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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을 안다는 것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이곳 단강. 걸어서도 하루에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삼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곳. 앞쪽으론 남한강이 흐르고 뒤쪽엔 이름 모를 산들이 그만그만한 크기로 동네를 품고 있다. 단군이 목욕해서 단강이 되었다고 떠나올 땐 그렇게 들었는데 와서 보니 그게 아니다. 단종이 피난 가다 잠시 쉬어갔다 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아쉽다, 먼저 번 것이 훨씬 그럴듯한데. 단강리는 끽경자와 섬뜰과 작실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이 재미있다. 끽경자는 경자라는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어 붙여진 이름이고, 섬뜰은 마을의 4면이 강과 저수지 그리고 두개의 개울로 감싸져 있어 섬뜰이 됐고, 작실은 作室이라 쓰는데 ‘집을 짓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내 숙소는 섬뜰에 있는데 여차.. 2021. 7. 28.
귀소본능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방앗간의 방아소리가 며칠째 끊이지 않는다. 방앗간은 설날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고무 함지박을 줄 맞춰 내려놓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대하는 밝은 표정들. 쌀을 빻기도 하고, 가래떡을 뽑기도 한다. 지나치는 길에 잠시 들여다 본 방앗간엔 구수한 냄새와 함께 설날에 대한 기대가 넘쳐 있었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가 있는 반장님 댁도 바빴다. 쌀, 옥수수, 누룽지 등이 빙글빙글 손으로 돌리는 기계 속에서 하얗게 튀겨져 나왔다. “뻥이요!” 소리를 치면 둘러선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고, 곧이어 “빵!” 대포 소리와 함께 하얗고 구수한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작실 단강리 섬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옥 집사님, 지금순.. 2021. 7. 27.
귀향(歸鄕) 잠깐 이야기를 들었을 뿐, 한 번도 당신을 뵌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 떠나는 날 한쪽 편 고즈넉이 당신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향년 92세, 그 세월의 길이는 얼마쯤일까요. 병원이었건, 양로원이었건, 혹은 노상(路上)이었건 사람들 말 당신 쓰러진 곳 어디라 하더라도 당신은 돌아와 고향 땅에 묻힙니다. “어-야-디-야” 마을 청년 모자라 당신 조카까지 멘 상여를 타고 비 내려 질퍽한 겨울 길을, 오랜만에 물길 찾은 내를, 가파른 산길을 걸어올라 마침내 당신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꽃가마 타고 와 연분 맺었을 먼저 가신 할머니, 이번엔 당신이 꽃상여 타고 할머니 곁을 찾으셨습니다. 사방 편하게 산들이 달려 당신 살아온 마을을 품고, 흐르는 남한강 저만치 한 자락 굽어보이는 곳, 문득 당신이 행복하.. 2021. 7. 26.
때로는 때론 연극이 보고 싶다. 영화가 보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연주회 생각이 나고 합창을 듣고 싶기도 하다. 그림 구경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큰 서점에 들러 책 구경을 하고 싶기도 하다. 문득 생각 없이 인파속에 묻히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욕심처럼 - 1989년 2021. 7. 24.
부적 섬뜰속 속회인도를 부탁받았다. 새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용자 할머니 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예배를 드리곤 부적을 떼어 달라는 것이었다. 부적을 떼어 달라는 부탁이 하나님을 보다 확실하게 섬기려는 할머니의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믿음은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럴듯한 부적을, 부적이라 부르지는 않지만 부적의 의미를 가진 것들을 거리낌 없이 소유하는 이도 적지 않으니까. 부적을 잘못 떼면 부적 뗀 사람이 되게 앓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하기 때문이었을까, 부적을 뗀다는 말을 듣고 드리는 예배는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찬송도 그랬고 기도도 그랬다. 더욱 힘찼고 더욱 간절했다. 예배를 마치고 부적을 뗐다. 기다란 것 하나, 그보다 작은 것 두 개.. 2021. 7. 23.
무지개 다리 “삼라만상은 모두 상이하고 독특하고 희귀하고 낯설구나./무엇이나 변덕스럽고 점철되어 있나니(누가 그 이치를 알까?)/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고, 밝거나 어둡구나./이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분이 낳으시는 것이니, 그분을 찬미할지어다.”(제라드 홉킨스, , 김영남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p.88, ‘알록달록한 아름다움’ 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삼복더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 ·중복이 지났고 이제 대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마른 장마도 끝이 났다지요? 요즘 하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새털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뭔가 목가적 세계의 문처럼 보입니다. 저녁 노을 또한 장관입니다. 지난 월요일 늦은 오후에 공원 근처를 걷고 있는데, 여성 몇 분이 휴대.. 2021. 7. 22.
겨울 직행버스 농번기 땐 거의 텅 비어 다니던 버스가 요즘은 만원이다. 일 쉴 때 다녀올 데 다녀오고자 하는 사람들로 때론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다. 살림도구를 사러 나가는 이, 바쁜 일 때문에 미뤘던 병 치료 받으러 나가는 이, 멀리 사는 자식 네 다니러 가는 이, 시내바람이라도 쐴 겸 약주 한 잔 하러 가는 이들도 있다. 이래저래 원주를 자주 오가야 하는 나로선 때론 자리가 없고, 때론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지만 그래도 붐비는 버스가 좋다. 아직도 농촌에 남은 사람들. 땅 끝에 남아 그 땅 지키는 사람들. 주름진 얼굴, 허름한 옷차림이라 하여도 그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위험한줄 알면서도 끝가지 진지를 사수하는 병사처럼 떳떳하고 당당하다. 웃음과 이야기로 생기 가득한 단강의 겨울 직행버스, 모처럼 사람 사는 마을이.. 2021. 7. 22.
우리의 숨은 하느님 나는 마음을 보며 산다 하늘을 보듯 마음을 본다 눈빛에 깃든 마음을 말투에 깃든 속내를 보이지 않지만 있는 숨은 마음을 보는 일 성경에서 본 '너희는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는 고려팔만대장경을 두 글자로 함축하면 '마음(心)'이라는 예수가 끊임없이 가리킨 마음 '마음으로 범한 일은 범한 일이라'는 이처럼 숨은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들은 스러지려는 나를 일으켜 태우는 불꽃이 된다 마음을 보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일 마음을 지키는 일은 숨을 바라보는 일 하루 온종일 놓치지 않는 숨줄 생의 숨줄을 붙드는 기도 숨을 바라보는 일은 온전함과 하나되는 일 숨을 바라보는 일은 나의 리듬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순례길 너와 나가 둘이 아님을 서로가 숨으로 하나될 수 있음을 아는 평화 나를 온전하신 그분 .. 2021. 7. 21.
자유시장에서 깨달은 자유의 의미 언젠가 원주 자유시장 앞을 지나다 자전거를 탄 청년을 본 적이 있는데, 자전거 뒤엔 리어카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연신 자전거를 빵빵거리며 자동차와 사람 붐비는 시장 길을 빠져 나가느라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청년의 모습은 내게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자전거만이라면 좀 더 쉽게 틈새를 빠져 나갈 수도 있고, 빨리 달릴 수도 있을 터이지만 뒤에 매단 리어카를 잊으면 안 됩니다.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의 기준은 자전거가 아니라 리어카입니다. 자유란 그런 것입니다. 혼자만의 사색이나 행동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을 잊지 않는 것, 혼자만의 출구가 아니라 모두의 출구를 찾는 것 말입니다. 혼자라면 어디라도 자유로울 수 있지만 함께 사는 이들의 입장에 서는 것, 그들의 입장을 잊거나 버리지 않는.. 2021. 7. 21.