨을까. 아가의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별빛 모아 담으셨나, 무엇으로 두 눈 저리 반짝이게 하셨을까. 까만 눈동자 주위엔 푸른 은하수. 언제 저리도 정갈히 심으셨나, 눈 다치지 않게 속눈썹을. 어디를 어떻게 다르게 하여 엄마 아빨 닮게 하셨을까. 어디를 조금씩 다르게 하여 다른 아이와 다르게 하셨을까. 물집 잡힌 듯 살굿빛 뽀얀 입술. 하품할 때 입안으로 보이는 여린 실핏줄. 손가락 열, 발가락 열. 그리곤 손톱도, 우렁이 뚜껑 닮은 발톱도 열. 열 번도 더 헤아려 크기와 수 틀리지 않게 하시고. 언제 가르치셨을까. 엄마 젖 먹는 것과 배고플 때 우는 것. 쉬하고 응가 하는 것. 하품과 웃음. 밤에 오래 잠자는 것. 혼자 있기보단 같이 있기 좋아하는 것. 찬찬히 엄마 얼굴 익히는 것. 햇빛에 나.. 2021. 6. 14.
자족적 관조의 삶 존경하는 페친 최창남 목사님이 내신 책 (꽃자리)를 단숨에 읽었다. 술술 잘 읽힌다. 아포리즘처럼 읽히고 수필처럼 읽히고, 또 거친 역사의 시간을 헤쳐온 한 인간의 자성적 고백처럼도 읽힌다. 최 목사님은 군부독재, 졸속근대화 시기의 거친 세월을 노동운동, 빈민운동, 문화운동과 같은 운동권에서 살아오시면서 많은 고난과 상처를 온 몸으로 겪어내셨다. 그러다가 연세 70이 가까운 시점에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집을 만들어 그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은자처럼 사신다. 많은 시간 주변의 자연물을 관조하고 지난 삶을 성찰하면서, 또 떠돌이 고양이들 친구 삼아 밥 주면서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 자족적으로 안돈하며 사신다. 이 책의 글들은 어찌 보면 고대 스토아 사상가들이 추구한 '초연한 무관심'(adiaphora)의 자세.. 2021. 6. 12.
조용한 마을 단강, 참 조용한 마을입니다. 아침 일찍 어른들이 일터로 나가면 쟁기 메고 소 몰고 일터로 나가면 서너 명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어슬렁어슬렁 짖지 않는 개들이 빈 집을 지키는 조용한 마을입니다. 지나는 경운기 소리가 가끔씩 들리고 방아 찔 때 들리는 방앗간 기계소리 들리는 건 그런 소리뿐입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시끄러운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어 군용 지프차가 지나기도 하고 덩치 큰 트럭과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가기도 합니다. 아이들이야 구경거리 생겨 신기하고 좋지만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닙니다. 휙휙 달리며 피워대는 먼지야 그렇다 해도 농사지을 밭에 들어가 푹푹한 흙을 딱딱하게 만드는 건 딱 질색입니다. 또 한 가지 나쁜 건 잠든 우리 아기 깨우는 겁니다. 꼬리에 꼬리 물.. 2021. 6. 12.
첫 돌 돌아보니 까마득하다. 같은 한해가 같은 길이로 갔지만 지난 1년은 유독 길기도 하고 순간순간 선연하기도 하다. 3월 25일은 단강교회가 세워진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무모하게도 창립예배 드리던 날 어딘지도 모르는 것에 첫 발을 디딘 이곳 단강. 감리사님 차를 타고 단강으로 향하여 어딘가 땅 끝으로 가고 있지 싶었던 생각. 굽이굽이 먼 길을 돌때마다 거기 나타난 작은 마을들, 여길까 싶으면 또다시 들판 하나를 돌고. 그러기를 몇 차례, 막상 도착한 마을은 떠나며 가졌던 나름대로의 생각이 그래도 쉬운 것이었음을 한눈에 말해주고 있었다. 어딘들 어떠랴 했던 마음속 막연한 낭만기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생존의 현장이구나’ 아마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춘설이 섞인 찬바람이 어지러이 몰아쳤던 그날, 예배실로.. 2021. 6. 11.
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시편 7편 3절 야훼, 나의 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공동번역》) 容我一申辯(용아일신변) 주님 저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락하소서〔주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시편사색》, 오경웅)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겪는 이유만 알아도 그 고통이 반감되는 걸 경험합니다. 왜 지금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면 비록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조금은 견딜 힘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피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쉬 꺽이지 않을 결심을 다지기도 하지요. 만약 어려움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것이라면 책임지는 자세를 통해 도리어 자신의 그릇을 더 넓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의 언명이 오래도록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주었겠지요.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2021. 6. 11.
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 16: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6월에 접어들면서 낮 기온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퇴근 무렵에도 낮 동안 달구어진 지열 때문인지 무척 덥습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걷는 데도 땀이 흠뻑 뱁니다. 농부들은 보리 수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내기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땅을 가까이 하고 사시는 분들의 노동이 때로는 거룩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농부들이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사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심.. 2021. 6. 11.
박카스를 좋아하는 그 남자의 이야기 매주 박카스를 사러 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버지이고 남편이며 형이다. 그는 한적한 강가에서 낚시 줄이 고요하게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린 손녀가 한없이 사랑스럽고 신기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30년 하루하루를 신발이 닳도록 성실히 일했고, 아픈 동생과 삶을 함께 해 왔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첫 인상은 50대 후반의 앞머리가 벗겨진 평안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는 제조업공장은 그럭저럭 잘 유지되었고, 아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며, 30년 넘게 함께 산 아내는 여전히 곱고 다정했다. 10년 전 위암 수술을 했던 동생은 좀 마르긴 했지만 건강해 보였고 무사히 자녀들을 결혼시켰으며 잘 웃었다. 남자는 인생에서 자신이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 2021. 6. 10.
꼬리잡기 며칠 동안은 저녁마다 꼬리잡기를 했습니다.교회 앞마당, 나는 도망가고 아이들은 나를 잡는 겁니다. 승호 종순이 승혜 종숙이 아직 어린 그들의 손을 피하기는 쉽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간 종설이는 만만치가 않습니다.뜀도 잘 뛰지만 웬만한 속임 동작에도 속아주질 않습니다. 키 큰 전도사가 어린 꼬마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겅중겅중 뛰는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운 일일 겁니다. 잡힐 듯 도망가는 전도사를 아이들은 숨이 차도록 쫒아 다닙니다. 모두의 얼굴엔 이내 땀이 뱁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예배당 계단에 앉아 지는 해를 봅니다. 다시 또 하자 조르는 아이들을 달래 집으로 보냅니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제일 먼저 이를 닦고, 이를 닦을 땐 위 아래로, 그렇지 그렇게 말야. 그 다음엔 손을.. 2021.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